내 취향대로 이야기하는 한국 순정 만화
[레드문]에서 카지노 게임에 대한 로맨틱한 감정과 그에 준하는 집착을 보여준 인물은 사다드와 아즐라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다드는 호위무사고 아즐라는 친동생(...)이니 BL의 레이더를 가지고 태어난 독자들이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했을까. 그래서 이 작품에 대한 평 중에 순정 만화의 틀을 쓰고 있지만 알고 보면 BL이다,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물론 아즐라와의 관계는 성애적 관계라기보다 형제애에 가까우며, 여러 사연으로 인한 반동으로 매우 애틋하고 지극할 수밖에 없는 둘의 관계가 조금 과하게 보였을 뿐, 이라고 서둘러 덧붙인다. 사회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만한 소지는 없는, 브라더 콤플렉스에 가까운 느낌이라고 생각하자.
메인은 역시 사다드이니 말이다.
사다드의 명대사가 있다.
"정말로 그대의 흔적은 없는 것인가...
577번의 해가 뜨고 져도 그대는 나를 부르지 않으니...
아아... 나의 태양, 나의 생명
그대가 죽으면 나도 죽으리"
윤태영이 지구에서 비행기 사고로 조난을 당해 그의 생존을 알 수 없을 때, 정신은 윤태영에게 옮기고 텅 빈 카지노 게임의 육체를 얼려 둔 히말라야 굴 속으로 들어가, 같이 죽는 것을 결심하며 내뱉는 대사이다. 그리고 이 대사에 이어 사다드와 카지노 게임의 과거 이야기가 그려진다. 무려 단행본 1권 분량으로.
(작가가 별도로 페이지를 할애하려 어떤 관계를 설명한다는 건 이 관계가 작품의 메인 관계라는 걸 나타내는 것이다.)
과거 서사는 노예 신분의 사다드와 왕조의 후계자인 카지노 게임가 각자의 결핍을 채워주는 첫 번째 사람이 되어주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서로가 우선될 수밖에 없음을 클리셰에 충실하게 보여준다.
평화로운 시기엔 각자 좋아하는 여성과 좋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다 보니 사이좋은 형&동생 정도로 볼 수도 있지만, 그 와중에도 서로에게 가진 진심을 깨닫게 될 결정적인 사건의 전조와 같은 대사들이 오고 가니, 아 그 길로 달려 나가는구나 싶은 느낌이다.
(난 모두를 지켜야 하는 태양이니까 사다드만 지킬 순 없어, 그러니 사다드가 강해져야 해, 와 같은 대사는 참으로 뭐랄까... 민망하면서도 날 감정의 풋풋함에 결국 져 주게 되어버린 달까..)
서로에 대한 감정을 명확히 하는 계기는 역시나 일련의 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외부의 상황으로부터 서로를 구하기 위해 헤어지는 것으로.헤어져 보니마음이 찢어진다는 건 이런 느낌이라는 걸 알게 되고, 모른 척해야 하지만서로를 지키려다 결국 다시 만나 함께 하는 것을 택하며 서로가 최우선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방식이다.시작은 둘이 왜 애틋할 수밖에 없는지, 이런 서사가 있어서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였을지 모르겠지만, 요소요소가 너무나 클리셰라 사랑이 싹튼 계기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제 눈이 썩어서 그런 걸 지도 몰라요)
이후의 이야기는 온갖 역경 속에서 오해와 헤어짐이 있었지만 모든 걸 극복하고 결국 둘밖에 없다는 걸 확인하는 내용에 가깝달까.
지구로 도망 올 때도 필라르의 옆엔 사다드가 있었고, 윤태영이 필라르로 자각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이유도 사다드를 잃고 싶지 않아서였다. 필라르는 윤태영의 신체를 택해 자신을 온전히 받아 주지 못하는 사다드의 모습에 상처를 받고, 필라르의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낀 사다드는 그의 곁을 떠나기로 다짐한다. 그래서 시그너스에 도착하고서도 한동안 둘은 떨어져 있게 되는데 필라르는 잠이 들면 울며 잠꼬대로 사다드를 찾질 않나, 그렇게 사다드는 필라르 곁을 떠났으면서도 적진으로 들어가 필라르를 위해 아즐라를 죽일 궁리를 하고 있질 않나. 그냥 일 더 꼬이기 전에 둘이 빨리 만나라 하고 싶어진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극한으로 몰리던 카지노 게임가 결국 진심을 말해버렸으니, 이 둘은 작가가 인정한 공식 커플이 아닐 수가 없지 않을까?
"이상해.. 나 너만 보면 언제나 좀 이상해져... 그래도.. 나 너무 기뻐... 다시는 못 볼 거라 생각한 네가 찾아와서..."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고 했었지...?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저 대사 속의 지나친 말 줄임 표와 카지노 게임 얼굴의 발그레 선으로도 음? 음?? 싶었는데, 이래 놓고 좀 있다 둘이 계곡에서 해맑게 물장구치며 노는 거 그리시면 작가님, 이 둘이 커플이라고 공표하신 아닌가요?
그러면 이제 둘이 잘 지내고 협력하여 적을 물리치면 되는데, 서로여야 하는 마지막 정점에 필요한 고난까지 꼼꼼하게 챙기셨으니.
카지노 게임가 아즐라를 살리기 위해 수혈을 한 탓에 작품 말미엔 카지노 게임의 능력이 대부분 아즐라에게 옮겨가게 된다.(이 설정은 진정한 구원자가 되기 위한 설정이기도 하지만, 그 결말까지 가는 도중은 카지노 게임와 사다드의 관계를 시험하는 역할도 해 준다). 이로 인해 사다드의 정신 교감이 카지노 게임가 아닌 아즐라에게 반응하는데 카지노 게임의 모든 서러움이 이때 터진다. 다른 건 다 참아도, 능력도 머리색도 어머니도 루나레나도 다 참겠지만 너만은 싫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이후 몇 번이나 사다드는 카지노 게임 대신 아즐라를 구해버려 박진희(앞서 얘기한 카지노 게임 아버지 포지션이 되어버린 이..)에게 우리 애 니들한테 못 맡기겠다, 이 괘씸한 놈들아! 소리를 듣기도 한다. 하지만 이후 카지노 게임에게 독을 먹인 자신의 첫사랑을 한치의 흔들림 없이 죽여버림으로써 사다드는 카지노 게임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증명해 용서를 얻는다(독자들에게).
결말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진정한 구원자로 시그너스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운 (말 그래도 모든 것) 카지노 게임가 백치가 되어, 윤태영의 가족과 박진희와 함께 지구로 돌아왔을 때, 시그너스인 중 유일하게 사다드가 지구로 함께 온다. 그리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카지노 게임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모습이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다. 박진희 또한 카지노 게임를 돌봐 주지만 그렇게 잘해 줘도 사다드만 찾는다는 그의 대사에서 서브 남주의 질투보다는 딸을 뺏긴 아버지가 보여서 (이것 참).
그래서 엔딩까지 작품의 중요한 감정 흐름은 카지노 게임와 사다드 중심으로 진행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서사를 가진 둘 사이에 어떤 여자 주인공이 들어올 수 있겠는가. 사실 두 사람 중 한 명을 여자로 설정했다면 완벽한 순정 만화 클리셰가 될 것인데, 사실 BL의 클리셰이기도 하니 BL을 조금이라도 본 사람은 이걸 BL로 보지 않기도 힘들 것이다.
아즐라...아즐라와의 관계도 쓰고 싶은 말이 가득인데, 카지노 게임와 사다드의 관계에 비하면 브라더 콤플렉스 또는 서브캐릭터에 가까우니 간략하게만 정리해 보겠다.
우선 둘은 친형제이지만 카지노 게임는 아즐라를 너무나 애틋하고 안타깝게 생각하고, 아즐라는 카지노 게임를 증오한다는 점에서 관계 세팅이 시작된다.아즐라가 갓난아기일 때 예언과 역적 우두머리의 욕망에 의해 그 우두머리에게 납치되고 지속적으로 세뇌를 당하며 자랐기 때문에 아즐라에게 카지노 게임는 증오하고 없애야 하는 존재다. 그런 아즐라를 멀리서 바라보며 (어릴 때 그럴 기회가 종종 있었다) 카지노 게임는 불쌍한 내 동생 내가 꼭 구해줄 거야 의 모드였고.
아즐라가 죽을 고비에 처했을 때 카지노 게임가 적진의 한 복판으로 들어가 아즐라를 살려주는데, 그때 아즐라는 처음으로 카지노 게임를 형으로 받아들이며 뿌리 깊이 존재하고 있었던 자신의 애정 결핍을 채워 줄 대상으로 카지노 게임에게 이끌린다. 카지노 게임는 그런 아즐라에게 애정은 물론 사다드를 제외한 자신의 모든 것, 어머니와 루나레나, 시그너스의 '태양' 칭호까지 다 쏟아 준다. 여기에서 아즐라는 카지노 게임의 애정을 가장 기꺼워하는데, 이전에 '태양', 어머니, 루나레나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10권(단행본 총 11권 기준)까지 그의 행보를 생각하면 놀랍다.
이 자식 결국 자기 형 가지고 싶어서 그 난리를 친 거야? 싶어 브라더 콤플렉스로만 치부하기엔 과하다였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마음이 통한 동생에게 뭐라도 주고 싶어 안달이 난 카지노 게임가 그 와중에 사다드는 못준다고 했으니, 그래 공식 커플은 여기다, 안심했지만 말이다.
아즐라의 세뇌 작업의 내용을 안 카지노 게임가 내 동생한테 이런 짓까지 했다고? 라며 분노하며 넌 아무것도 하지 마, 그 자식 내가 죽일 거야라고 할 때나, 아즐라가 형 껌딱지가 되어 나 재워 줘, 모드가 되고 아파서 누워있는 카지노 게임를 끌어안고 자다가 잠에서 깨는 장면에선 다시금 잠시 고민에 든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뭐 이리 극단적으로 끈적거리나 싶은 건, 아마도 둘의 이런 모습이 마지막 권 , 한 권에 몰아서 나오기 때문에 더 강력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공식커플은 카지노 게임와 사다드이니 말이다.
[레드문]을 다 보고 났을 때 잠시 혼란스러움이 있었다.
결말도 충격적이었지만, 장르의 경계를 넘나 드는 것이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선명하게 등장하여, 뭐지? 뭐지? 의 연속이었다고 할까.
어떤 면에선 뭐지? 뭐지? 가 계속 이어지는 게 이 작품을 끝까지 놓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었을 수도 있으니, 다르게 표현하면 예측 불허의 스토리 전개가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가 될 수도 있겠다.
내가 유별나게도 여자 캐릭터의 역할과 카지노 게임-사다드, 카지노 게임-아즐라 관계에 꽂혀서 모든 장면을 다 그렇게 봐 버린 걸 지도 모를 일이고.
카지노 게임 일행이 시그너스로 돌아가고 나서부터의 이야기 전개는 본격적인 사건이 속도감 있게 진행되어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다. (이제야 이런 소리 해봐야...)
SF 영화와 같은 스토리 자체의 재미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니 그런 장르를 좋아한다면 추천할만한 작품이다.
그리고 내가 꽂혀버린 장르의 경계를 한 번 확인해 보고 싶다고 한다면, 이 또한 강력하게 추천한다.
보고 나면 정말 하고 싶어 지는 말이 많아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원래 하고 싶어지는 말이 많아지는 게 보기에 즐거운 작품이라는 반증이니 말이다.
그리고 소년만화와 순정만화, 여기에 BL의 경계까지 자유롭게 드나드는 황미나 작가는 순정만화의 대모가 아니라 한국만화의 대모라고 불려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 시대에 그런 명성을 가지고 장르적 실험을 자유롭게 펼친 대모께 경의를 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