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내가 겪은 군대의 가혹행위들
해양경찰로 군대를 가게 된 이유는 대학 방송국 1년 선배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 형은 육군이었는데 본인 부대 옆에 있는 해안가에서 경비 초소에 근무하는 전투경찰이 가장 편한 보직이었다며 내게 그곳으로 지원하기를 강력 추천했다. 다만 거기서 근무하는 전투경찰을 해양경찰로 오인했고 내게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조언을 해줬다. 난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당시엔 인터넷이 활성화된 시기가 아니어서 먼저 입대한 친구나 선배 등 주변의 조언을 듣고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전투경찰 중 어디를 지원할지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변에 특수부대 출신은 작은 아버지 한 분이라 아예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냥 특수부대는 싫었다.
우리 집안에선 가장 먼저 77년 생 사촌형이 96년 여름에 해군으로 지원카지노 쿠폰. 그 영향을 받아서일까? 1살 어린 사촌동생이 나보다 1달 빠른 97년 10월 해군에 입대카지노 쿠폰. 그다음 순서로 내가 97.11.3에 해양경찰로, 내 동생(나와 내 동생은 쌍둥이)은 97.11.24일에 해군으로 입대카지노 쿠폰. 집안에서 내 또래 5명의 군복무 인원 중 4명이 해군훈련소가 있는 진해에서 훈련을 받았고 나머지 1명만 육군을 지원카지노 쿠폰.
동기들과 함께였던 4개월 간의 훈련, 교육 기간은 좋았다. 다만 자대배치를 받은 이후로는 선임들과 지내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 어떤 선임을 만나는 것에따라 남은 군생활이 편해질지, 고생길이 될지 정해졌다. 1990년대 후반만 해도 구타는 일상이었다. 특히 처음 탔던 300톤급의 경비함에서는 격실 문을 잠그고 나면 밖에선 격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곳에서는 하루에 3번 정도 때리고 맞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아침 식사 뒤, 저녁 점호 끝난 뒤, 그리고 가끔씩 새벽에 깨워서 사람을 두들긴다. 맞는 자세도 정해져 있다.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양팔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린다. 그리고 눈을 감아야 한다. 물론 맞을 때 신음 소리도 내면 안 낸다. 그렇게 약 20분 정도를 버텨야 한다.
한참을 맞고 나면 온몸에서 힘이 죽 빠졌다. 제일 많이 때렸던 사람은 A선임이었다. 그는 일부러 겉으로 드러나는 얼굴 부위는 손대지 않았다. 배나 가슴 부위, 정강이 등 옷으로 감출 수 있는 부위만 신나게 때렸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내가 맘에 안 든다는 게 이유였다. 계속해서 복부만 맞다 보면 소화가 되질 않았다. 참다 참다 배가 너무 아프고 소화가 안된다고 말하니 이젠 배에서 가슴으로 때리는 부위를 바꿨다. 그렇게 또 1달 넘도록 맞다가 어느 날 기절했다. 그때는 아마 아침 먹고 난 이후였을 테다. 경비함의 식자재 보관 창고로 끌려가 벽을 기대고 두 팔을 높이 든 채 맞고 있었다. 그런데 점점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하더니 카메라 셔터가 닫히듯 시야가 좁아지는 게 느껴졌고 어느덧 온 세상이 까맣게 변했다. 그리고 다리가 풀려 쓰러졌다. 이마를 비롯해 온몸에선 식은땀이 흘러 옷이 축축이 젖은 게 느껴졌다. A선임은 내가 요령을 피운다고 생각했는지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내가 왜 쓰러졌지라는 생각보다 먼저 이대로 더 맞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2달 만에 처음으로 요령을 피웠다. 경련이 온 듯 몸을 부르르 떨며 침을 삼키지 않고 입 밖으로 질질흘렸다.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다른 선임이 A를 말렸고 혹시 내가 맞다가 탈이 난 줄 오인한 A선임은 그제야 때리는 걸 멈췄다. 그 일이 있은 뒤로 A선임이 안 때린 건 아니지만 전에 비해 강도나 빈도가 확실히 줄어들었다. 그렇게 지독한 가혹행위를 당했던 첫 고비를 넘겼다.
내가 탔던 300톤급 경비함에는 A만 있는 게 아니었다. A의 동기인 B선임은 경기도 포천 출신이었는데 B는 흥분하면 손에 잡히는 거 아무거나 마구 휘둘렀다. B에게 맞아본 무기로는 커피가 가득 들어있는 맥심 커피병, 밥그릇 등 여기까지만 적겠다. 암튼 억양은 경기도 사람이라 표준어를 쓰지만(당시 경상도나 전라도 사투리 억양이 얼마나 드센가! 그에 비하면 표준어 억양은 귀여웠다) 내용은 전혀 좋은 내용이 아니었다. “너네, 그렇게 빠져서 어쩌고 저쩌고... 죽여버린다... 등등” 그냥 군대 있으면서 약 10만 대 정도 맞은 것 같은데 그중 기억나는 일부만 적어봤다.
항상 나쁜 선임들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배울 점이 있던 선임은 극소수(한 10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화풀이나 자기 불만을 후임에게 투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힘없는 막내니까 때리면 맞을 수밖에. 그래도 무사히 제대해서 다행이지 싶다.
겪었던 가혹행위 중 끝판왕 사건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전라도 출신의 박 00이라는 선임이었다. 그 선임은 주로 때리는 것보다는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벌을 주기로 유명했다. 예를 들면 벌레를 잡아서 그걸 자기가 보는앞에서 먹게 하거나 생강이나 마늘 한 움큼을 씹어서 삼키게 하는 짓을 자주 했다. 다행히도 난 벌레나 생강 대신 카지노 쿠폰를 먹게 됐다. 어느 날 그 선임이 날 야단치려고 마음먹었는지 새벽 4시경 자고 있는 날 깨웠다. 비몽사몽간에 밖으로 나가니 경비함에서 식당으로 쓰는 격실로 들어갔다.
박 : 야, 카지노 쿠폰 1개 꺼내
나 : 네, 알겠습니다.
박 : 껍질 벗겨
나 : 네, 알겠습니다.(막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네, 알겠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알아보겠습니다가 전부임, 다른 말했다가는 신나게 맞음)
박 : 먹어
나 : (묵묵히 카지노 쿠폰 시작)
카지노 쿠폰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땐 생각보다 할 만하다고 여겼다. 두 입, 세 입 익히지 않은 생카지노 쿠폰를 먹을수록 매운 향과 맛에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3분 정도 지나 겨우 카지노 쿠폰 반 개를 먹었다. 토할 것 같아 물을 좀 마시려고 했으나 박 00은 물도 못 마시게 막았다. 내가 행동을 잘못해서 받는 벌이라며 물도 안 된다고 했다(그게 왜 벌이냐 가혹행위지 이 인간아). 박 00은 토하려는 날 보며 만약 토하면 그것까지 모두 긁어서 핥아먹게 할 테니 토하고 싶으면 토하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데 오기가 솟구쳤다.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것 같았다. 일부러 고개를 숙여 내가 화났다는 사실을 얼른 감췄다. 절반 먹은 카지노 쿠폰를 토하는 대신 이를 악물며 참았다. 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다. “그래, 한 번 해보자, 이 나쁜 놈아”, 아마 그날 반쯤 남은 카지노 쿠폰를 먹기까지 박 00을 맘속으로 100번도 넘게 욕했을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카지노 쿠폰를 다 먹었지만 그날 내내 불편한 속은 어쩔 수 없었다. 28개월 군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였다. 제대하기까지 박 00을 나중에 만나게 된다면 하고 싶은 일과 말이 참 많았는데 그냥 참기로 했다. 다시 만날 사람 아닌데, 그냥 나쁜 놈이었지 생각하고 정리하기로 했다. 제대한 지 3년쯤 지나 우연히 아르바이트할 때 박 00을 마주쳤지만 일부러 아는 체하지 않았다. 그냥 그게 최선의 복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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