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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보 Jan 15. 2025

무모하게 뛰어든 유학길, 죽음의 공포

1년간의 대만 생활을 마무리하고, 일본 유학 준비를 위해 일단 한국으로 왔다. 일본이나 일본어에 특별한 관심이 있어서 도쿄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예전에 일본어를 공부했었기에 일본에 가면 어떻게 생활을 하면서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1년 만에 외국 생활을 청산해 돌아온 나를 보고, 어머니는 착하다 하며 기뻐하셨다. 그리고 물 밑에서 은밀히 나의 맞선 상대를 섭외하셨다. 맞선일 하루 전에 어머니는 통보식으로 내게 알렸다. 상대는 서울에서 직장 다니는 같은 고향 사람이고 그 사람과 결혼하면 서울에 가서 산다는 것. 가톨릭 신자의 집안으로 그 부모님과절실한 가톨릭 신자인 숙모와 잘 아는 사이라는 것.내일 오니까 어데 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제주인들은 타지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지니고 있어서, 속내 아는 고향 사람을 선호했다.


나는 어머니가 잠든 사이 몰래 집을 나와 혼자 사는 친구 집으로 피신했다. 다음날친구 집으로전화가 걸려왔다.


"경보, 거기 있니?" 친구의 언니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아니, 왜?"

"경보 찾아야 하는데, 있을 만한 곳 말해줄래?"

"무슨 일인데?"

"오늘 경보 만나러 서울에서 비행기 타고 온 사람이 있는데, 주인공이 행방불명되어 버려서"

"근데, 비행기 타고 온 사람은 누군데?"
"니 형부 친구야. "

"글쎄, 경보 어데 있을까? 경보한테 연락 오면 언니에게 바로 전화할게."라고 친구는 거짓말을 해주었다.


맞선 볼 상대는 내 친구 형부의친구라는 걸 전화를 통해 알았다.




대만에서 실연당한 것도, 딸이 어떤 결심하고 한국에 왔는지 알 턱이 없는 어머니는 맞선을 펑크 낸 것에 단단히 뿔이 나셨다. 결혼 년기라 생각하는 딸내미가 또 이번엔 카지노 게임 가겠다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어머니는 동네 소문이 자자해서 밖에 나갈 수도 없다며 모녀의 관계를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결핍이 주는 힘은 실로 막강하다. 지금 돌아보면 아찔하기만 하다.

내 수중에 돈도 없었고, 어떤 대책도 없었다. 일상회화의 일본어 구사 능력 하나로 몸으로 부딪히며 유학하겠다는 각오였다. 직장 다니며 모아두었던 돈은 대만에서 1년간의 어학연수로 모두 소진된 상태였다.

실로 "잃을 없는 자는 두려움이 없다"라는 말, 그대로였다.




25살 12월에 나는 일본 도쿄에 갔다.

도쿄는무모하게건너간 나를 혼 좀 나 보라는 식이었다.도착해서 얼마 후 어마무시한 사건들이 이어 터졌다.


도착해서 1달 후인 1995년 1월 17일, 일본 효고현 고베시를 강타한 7.3 규모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모두가 자고 있는 새벽 시간에 발생해서 인명 피해가 어마어마했다. 연일 TV를 통해 사망자, 행방불명자의 수가 갱신되고, 붕괴된 건물이며, 건물 밑에 깔린 사람들을 구제하는 모습들이 하루종일 텔레비전 모니터를 통해 비쳤다.보도되는 뉴스 내용을 잘알아들을 수 없지만 영상과 숫자만으로 상황 파악하는 데 충분했다.


도쿄에 저런 대지진이 안 일어난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대지진이 발생하고 붕괴된 건물 밑에 갈려도 나를 찾으러 올사람은 여기에 한 명도 없는데...

여기에서 일어나면 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목숨이었다.




그 대지진의 불안과 공포가 다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내가 사는 도쿄에서 대사건이 발생했다. 대지진이 발생하고 2달 후인 1995년 3월 20일, 옴진리교(オウム真理教)라는 종교 단체가 도쿄 지하철에서 사린 가스를 사용한 테러를 일으켰다. 내가 매일 이용하는 지하철역에서 발생한 것이다. 불특정 다수를 노린 테러다.

사건 그날도 나는 그 지하철역을 타고 학교에 오갔다. 이용 시간이 살짝 빚 나가서 피해를 모면할 수 있었지만, 언제 내가 피해자의 한 명이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 사건이 터진 그다음 날, 사건이 발생한 지하철 노선에는 어제와 똑같이 이용자는 미여터질 정도로 많았다. 오늘도 테러가 발생하면 이 모든 사람들이 피해자가 되겠구나 하며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는 긴장의 모습이 역력했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고는, 아 무사히 집에 왔구나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테러로 수천 명이 부상을 입었고, 많은 사람들이 가스 중독으로 고통을 받았다. 사망자도 나왔다.


일본에 간 지 몇 달 사이, 발생한 이 어마어마한 사건들 속에서 코앞의 죽음을 목격했다.

내가 죽으러 비행기 타고 이곳 일본까지 왔어야 했나?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불안과 카지노 게임 속 나는 일본어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일본어는 전부터 해왔던 공부였지만, 중국어 공부를 하면서 거의 중단해 있었다. 일본어 공부를 하면서 대입 준비를해야 했다. 일본어학교는 반나절만 수업이 있어서 방과 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주말에는 거의 하루종일 일했다.


아르바이트는 ‘오코노미야끼(お好み焼き)’ 가게에서 홀 서비스와 주방일을 했다.

‘오코노미야끼’는 야채, 고기, 해산물 등의 재료를 밀가루 반죽에 섞어서 철판 위에서 굽고 일본 특유의 새콤달콤한 소스를 뿌려 먹는 부침개라고 할 수 있다. 모자가 경영하는 가게로, 여 사장님은 한국 2세 교포인 60대로 나를 많이 아껴주셨다. 주말에는 하루 종일 일하고 평일에는 4-5시간 정도 일했다.

‘오코노미야끼’ 가게에는 양배추를 대량으로 사용하는데 그것을 칼로 채 썰어야 했다. 손님들이 많은 주말에는하루 종일 양배추를 썰고 나면 그다음 날에는 손의 감각이 둔해진다. 손과 손가락의 감각이 둔해지면 글을 써도 무슨 글을 쓰는지 알지 못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허약 체칠인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코피로 베개가 흥건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 사실을 안 여사장님은 내게 건강식품을 챙겨주시곤 했다.

방과 후 아르바이트 시간 전까지 가게 근처 커피숍에서 공부하는 걸 아시고는, 커피값을 아끼라며 가게에서 파는 우롱차 한 잔을 내주시고 가게 안쪽 테이블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주말에는 일하기 30전 가게 근처 커피숍에서 만나 아침을 사주시며 격려해 주시곤 했다.

아르바이트 시급도 일본인 직원들보다 더 챙겨주셨는데, 일 잘한다는 이유로 그렇게 해주셨지만, 사실 나를 돕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외국에 와서 일하며 공부하는 내 모습이 사장님 눈에는 기특하게 보였을 것이다.





대입 준비는 혼자서 준비해야 했다.

외국인의 입시 과목은 학교마다 다르며, 내가 들어가고 싶은 국립대는 일본어, 일본어 논술, 일본 역사, 외국어였다. 일본어와 일본어 논술은 일본어학교에서 배울 수 있지만, 역사는 독학으로 공부해야 했다. 중학교 역사 참고서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원래 역사 과목을 싫어한 데다, 일본어로 일본 역사를 공부해야 해서 힘들었다. 난생처음 역사 공부를 열심히 공부한 셈이다. 외국어는 중국어를 선택했는데, 대만에서 번자체로 배웠던 중국어를 간자체로 익히면서 독학했다.


그렇게 삶을 뒤흔들릴 정도의 카지노 게임와 불안 속 1년간은 혼신을 다해 공부하고 돈을 벌고 모았다.


[배경 사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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