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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phy Apr 01. 2025

13. 카지노 게임 그림으로 그린다면



장례식장을 다녀왔다.


소꿉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버님 얼굴을 영정사진으로 처음 뵈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에 이 친구가 심심찮게 등장하는데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마치 아버지가 없는 아이였던 것처럼.

친구의 얘기를 들어보니 자기도 아버지 기억이 별로 없단다.

그 한 마디로 많은 것들이 이해되었다.

아버님의 인생을 어떤 색이었을까... 잠깐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엄마야!’ 라고 소리를 쳤다. 엄마를 부른 것이 아니라 놀람을 표현하는 감탄사임은 물론이다.


장례식장은 슬픈 곳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숨이 붙어있는 사람에겐 옛날 지인을 만나 회포를 푸는 정겨운(?) 곳이기도 하다.

그런 연유로 생각지도 못했던 초등학교 친구가 멀리서 나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기억을 되살려보려고 그 애의 얼굴을 더듬어보니 아련한 느낌과 함께 희뿌연 과거가 되살아났다.

딱히 친했던 사이는 아니었고 같은 반이었던 기억 정도만 있었다.

우리는 장례식에서 치러지는 또 다른 의식을 아주 능숙하게 행했다.

속으론 ‘나만 나이 드는 줄 알았는데 너도 이제 별 수 없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겉으론 깜짝 놀란 듯, 어쩜 옛날 그대로냐며 너스레를 주고받는 그런 의식이다.

실은 그 친구의 어릴 적 얼굴 조차 가물가물 한지라 이 의식을 최대한 빨리 해치우고 싶었지만, 그 친구가 ‘하나도 안 변했다’는 거짓말을 세 번이나 하는 바람에 결국 나도 떠밀리듯 ‘너도...’라고 말하고 말았고 그제서야 의식은 끝났다.


식장은 그렇게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아버지가 식구들과 그렇게 친밀한 관계가 아니어서인지 자식들도 의무를 다하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자기 장례식인데 자기가 주인공이 아닌 것 같은 이상한 분위기. 왠지 짠했다.

저 분도 세상에 처음 왔을 때는 눈부시게 반짝였을텐데. 모든 가능성들을 그 작은 몸에 담고 그저 맑았을텐데. 그도 그 때는 별이었을 텐데.


카지노 게임.

별 하나가 떨어진 것이다.


카지노 게임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막연히 카지노 게임을 어둠과 두려움으로 인식한다면 해골바가지나 시커먼 암흑, 무덤 등으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사람들 사이, 그 관계 안에서 카지노 게임을 본다면 그것을 어떻게 형상화 해야할까?


그림의 출발은 사유이다.

카지노 게임 생각해보자.


카지노 게임을 육체에 한정 지어 생각해 본다면 물질로 이루어진 육체가 분자 단위로 다시 분해되고 환원되어 형체를 잃어버리게 되는것. 이것이 인간이 카지노 게임에 대해 알 수 있는 물리적인 현상이다.

그럼, 그 물질에 담겨있던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서부턴 믿음의 영역이다.

영혼이 또 다른 어떤 세계로 간다고 믿는 사람, 혹은 다시 다른 존재로 환생한다고 믿는 사람. 영혼이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인간은 물질 이상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


그렇다면 이런 저런 철학적, 종교적 사유를 다 제쳐놓고 그저 남겨진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카지노 게임은 무엇일까?

뜻밖에 아주 심플한 답이 떠올랐다.

없는 것.

카지노 게임은 그저 ‘없는 것‘이지 않을까?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 그래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것.

이것이 남겨진 사람에게 카지노 게임이 의미하는 바이고 그래서 아이들에게 카지노 게임을 설명할 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죽는다는 건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거야.’

그래서 아이들은 카지노 게임이 뭔지 몰라도 운다.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생각에서 카지노 게임을 그린다면 ‘없는 상태’를 그려야 하는 것일까?

흠.... 있는 장면은 그릴 수 있는데 없는 장면은 도대체 어떻게 그리는 것인가.

여기에도 없고 저기에도 없고 최소한 내 시각세포에 인지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제로인 상태를 도데체 어떻게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문득 그림책 한 권이 떠올랐다.

존 버닝햄의 ‘우리 할아버지’라는 책이다.


언제부터인지, 왜인지는 모르지만 어린 손녀와 나이든 할아버지가 같이 지내고 있다.

어쩌면 손녀가 정기적으로 한 번씩 할아버지네 집을 다녀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부모도 함께 있었겠지만 그림책에는 할아버지와 손녀 말고는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


할아버지와 손녀가 주고받는 대화는 항상 동문서답이다.

그림책은 서로의 동문서답을 리듬감 있게 마치 장단 맞추듯 보여준다.

그들이 동문서답을 하고 있다고 해서 서로에게 진실하지 않거나 관심이 없거나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아끼고 사랑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둘의 세계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시작하는 세계와 마감하는 세계가 만났기 때문이다.

손녀는 이제 막 인생이라는 기차에 올라탄 새로운 손님이고 할아버지는 이 여행을 다 마치고 내리기 직전의 손님이라는 것. 그것이 이유다.


아직 세상이 신비로 가득차 동화처럼 펼쳐지고 있는 손녀와 모든 이야기를 추억에서 소환하고 있는 할아버지.

아이와 노인은 어쩌면 현실을 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두 사람의 육체는 이곳 현실에 함께 있었으나 아이는 상상의 세계에, 노인은 추억의 세계에 살았고 존 버닝햄은 예쁜 동심과 노인의 아련한 그리움을 한 장면에 함께 묘사하는 마법을 부렸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점점 기운이 없어지고 손녀랑 나가서 놀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이쯤 되면 독자는 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겠구나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한다.

존 버닝햄은 이 카지노 게임을 어떻게 표현할까... 궁금하던 중 마지막 책장을 넘겼는데......

역시... 실망시키지 않았다.


존 버닝햄은 아무런 설명도, 아무런 대사도 없이 덩그러니 비어있는 소파를 그려놓았다.

바로 앞 페이지까지 있었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없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정확하게 어린아이가 경험하는 카지노 게임일 것이다.

할아버지가 늘 앉아 있던 소파, 그 소파에서 할아버지의 무릎에 안겨 있곤 했던 손녀는 슬픔이라던가 놀람이라던가 하는 격한 감정의 표현 없이 물끄러미 그 빈 소파를 바라보고 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잔잔하게 마음을 진동시켰다.


아마 이 그림이 그림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아니고 그냥 회화 작품으로서 전시되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 감정이 전달이 되었을 것이다.

‘카지노 게임’이라는 제목을 달고서.

문득 존재 자체의 소멸은 아니지만 이별도 작은 카지노 게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없다’는 사실을 똑같이 공유하는 개념이니까.

할아버지의 소파처럼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이 쓰던 물건, 그 사람이 있던 공간, 남긴 흔적...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무엇이 아닐까.


작업해보고 싶은 주제가 또 하나 늘었다.



카지노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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