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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아재 Mar 24. 2025

돌아오지 못할 다리

살면서 우린 때로 선택의 다리를 만난다. 그땐 결정을 해야 한다.

저녁 7시, 학교 인근의 이자까야 상상에서 보미는 남편의 상사인 정혁을 만나고 있었다. 왜 보자고 한 것이냐고 정혁은 시쿵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래도 정혁의 시선이 이따금씩 식탁 너머로 자신의 블라우스 사이의 가슴골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미는 느끼고 있었다.


“꽤 오랜만이네.”


정혁은 시선을 차마 바로 하지 못하고 테이블을 향해서 말했고, 보미는 미소로 답했다. 그녀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지난주에 들은 남편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나 회사 그만둬야 할까 봐.”


남편이 아침 출근시간에 툭하고 던진 한마디가 보미의 마음을 흔들었다. 남편이 회사라고 표현한 곳은 학교였다. 남편과 보미 둘 다 대학교의 교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남편은 출판문화원 쪽에 있었고, 보미는 대학원 행정처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것이 차이였다. 다른 친구들이 근무하는 회사는 보통 실적에 시달리지만, 교직원들은 인간관계만 잘 맺으면 특별히 고생할 것이 없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어차피 학교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정원으로 관리가 되고 있고, 더 받고 싶다고 해도 인원을 증원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은 공무원처럼 편한데, 정년까지 보장되는 시스템도 좋았다.


보미는 학교에 빈자리가 났다는 공고가 뜨자마자, 제일 먼저 남편에게 추천했다. 남편 명주는 작은 출판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해당 출판사가 부도가 나면서, 몇 개월째 급여도 못 받고 있던 형편이었다. 보미는 못 받은 급여는 나중에 받더라도 일단 학교에서 새롭게 결원이 된 자리를 뽑는 자리에 남편이 지원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게 3년도 더 지난 전의 일이었다.


사실 보미가 출판문화원 쪽으로 남편을 지원시키기 전에 한 일이 있었다. 해당 조직 내에 조직도를 다 뽑아서 어떤 사람들이 근무하고 있는지 한번 쭉 살폈다. 그 이름 속에 그녀의 옛 남자친구의 이름도 있었다.


[ 마카지노 게임 ]


그 이름을 보는 순간 그녀의 기억은 10여 년 전을 헤집었다.

스무 살 무렵에 충청도 지역에 있는 한 대학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면서 한 남자를 사귀었는데 그의 이름이 마정혁이었다. 그녀는 아직 사회에 대해서 병아리 수준의 지식만을 가지고 있었고, 남자는 군대를 막 제대하고 복학한 복학생이었다. 그녀의 감수성은 각종 시에 빠져 살았고, 그런 그녀에게 사르트르나 엘리엇 같은 대시인의 주옥같은 글을 줄줄 입에서 읆어대는 선배의 존재는 마치 불을 만난 기름 같았다. 예리한 칼날을 벼루에 간 듯한 글빨을 기반으로 남자는 교내 백일장을 휩쓸었다. 그녀는 종종 그런 정혁이 옆에 앉아서 수업을 듣게 되면 남자의 옆모습을 한 번씩 살펴보곤 했다. 수업을 마치고 교재와 태블릿을 가방에 넣고 있던 카지노 게임 쪽으로 정혁의 시선이 향했다.


“이따 저녁에 뭐 해?”


같은 과 학생들 몇몇이 둘의 그런 모습을 보았지만, 시선을 한번 둘 뿐 특별한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렇게 그들은 학교 앞 주점에 들렀다. 천장이 낮은 주점의 안쪽으로 안내되어서 그들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동동주에 파전을 시켰다. 카지노 게임는 정말 이상했다. 정혁의 눈빛을 보는데 인테리어 백열등의 노르스름한 필라멘트가 별처럼 눈빛에 박혀 있었다. 음악소리가 너무 커서 좌석이 쿵쾅거렸다. 동동주에는 몇 달을 얼린 것인지 살얼음이 퍼져 있었다. 바삭한 파전의 기름진 맛과 상큼한 백김치가 동동주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니?”


“글쎄요, 산다는 것에 대해서 큰 의미를 둔 적이 없어서...”


그 말을 하고 나자 정혁은 그게 얼마나 인생에 대해서 모욕적인 발언이며, 우리가 사는 오늘은 누군가가 그렇게 살고 싶었던 하루일 수 있다고 정형적이고 습관적이기도 한 문구를 들먹였다. 카지노 게임에게 남자의 말은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남자의 눈에 아로새겨진 황금색 필라멘트 조각이면 충분했기에.


그게 술을 불렀다. 하이틴 소설에 나오는 말들은 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잠깐 있었다고 생각한 시간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빨리 흘렀다. 사람들이 떠나고 움직이는 자리가 치워지고 새로운 사람들이 앉을 때도 둘은 망부석처럼 자리를 지켰다. 그땐 그 긴 시간을 무슨 이야기들을 했는지 이젠 기억도 나진 않았다. 어쨌든지 재밌고 유쾌한 시간들이 그녀를 감싼다는 것은 분명했다.


“어머, 여기가 어디야?”


그녀가 말했을 때, 그녀는 이미 다리가 풀려있었다. 분명히 술을 마실 때는 날아갈 듯이 좋았는데 그 이후에 찾아오는 나른함과 졸음 그리고 뭔지 모를 불쾌감이 그녀를 스쳤다. 선배는 휘청거리는 그녀를 다독거리면서 골목길 사이를 걸었다.


“원치 않으면 그냥 가도 돼.”


그런 말을 들으니, 마음속 어디선가 오기가 올라왔다. 늘 주변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서 자라왔다. 그만해도 돼. 힘들면 멈춰도 돼. 중학교 3학년때 투포환을 포기하고 그녀는 정말 마음이 힘들었다. 그것으로 대학을 가려고 했었다. 다름 잘해왔고 전국체전에서 은메달을 따는 등의 성적도 좋았다. 비가 오는 날 훈련 중에 무릎 부상을 당했고, 바닥에 십자 인대가 끊어졌다. 의사는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지만 다시 선수생활은 힘들다고 수술 후 재활치료 때 권했다. 왜 그걸 포기했을까. 겨울엔 정말 고통스러웠다. 포환을 턱에 대고 던져야 하는데 꽁꽁 언 모래들이 포환에 묻어서 던질때마다 턱을 쓸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생채기가 난 턱에는 핏물이 묻어났다.


카지노 게임는 같이 선수생활을 한 친구가 결국 투포환을 계기로 서울의 한 사립 명문대학에 입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워낙 희귀한 운동종목이기도 했고, 국가적인 수요가 있는 종목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명문대학을 간 아이가 카지노 게임의 절친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자신보다 늘 실력이 한 끗 부족한 친구였다는 점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해 준 말이 바로 지금 남자가 쓴 말이었다. 그 말 한마디가 의지로 뭉쳐있던 굳음을 깼고, 그녀는 취업과는 큰 상관이 없어서 인기가 사라진 문창과를 들어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남자의 그 말, 가도 된다는 말에 그녀의 심리적인 반항의 방아쇠가 당겨진 것일까. 그녀는 그날 카지노 게임의 집에서 같이 잠자리를 했다. 굳은 결심을 하고 가도 제대로 못가는 것이 세상인데, 반항에 대한 반항으로 시작되어서 출발하는 길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결국 둘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혁은 자신과 첫 술자리에서 모든 것을 허락한 카지노 게임를 헤픈 여자라고 생각했다. 정혁에게 카지노 게임는 그저 엔조이 상대였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그녀를 데리고 그의 자취방으로 향하곤 했다. 하지만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정혁은 자신이 작가로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세상에는 너무나도 뛰어난 작가들이 많았고, 자신은 결국 평범한 무명작가로 남을 것이라는 것에 자책했다. 그즈음 당연하듯이 카지노 게임는 비닐봉지에 담아 온 임신테스트기를 들이댔고, 그는 새삼 이 불장난을 끝낼 때가 왔다는 사실에 직면했다.


“나는 아직 아빠가 될 준비가 전혀 되질 않았어.”


그 말을 하면서 정혁은 어떻게 해야 조용히 여자를 정리할 수 있는지 생각했다. 정혁은 지난 2년의 시간을 생각하면서 미소 짓고 있었다. 산부인과 대기실은 답답했다. 그는 여자친구가 임신중절 수술을 하는 동안 작은 산부인과 건물을 뱅뱅 돌면서 담배를 피웠다. 그가 피운 담배가 마치 절간의 향초처럼 흔적을 남기면서 담벼락 아래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정혁은 사촌 형의 도움으로 서울 어딘가 출판사로 출근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말을 굳이 여자친구인 카지노 게임에겐 하지 않았다. 그는 적당히 연을 끊고 싶었다. 카지노 게임가 몸을 추스르고 나자, 정혁은 그간의 인연을 정리하면서 작은 선물을 하나 준비했다. 그건 은색 목걸이였다.


“나 서울 가. 잘 지내고, 그동안 고마웠어.”


정혁은 지난 6개월간 이런저런 핑계로 얼굴을 보지 않은 카지노 게임를 보았다. 왠지 카지노 게임는 성숙해 보였다. 둘은 술을 마셨고, 정혁은 카지노 게임에게 마지막 정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가임기가 아닌지 그가 살짝 챙겨 물었다. 다시 그런 실수는 하고 싶지 않았다. 씁쓸한 이별이었다.

“그게 벌써 10년이나 지났네? 참, 결혼은?”


“했지, 벌써.”


정혁은 이제 남의 아내가 된 자신의 옛 연인인 카지노 게임를 쳐다보았다. 왜 보자고 한 것인지 굳이 묻지는 않았지만, 확연히 옛날의 그 감정이 올라왔다. 하늘색 블라우스는 어디 항공사의 승무원들이 입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재질의 광택이 느껴졌다. 그가 식탁 위에 벨을 눌렀다.


“뭐 먹을래?”


“술 한잔 하지 뭐. 이것도 인연인데.”


종업원이 오자 그는 동동주에 파전을 시켰다. 인연이라는 말이 기억의 한 부분을 꺼냈다.


인연이란 참 희한했다. 그가 출판사를 거쳐서 이곳 대학교의 사무처 직원이 된 것이 8년 전이었다. 사촌 형의 소개로 출판사로 옮겨간 뒤에 그는 거래처로 몇 군데 대학에 영업을 하고 있었다. 마침 새로운 부서가 생기는데 직원이 필요하다는 말에 그가 응시를 했는데 덜컥 합격한 일이 생겼다. 출판사에 비하면 말도 안 되게 좋은 자리였다. 그는 대학교에서 출판문화원이 생기면서 생긴 이 자리가 어쩌면 자신에게 행운의 열쇠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입사했는데 여기서 자신의 옛 연인을 만나다니 그것도 카지노 게임를 우연히 본 것은 3년 전이었다. 아니 정확히 자신은 알아보질 못했었다.

동동주에 파전이 나왔고, 정확히 두 잔 즈음 마셨을 때야 정확히 카지노 게임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과거와는 사뭇 다른 인상이었다.


“뭐야? 그 코...”


사람은 코만 바뀌어도 알아보기 힘들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카지노 게임는 완전히 환골탈태한 모습이었다.


“아파트도 인테리어 하잖아. 나도 살짝 리노베이션 한 거지 뭐.”


“그냥 지나치면 몰라보겠는데?”


사실 직원식당에서 몇 번 정혁을 마주한 적이 있었지만 굳이 카지노 게임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카지노 게임는 굳이 코를 세웠다느니, 쌍꺼풀을 살짝 했다느니 하는 상스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원피스가 중력의 바람으로 인해서 살짝 허벅지를 보여주었다가 내려갔다. 향긋한 분냄새가 정혁의 코를 통해서 과거의 살냄새로 바뀌어 들어갔다.


“웬일이야, 내 원망도 했을 텐데?”


그가 말하면서 과거 여자친구였던 카지노 게임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이 마치 버린듯한 형국이 되어서 헤어진 터라 마음에 뭔가 찜찜함이 아직 남아 있었다. 카지노 게임는 대답 대신에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명함을 긴 손톱으로 톡톡 쳤다.


“부탁이 있어서 왔어. 카지노 게임 씨 지금 밑에 직원 한 명 있지?”


“한 명이 아니고 네 명인데?”


“그중에 명주라고 있지 않아?”


“어, 있지, 똘아이 명주?”


정혁은 지금 카지노 게임가 뭘 물어보는지 퍼득 느낌이 왔다. 설마.


“뭐야? 신랑이라도 되는 거야?”


“...............”


“아, 미안 전혀 몰랐네.”


카지노 게임은 머리를 긁적였다. 명주는 그의 부하직원이었다. 그것도 직속부하인데 출판문화원에 입사한 지 2년 된 직원으로 대리 직급을 달고 있었다. 일을 못하는 것은 아닌데, 뭔가 4차원적으로 일처리를 해서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었다. 카지노 게임과 달리 덩치가 큰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회사 그만두고 싶어 하는데, 왜 그런지 말을 안 하네.”


정혁은 그제야 왜 카지노 게임가 자신을 만나러 왔는지 알게 되었다. 그건 자신 때문이기도 했고, 자신 때문이 아니기도 했다. 자신이 얼마 전에 회식할 때 부하직원인 명주를 담배나 피우자면서 따로 밖으로 불러서 한 말이 기억났다. 개념이 없는 거니? 아니면 흙수저라서 갈 곳이 없어서 버티고 있는 거니. 그즈음 명주는 거래처에 발주를 냈는데, 학회에 발표할 논문서적 3백 부에서 한 페이지가 누락되어서 출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아연질색했다. 교수들의 논문 한 페이지가 누락되면 그건 엄청난 실수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건 명주가 최종 업데이트된 파일이 아닌 다른 파일을 인쇄소에 보내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사전에 알게 되어서 인쇄소에 다시 수정 지시를 했다. 삼백 여권의 책이 분철되고 다시 편집되었다. 정혁은 사실 자신이 실수해서 마지막 파일을 잘못 보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하지만 따로 그걸 사과하고 싶진 않았다. 대신 노트북이 열렸을 때 정혁은 자신의 메일함과 후배의 메일함을 열어서 완전히 삭제해 버렸던 것이다. 카지노 게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자신은 잘 알았다.


“남편이 그만두기를 원하는 거야? 계속 다니길 원하는 거야?”


정혁이 눈앞에 놓인 동동주를 쭉 들이켰다. 정혁이 카지노 게임를 보면서 말했다. 그의 눈에 카지노 게임의 가슴이 들어왔다. 아이를 낳고 가슴은 더 풍만 해져 보였다. 그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그는 술을 가득 따랐다. 그리고 단숨에 들이켰다.


“계속 다니게 해야지. 대신 자기가 좀 편하게 해 줘.”


자기라는 말을 하고 나서 보미는 전 남자친구였던 정혁의 목젖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지난 2년간 둘은 얼마나 뒹굴었던가. 결혼식만 올리지 않았지 둘은 그냥 그의 동거생활을 했었다. 나중에는 짐을 싸서 그의 집에서 살았으니까. 둘은 수업을 들으러 같이 다녔고, 주변에서는 씨씨라고 불렀다. 그녀는 전 남편 같은 전 남자친구를 보면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였다. 이젠 각자의 가정을 가지고 있었고, 과거의 흰색이었던 점선은 노란 중앙선이 되었다.


“원하는 것이 그것이었구나.”


카지노 게임의 고개가 아래위로 크게 움직였다. 마치 국민체조를 하는 듯했다. 그리고 말을 더 이었다.


“난 또 뭐라고. 그건 내가 진 빚을 갚는 셈으로 칠께. 어차피 나도 맘이 불편했는데 잘 되었네. 친하게 지낼게. 나도 여기 오래 있지는 못해, 또 승진해서 옮겨갈 거니까. 순환근무잖아. 우리 시스템이.”


핵심을 얘기하고 나니, 둘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카지노 게임은 이후 자신이 어떻게 학교에 입사를 하게 된 것인지와 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한 시간 즈음 이런저런 쓸데없는 이야기가 양쪽 진영에서 끝말잇기를 하듯이 이어졌다. 그리고 갈 시간이 되었다.


“집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들어가 봐해.”


카지노 게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술기운에 용기를 낸 정혁이 그녀의 옆에 붙어 섰다. 그리고 나가기 위해서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뒤에서 껴앉으면서 가슴까지 거머쥐었을 때 그녀가 한마디를 뱉었다.


“돌아오지 못할 다리는 건너지 말자. 서로.”


그 말에 정혁은 성급히 손을 뗐다. 그건 카지노 게임의 말이 맞았다. 과거는 과거이고, 미래는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내가 하는 지금의 선택이 곧 내일의 징검다리가 된다는 사실을 문학을 하는 둘은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둘은 약간은 어색한 악수를 하고 난 뒤에 살짝 목례까지 하면서 헤어졌다. 둘은 각자 지금 한 서로의 선택에 대해서, 뿌듯한 마음까지 들었다.


새벽같이 출근해서 걸레를 집어 들었다. 지난주에 팀장이 자신에게 한 말이 그를 괴롭혔다. 넌 남들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해서 책상 닦고, 반성문 쓰고 하루를 시작해라. 술에 취해서 한 말인지, 과장은 비틀거리면서 침을 바닥에 찍찍 내뱉으면서도 자신을 향한 증오는 숨기지 않았다.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상사의 말은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가 군대에서 배운 예의였다.

출근한 명주는 너무 놀랐다. 팀장 카지노 게임이 자신보다 먼저 출근해서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 아... 안녕하세요, 팀장님.”


그가 고개를 구십 도로 숙였다. 고개를 들었지만 팀장은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뭔가 컴퓨터를 보고 키보드를 두드리던 팀장이 고개를 들었다.


“아, 명주 씨, 우리 커피 한 잔 할래?”


팀장의 목소리는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의 나긋함이 있었다. 명주는 놀라서 눈이 저절로 커졌다. 팀장이 탕비실로 향하자 그도 따라갔다. 잠시 후에 커피를 들고 둘은 후문 쪽 테라스로 나갔다. 명주는 그저 카지노 게임의 눈치만 살폈다. 카지노 게임이 담배를 꺼내자, 명주도 꺼냈다. 둘은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저번에 말을 좀 심하게 한 것 미안해.”


카지노 게임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는 듯이 오른손을 명주 쪽으로 내민 것이다. 왼손으로는 담배를 피우면서 오른손을 명주 쪽이었다. 팀장의 코에서 연기가 직선으로 뿜어져 나왔다. 명주가 그 손을 잡았다. 카지노 게임의 손바닥에서 부드러운 손바닥의 따스함이 느껴졌다.


“아닙니다. 팀장님, 제가 저번에 실수를 해서 죄송합니다.”


명주가 왼손 담배를 등 뒤로 돌리고 고개를 숙였다. 카지노 게임은 자신보다 키가 큰 명주가 쩔쩔매는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왜 덩치 큰 인간들은 하나같이 속 텅 비어 있는 것인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들의 속에는 거대한 에어가스가 차서 저렇게 가벼운지도 몰랐다. 카지노 게임은 명주에게 어쩌면 자신이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고 생각했다.


“명주 씨, 결혼 언제 했지?”


“저 3년 전에 결혼했습니다.”


명주는 팀장이 자신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에 살짝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한 번도 그에게 이런 사적인 질문조차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늘 업무에 대해서 얘기하고 업무로 혼나기만 했었다.


“입사하기 전에 했구나, 아이는?”


“세 살 배기가 하나 있습니다. 장모님께서 키워주고 계십니다.”


정혁은 그제야 어떻게 아직 아이가 어린 보미가 사회생활을 잘할 수가 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이제 그의 본론을 말할 때가 되었다. 조금 더 진심을 말할 적당 때 말이다. 바로 눈앞에서 보미의 남편을 보고 있자니, 묘한 감정이 그를 휩쓸었다. 그건 미안함과 회한 등등의 것이지만 그것도 다 지난 과거의 일이 아니던가. 그가 먼저 보미를 만났고, 그건 다 과거의 일이었다. 과거 여자친구의 남편이라. 참 묘한 인연이었다.


“앞으로 명주 씨는 잘하는 일에만 집중해. 잘하면 내가 좋은 자리로 보내줄게. 나중에 내가 더 승진하면 혹시 알아 또 내 자리에 앉게 될지.”


그리곤 자리로 돌아가다가 다시 카지노 게임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9시까지 정시 출근해. 그간 고생 많았어. 내가 군기 좀 잡은 거니 그렇게 이해하고.”


명주는 갑자기 180도 바뀐 팀장의 태도에 놀랐다. 마치 자신이 회사를 그만두려고 하는 것을 알고 어디선가 천사라도 보내준 것 같았다. 이렇게 좋은 분위기라면 회사를 그만 둘 이유가 없었다. 실적 압박을 주는 것도 아니고 주어진 일만 성실하게 처리하면 정년도 문제없는 회사가 아니던가. 근무하는 내내 그의 입가에서 웃음이 실실 배어 나왔다. 시간이 5시가 넘어서자 팀장이 책상에서 일어났다.


“난 거래처에서 약속이 있어서 좀 일찍 나가니까, 봐서 퇴근시간되면 다들 적당히 퇴근해요.”


팀장이 가고 난 뒤에 명주는 2년 만에 해가 아직 짱짱 히 떠 있는 시간에 퇴근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 밝고 환하고 거리의 사람들은 활기차 보일 수가 없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은 것도 아닌데 어디선가 아름다운 선율의 그 마음을 헤집고 울려 퍼지는 듯했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자, 간간히 붕어빵을 파는 포장마차들도 눈에 들어왔다. 학습지 영업을 하는 작은 천막과 산양유 구독을 유도하는 간이 테이블도 보였다. 그전에는 전혀 못 보던 것들이었다.


명주는 맛있어 보이는 샛노랑 김이 올라오는 찐 옥수수를 술빵과 같이 샀다.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 중 하나였다. 집에 도착해 보니, 장모님께서 아이와 같이 건넛방 침대에 사이좋게 자고 있었다. 저녁 7시인데 벌써 자다니.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을 먹고 비워진 접시들을 설거지 했다.


아직 아내는 퇴근하기 전이었다. 달력을 보니 마침 일주일에 이틀 야근 하는 중에 하루였다. 저녁 10시가 넘어서 아내가 퇴근해서는 식탁 위에 놓인 찐 옥수수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카지노 게임는 속옷차림으로 침대맡에 와서 걸터앉았다. 머리에는 아이보리색 주름띠를 이마 위로 끝까지 올려서 머리카락이 절대 머리띠 아래로 한 올도 내려오지 못하게 고정하고 이마 끝까지 영양크림을 잔뜩 발라 얼굴 전체가 희번덕하게 번들거렸다.

“오늘 회사는 어땠어요?”


그녀가 최대한 입을 크게 벌리지 않으려고 얘 쓰면서 마치 복화술사처럼 말했다.


“할 말은 많지만 거두절미하고 나 회사 계속 다닐게. 고마워. 모든 것이 당신 덕분이야.”


명주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채로 만면에 미소를 띠고, 가부키 분장을 한 것 같은 아내를 올려다보았다. 팀장이 자신에게 갑자기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 것이 썩 싫지는 않았다. 팀장에게 무슨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은 데 그게 어떤 종류의 일인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앞으로 더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런 남편의 변화를 아내 보미가 흐뭇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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