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를 하지 않고 연구만 할 수 있다는 건 내 유학 생활에서 처음이며, 호사를 누리는 생활이다. 그건 1년간 기숙사에 살 수 있고 1년 전부터 받는 로터리클럽 장학금(월 150,000엔)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 학위논문을 3년 차에 제출하지 못하고 박사과정 4년째 돌입한다면, 받을 수 있는 장학금도 없거니와 1년밖에 살 수 없는 기숙사에서도 나가야 한다. 육아를 하며 알바를 얼마나 해야 생활비며 방값을 충당할지 계산을 해보니, 이 1년간 몰입하여 쓰는 게 답이었다.
다행히도, 연구 주제는 석사 학위 논문의 후속 연구이기에 어렵지 않게 몰입할 수 있었다.
아기는 태어나서 5개월쯤부터 보육원에 보냈다. 추첨으로 결정되는 시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 당첨된 것이다. 이 보육원은 우리 부부처럼 수입이 없는 경우 보육원비가 무료이다. 당첨되던 날, 우리는 환호를 질렀다. 보육원비 걱정 없이 아기를 키울 수 있게 되었다.
보육원은 아침 8시 30분부터 저녁 5시까지 운영되며,아기는 보육원 생활에도 탈없이 적응해 주며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주었다. 당시 아기는 아무리 먹어도 배 부르다는 느낌이 없었던 건지 식탐이 대단했다. 출산해서 2개월쯤 되었을 때, 대만에서 시어머니가 오시고는 아기를 보고 많이 놀라운 표정을 지으셨다. 우리는 매일 보니까 그리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처음 보시는 시어머니는너무 살쪘다며 걱정까지 할 정도였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농사일을 도울 때, 완력이 없어 무거운 걸 들을 때마다 낑낑대는 나를 보고 부모님이 나무랐던 적이 있다.
그 완력이 육아에서도 엄청 필요했다. 점점 무거워져 가는아들의 체중이 내 손목으로 감당할 수 있는 중량을 능가해 버린 걸까? 손목의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마 "손목터널증후군"이라 불릴 병명이 아닐까 싶다.
손목이 아프다고 아기를 안 안을 수도 없으며, 아기에게 줄 음식을 만들기 위해 칼질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기가 점점 무거워짐에 따라 손목의 통증도 날로 심해져 갔다.
처음에는 아기를 안을 때 아프던 손목이 아기 옷을 갈아입혀주는 것, 물건을 들어 올리는 것들이 힘들어졌다. 작은 손의 놀림도 어려워졌다.옷 단추를 메는 것, 젓가락질, 볼펜을 잡고 글을 쓰는 것들이 그랬다.
도쿄의 전차는 출퇴근 시간에 늘 사람으로 미여 터질 정도였으며,사람들이 살짝 내 어깨를 스치기만 해도 비명이 절로 나왔다.
통증이 심하자 병원에 가서 전기 치료를 받곤 했다. 받을 때는 좀 괜찮은 것 같은데, 하루가 지나면 통증이 또 찾아왔다. 하루는 누군가의 소개로 침을 맞으러 갔다. 앞이 안 보이는 50대의 남자분이었다.
어릴 적에 집에 있던 약을 갖고 놀다 눈에 들어가 앞을 전혀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하시던 그분은 굳고 살이 없는내 팔, 어깨에다 기다란 침을 놓으며, 말했다.
"몸을 혹사시킨 결과예요. 대가를 치러야죠."
병원에서도 침을 놓는 곳에서도 손을 쓰지 말고 쉬어야 하며, 수면 시간이 무척 중요하다고 했다. 그들의 지시대로라면 나는 육아에서도 연구에서도 손을 떼어야 했다. 나는 어깨부터 손까지 붕대를 감아 손, 어깨의 움직임을 되도록 줄이려 했다.
우리 집은 밤 9시가 되면 불을 끄고 아기를 재웠다. 아기가 자고 나면 일어나 본격적으로 내 일이 시작된다. 붕대를 감은 팔을 책상 위에 올려 천천히 키보드를 치며 논문을 써 내려갔다.
자다가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려고 깨어난 남편은 그런 나의모습을 보고 혀를 차고, 화를 내고, 때로는 욕설까지 퍼붓기도 했다. 생명을 갉아먹으면서 꼭 그렇게 해야겠냐는 것이다.
논문 집필에 아직 들어가지 않은 남편이 좀 더 나를 도와 육아를 최대한 해주지 않는 게 야속하기만 했다.
나는 새벽 3-4시쯤에야 잠자리에 드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아침 5시쯤이 되면 아기는 배고파 울어대었다. 남편은 우는 아이를 안고, 나는 우유를 타러 가는데 플라스틱 빈 우유병을 들 수 없어 나도 모르게 ‘아’ 소리가 나왔다.
특히 아침에 눈을 뜨면 팔이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내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이다. 자는 동안 팔이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아 아침에 첫 움직임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아예팔을잘라내어 버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