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절정이라 하는 20대 중반에 도쿄에 건너가, 일본어 학교에서의 어학연수를 거쳐 대학, 석사, 박사 과정 총 11년을 그곳에서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카지노 게임 이성적으로 따지면 따질수록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진 데에는 많은도움의 손길이 있어서였다.
이 연재 글을 쓰면서 지난날의 그 시공간으로되돌아가보니, 고마운 이들의 얼굴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잊어서는 안 되는데, 그중에는 잊고 지내온 얼굴들도 있었다.
일본어가 서툴어 손님 안내도 만족스럽게 못했을 터인데 일을 잘한다며 월급을 더 챙겨 주셨고, 자투리 시간에 커피숍에서 공부하는 내게 커피값 아끼라며 식당 한쪽 테이블을 건네주시던 첫 아르바이트 가게 사장님의 존재는 막 무일푼으로 건너간 내게 도쿄에서의 도전에 용기를 불어주었다.
대학에 진학 후 학교 근처에서 찾은 편의점 알바.
식비를 아끼라며 도시락, 우유를 집에 가져가게 해 주셨던 편의점 사장님. 말수가 없고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는 40대 아저씨였지만, 충분히 그분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유학생의 고충을 이해하는 건 역시 같은 입장의 유학생이었다. 학업, 생활고의 스트레스를 나누며 서로 격려하던 선후배들이 곁에 있어서 푸념을 늘어놓으며 살수 있었다. 아직도 연락이 오가는여동생 같은 같은 고향 후배와 친언니보다 더 친언니 같은 선배 언니, 이들은유학 여정에서의 동지였다.
공부의 즐거움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 주었던 강의. 문법 탐구의 맛을 던지시 보여주셨던 대학 1학년 때의 K교수님.K교수님의 강의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그 강의 덕분에 연구 방향을 결정하는 데 큰 흔들림 없이 굿굿이 걸어나아갈 수 있었다.
유학 시절 가장 감사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지도 교수님이시다.
학생들이 자신의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믿어주신 분.
지도 교수님의 인정과 믿음은 그 어떤 고난에도 헤쳐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
사비 유학생인 내가빈 손으로 건너가,카지노 게임에서도 물가가 가장 높다는 도쿄에서 유학을 하며,아들을낳아 만 1세까지 키울 수 있게 해 준 것은일본의 복지 제도 덕분이었다.
일본의 국립대학은 사립대학 수업료의 약 1/2 정도였으며, 당시 국립대에 입학한 유학생들은 수업료 면제를 받았다. 게다가 개개인의 장학금 금액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장학금으로 도쿄에서 월세 방을 얻을 수 있었고, 생활비는 아르바이트로 충당하면 되었다. 석사, 박사 과정에 올라갈수록 장학금 금액도 높아졌고, 마지막 해에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논문 집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출산과 육아에 있어서도 당시 일본의 복지 제도는 훌륭했다. 부부가 유학생인 우리는 수입이 없었기에 병원 출산비는 무료였고, 육아 장려비로 약 350,000엔을 받았다. 특히 놀라웠던 것은 보육원비였다. 시립 및 공립 보육원비는 부모의 수입에 따라 달라지며, 무수입자인 우리는 무료였다.
이렇게 훌륭한 복지 제도 덕분에 나는 사비 유학생으로서 11년간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학위를 취득하며 출산과 육아까지 해낼 수 있었다.
내게 있어서 일본은 젊은 날의 내 꿈을 온전히 불태울 수 있게 해 준 나라이며, 삶의 길에 정답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함을 깨닫게 해 준 나라, 남에 대한 배려를 그 무엇보다 소중히 해야 함을 가르쳐 준 나라이다.
내 기억 메모리의 용량이 아주 제한적이라 도움의 손길들을 다 기억해 낼 수 없어 죄송하지만 감사함을 잊지 않고 살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