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겨진 페이지
영주가 눈을 떴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타고 천천히 밀려들었다. 살짝 기울어진 창문 틈으로 책상 모서리가 부드러운 금빛으로 스며들어, 길고 가는 선을 그렸다. 따스한 빛은 영주의 마음을 스치고, 등줄기를 따라 부드럽게 퍼져나갔다. 집 안에 또렷하게 보이는 먼지 알갱이들은 공중에서 가볍게 떠돌며, 금가루처럼 반짝였다.
영주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천천히 내쉰 다음,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눈앞에 초록빛 잎사귀 위로 부드러운 금빛이 내려앉은 장면이 펼쳐졌고, 잔잔한 바람결이 얼굴을 스치자 흠칫 놀랐다. 이내 수줍게 웃으며 인상을 살짝 찌푸린 채 기지개를 켰다. 그렇게 영주는 어둠을 밀어낼 용기를 얻은 것처럼 보였다.
영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문고리를 돌리자 안쪽의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쳤는지 다시금 움찔거렸다. 스위치를 켜고 들어간 순간, 약간 빛바랜 조명 아래 자신을 오롯이 마주하게 되었다.
피곤이 내려앉은 눈가, 헝클어진 머리카락,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보고, 영주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한 번 문질렀다. 이내 수도꼭지를 틀었고,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고요했던 화장실을 가득 메웠다. 찬물과 더운물을 적당히 조절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조심히 받고선 얼굴을 적셨다. 전쟁 같던 어제와 다른 오늘이었다.
물방울이 이마에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몇 번 더 행군 뒤, 찬장을 여니 수건이 없었다. 아쉬운 대로 두루마리 휴지를 조금 풀어 얼굴을 꾹꾹 눌러 닦은 후, 거울을 바라보았다. 영주는 다음으로 칫솔을 집어 들었다. 치약을 짜는 동안, 치약이 튜브 끝에서 말려 올라오는 모습이 뭔가 어색했다. 입에 칫솔을 가져가 윗니, 아랫니, 그리고 어금니까지 꼼꼼하게 문질렀다. 민트 향이 입 안을 가득 채웠고, 상쾌한 거품이 혀끝까지 닿았다. 한참 동안 이를 닦은 후, 다시 물을 틀어 입을 헹구었다.
영주는 대충 옷소매로 입을 닦은 뒤, 불을 끄고 나왔다. 책상 서랍에 먼지 쌓인 로션을 꺼냈다. 뚜껑을 열어 손에 쭉 짠 뒤, 얼굴에 부드럽게 두드려 바른 뒤 뭔가 산뜻해진 기분을 느꼈다. 옆에 작은 빗을 집어 들고 엉킨 머리를 빗은 뒤, 머리끈으로 동여맸다.
전쟁터에 나갈 준비를 끝낸 장군처럼 영주는 창문을 다시 한번 쓱 쳐다본 뒤, 옷장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나갈 채비를 하는 모습이었다. 단추를 하나씩 끼우며 천천히 손목을 접어 단을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영주는 바지 위에 걸쳐 입은 셔츠의 앞자락을 살짝 넣었다가 빼기도 하는 등 멋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에코백 하나를 집어든 영주는 신반을 신으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문을 여는 순간, 바깥의 공기가 안으로 훅 스며들었지만, 이번에는 놀라지 않은 듯하다. 영주는 조용히 문을 닫고 한 걸음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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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가 발걸음을 옮긴 곳은 일전의 오래된 서점이었다. 언제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것만 같은 그곳은 따뜻한 종이 냄새가 가득했다. 영주는 책장을 따라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작은 전등 아래 나름의 오와 열을 맞추고 있는 책들을 훑다가 손끝이 멈췄다.
‘몽상가의 서막’
책은 낡았지만 단단했다. 검은색 가죽 표지 위로 희미하게 각인된 제목이 뭔가 자신과 닮아 보였다. 조심스레 책을 꺼내 종이를 팔락이자 조용한 서점에 크게 울렸다.
‘이 이야기는 한 사람의 역사이다.’
영주는 페이지를 몇 차례 넘겼다. 예상과 달리 조금 진부한 이야기가 늘어져 있었지만, 알 수 없는 호기심이 자극됐다. 몇 장을 더 넘기던 중, 손이 갑자기 허공을 스쳤다. 페이지가 찢겨 있었다. 영주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앞뒤를 살폈다. 중간 부분이 불규칙하게 사라져 있었다. 어떤 장은 완전히 뜯겨나갔고, 또 어떤 곳은 반쯤만 남아 어떤 내용인지 유추할 수도 없었다.
마지막 장에는 겨우 몇 줄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이제, 선택해야 한다.’
영주는 책을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갑자기 괜히 밖으로 나온 건 아닐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좋은 책이지 않나요?”
조용한 목소리에 영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서점 주인이 책장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눈이 반짝거렸다.
"이 책…" 영주는 어색하게 책을 들어 보였다. "중간이 찢겨 있고, 끝도 없어요."
주인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죠. 나도 참 아쉬워요.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였거든요. 하지만… 원래 그랬어요."
"원래요?"
"네, 이 책은 언제부터인가 불완전한 채로 남아 있었어요. 사람들이 이걸 집어 들고는 궁금해하지만, 결국 다시 내려놓죠. 결말이 없으니까요."
주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영주를 바라보았다.
"괜찮다면 이 책을 선물로 드릴게요."
"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카지노 게임 추천 자연스레 주인의 말을 기다렸다.
"그 빈 부분을 채워 주세요."
카지노 게임 추천 손에 든 책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생각하는 이야기의 끝을 적어 주세요. 이 책을 완성시켜주세요."
카지노 게임 추천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책을 덮고 천천히 손가락으로 표지를 쓸었다.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 누군가가 남겨둔 빈 공간.그리고, 그 공간을 채울 수 있다는 사실에 카지노 게임 추천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시, 책을 가슴에 품었다.
"알겠어요."
서점 주인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기대하겠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또 볼 수 있길 바랄게요."
그렇게, 영주는 다시 문을 열고 서점 밖으로 나섰다. 바람이 살짝 불어 영주의 머리칼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