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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보 Feb 17. 2025

박사논문 제출하고 우울했다

그해 도쿄의 겨울은 유난히 춥게 느껴졌다.

박사 카지노 게임 추천 제출 한 달을 앞둔 2월달, 우리 아기는7일밖에 보육원에 보내지 못했다.




일본의 보육원은 아침에 아이를 데리고 가면 입구에서 체온기를 든 간호가가 기다리고 있다. 체온을 재고 기준치를 넘으면 열이 있다고 판단되어 그날은 맡기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아침 시간에 보육원에서 마주치는 워킹맘들은 유독 긴장한 얼굴들이 많았다.


감기에 걸려 집에서 2,3일간 보살펴 겨우 낫게 하고보육원에 보내면 하루가 멀다고 또 감기에 걸려 왔다. 그걸 한 달간 반복하더니, 겨우 7일밖에 보육원에 가질 못했다.

"엄마가 바쁘면 아기가 자주 병에 걸린다"는 어르신들의 말은 옳았다.

2월 한 달은 낮에도 아기를 직접 돌보는 시간이 많다 보니, 나의 수면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고, 팔, 어깨 상태는 한층 나빠졌다.




2월 중순이 되자, 논문이 초안이 완성되고, 그걸지도 교수님께 먼저 우편으로 보내고, 1주일 후에 최종적으로교수님의 지도를 받으러 연구실을 찾아갔다. 늘 그랬듯이, 교수님께서는 논문을 꼼꼼히 읽으셨고, 코멘트를 해 주시는데,나는볼펜을 잡고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보시고 아무 말 없이구두로 코멘트하시며 직접 메모해 주셨다. 메모해 주신 코멘트를 집에 가져와서 타이프 치며 최종적으로 다듬어갔다.




3월 초, 3월4일로 기억하는데, 그날 아침박사 논문을 제출하려고논문을 가방에 집어 놓았다. 7편이나 되니 가방이 꽤나 무거웠다. 조심히 어깨에 메고 역으로 향했다.
출근 시간은 지나 있어서 전차 안은 한적했다. 어깨에 멘 가방을누군가에게 부탁해서 내려놓으려 하다가다시 어깨에 멜 때 아플 생각을 하니, 멘 채로 가기로 했다.

교무과에 도착하고 직원에게 학위논문 제출하러 왔다고 하니, 붕대를 감은 내 팔을 보고 바로 일어서서 가방 안에서 논문을 꺼내 주었다.




드디어 나는 박사 과정 3년 차에 학위논문을 제출했다. 앞으로 논문 심사, 구두 심사를 받으면 된다. 당시 우리 제미에서는 수년간 내가 가장 빠른 시간 내에학위 카지노 게임 추천을 제출한 사람이 되었다.물론 속도는 심사 기준에 전혀 도움이안 된다.


논문 제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 해냈다!" 성취감으로 환희에 찬 기분이어야 하는데 그런 기분을 느낄 에너지가 없었던 것 같다.

낮 시간이라 전철 안은 비어 있었고, 나는 의자에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몸의 힘이 싸악풀리면서 상반신이 완전히 쓰러져 누운 상태가 되어 버렸다.


보통 야간에 술 취한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 옆에 앉아 있던 일본 사람이 자꾸 일본어로 ‘괜찮으세요?’라고 물어오더니, 어깨를 흔들기까지 했다. 그녀에게 괜찮다고 대답하고 싶지만, 입을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논문을 제출한 후, 나는 처음으로 내 몸이 어느 정도 망가져 있는지를 제대로 직시하게 되었다. 통증을잊고 지낸 날은 없었지만, 내 몸을 온전히 바라볼 겨를도 없이 1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카지노 게임 추천 제출했다는 성취감 보다 내 몸인데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는 육체를 보며, 한 동안우울했다.

상반신의 오른쪽이 전부 염증으로 뒤덮기라도 한 듯약간만 움직여도통증이 극치를 달했다.




육아를 병행하며 3년 차에제출카지노 게임 추천는 소식은 선후배들사이에 곧 퍼져 나갔고, 그들의 반응도다양했다.

'해 냈구나!"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독하게 해냈지!" 하며 거리를 두는 이.

"학위가 그렇게 절실했나요?" 한심하다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말하는.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할 수 있나요?" 의아해하며 묻는 이.

......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남자 후배는 내게 말했다.

"선배 때문에 우리 앞으로 논문 쓰지 못할 그 어떤 이유도 핑계가 되어 버렸어요."

"선배는 슈퍼우맨이에요."




나도 스스로 물어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지?"

"내가 뭘 위해 여기까지 해왔지?"




나는 박사학위가 탐이 나서 공부한 것도 아니고, 대학 교수나 어떤 근사한 직책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박사 과정에 진학한 것도 아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 그렇게 꿈에 그리던 공부를 나의 한계치까지 하는 게 나의 꿈이었고 목표였다.


대만 사람과 결혼한 후 대만 생활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설령 학위가 있더라도 대만에서 전임 교수 자리를 찾기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대만의 일문학과에서 일본어학 전공자를 한국인으로 채용해야 할 필연성을 나 스스로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학위를 따든 못 따든 나는 시간강사 일을 할 거라생각해 왔다.


그렇다면, 나는 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


나를 믿어주고 끝까지 격려해 준 교수님께 보답하고픈 마음, 끝까지 해내겠다는 의지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육체적인 통증에 항복했을 거라 생각한다.

육체적인 한계를 넘고, 그 통증을 잊게 해 준 것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건 바로'몰입'이었다.


어깨부터 손까지 붕대로 칭칭 감은팔을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놓을 때는 무지 아팠다. 그런모습을 남편에게 들키지 않도록 애써야 했고.키보드를 좀 세게라도 치면 그 울림이 손, 팔을 타며 통증을 동반했다.


그럼에도, 컴퓨터 앞에 새벽 서너 시까지 논문을 집필할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몰입'이었다. 계속 통증을 느꼈더라면 난들 어떻게 버틸 수 있으랴? 연구 삼매에 빠져들면 통증을 잊을 수 있었기에쓸 수 있었고,브레이크 거는 걸 잊고 했던 것이다.




박사 논문 집필하면서 써놓은 노트가 한 권도 없다. 오히려 석사 논문 때 필기해 둔 노트가 여러 권 있을 뿐이다.

펜을 잡아 글을 쓸 수 없었기에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아이디어, 영감들을 메모해 붙잡아 둘수 없었다. (지금이라면 핸드폰으로 바로 음성 녹음하면 되겠지만...)

키보드를 맘껏 두드릴 수도 없었기에피어오르는 생각들을 그때그때 마음껏 타이프해서 기록할 수도 없었다.

그런 상황이 나를 한층 더 집중하게 한 듯하다. 내 생각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머릿속에서 붙잡아 두었다가 그걸 타이프하며 표출하곤 했다. 몸의 고장으로 생각이 글로 옮겨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아주훗날 몰입에도 테크닉이 필요하다는 알았다. 그때그걸 알았으면 몸을 그렇게 망가지게까지 쓰지 않았을 텐데...



[배경 사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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