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최승자, <삼십 세중
최승자 시인이 말한 서른이 요즘은 마흔인 것 같다.
카지노 게임에 마흔을 맞이한 영희씨역시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뇌졸중으로 쓰러져 왼쪽 편마비가 온 엄마를 카지노 게임 째 병간호 중이었으며, 누가 돈을 벌어다주는 구조가 아니었으므로 밤이란, 하루의 피곤을 풀고 체력을 충전하는 시간이 아니라 돈을 버는 노동의 시간이었다. 허름하고 작은 주점은 빈 술병에 따라 술값이 계산되었으므로, 영희씨는 병 속의 술을 자기 위 속으로 옮겨넣는 노동을 밤마다 반복했다.
열 세살의 딸이 있었지만,어떻게 크는지 알지 못했는데
그때딸은
'영희씨에게 다른 삶은 없는걸까. 다른 선택은 상상할 수 없을까. 언제까지 이렇게 사는 걸까.' 어렴풋하게나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지 답답했지만,
내가 영희씨였더라도 아픈 엄마를 그냥 내버려두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문제는 가족을 돌봄으로써 너덜해져가는 영희씨가 아니라,
돌봄 노동을 외면한 다른 형제들과 그때까지 미비했던 사회 복지 시스템이었다고, 지금은 안다.
이제와서야 영희씨가 후회되는 것은그때나 지금이나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은 아니다. 후회 중 하나는왜 내 딸을 충분히 보살피지 못했을까, 엄마와 딸로서보낼 수 있는시간을 보내지 못했을까하는 점이다. 늘 부족한 잠과 얇디얇은 지갑은 신경을 예민하게 했고, 미래를 불안하게 했고, 딸의 현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보아주지 못했다.
영희씨가 자신을 좀더 돌보았더라면,후회가 덜 했을까?
딸의 현재와 미래에 좀더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도, 딸은 글 쓰는 사람이 되었을까?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카지노 게임의열세 살은
2023년에 마흔이 되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일을 병행한다.
그때의 영희씨와 아주 다른 모습으로 산다.
가끔 사춘기를 통과하는 여고생처럼 영희씨에게 철없는 말을 쏟아내지만, 대체로 평온하다.
평온하게, 그러나 종이 위에 옮겨놓은 문장들은 치열하게 스스로와 싸워 온 흔적들이다.
간병은 커녕 내 새끼 돌보는 일에도 반 걸음 떨어져 있고,
자신의 커리어를 열심히 쌓아가는 중인데 자기 자신과 싸우는 일이 왜 필요할까.
죽어라 고생해봤자 보상받지 못했던 시간들,
그 고생을 가장 알아주길 바랐던 외할머니는 끝까지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너무나도 듣고 싶고,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을 뒤로 하고 영희씨는 다 커 버린 딸을 위해 또 자기 인생 희생하기를 택했다. 이제라도 내가 엄마로서 해 줄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니까 '희생이지만 희생이 아니라'고 여기며.
그래서 외할머니의 몫이었던 문장들,
고맙다와 미안하다는 딸의 몫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영희씨는 알까.
그게 왜 나의 문장이 된 것인지 어리둥절하고 때로는 억울한 마음으로 읽고 쓰는 날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까.
혹시 나중에 이 글이 정말 책이 되어 영희씨가 보게 된다면, "미안한 마음 갖지 마시라"미리 써 놓는다.
실컷 사람 미안하게 써 놓고, 미안해하지 말라 하면 다냐 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덕분에 읽고 쓰는 사람이 되었다고,
서로에게 미안해하지 말자고.
카지노 게임는 각자 최선을 다해 살아오지 않았느냐고.
카지노 게임가 함께 할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 알 수 없으니 그저 오늘 서로에게 고마워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