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
1960년대 단양에는 지금처럼 시장이라고 할만한 그럴듯한 공간은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 하나둘씩 장사를 시작하다가 생긴 난전에서 물건을 파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제일 큰 가게인 대풍상회에 다니고 있었지만 결혼후에는 대풍상회에서 나왔다. 그리고 대풍상회에서 일하면서 배운 걸 토대로 자기 장사를 시작했다.
팔던 물건은 대풍상회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비누, 세제, 설탕, 양잿물, 간수, 소다, 사카린, 미원 같은 것들이었다. 옛날에 간수는 두부 만드는 데에 쓰고 소다는 소화제 대용으로 쓰던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싸고 좋은 물건을 사기 위해 서울의 방산시장까지 가서 물건을 떼왔다.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물건을 사고 그걸 서울역에서 단양역까지 화물로 부쳤다. 도매로 떼온 물건들은 집에서 온 식구들이 달라붙어 소포장을 카지노 가입 쿠폰. 아홉 식구가 한 집에서 살아 그런 건 편카지노 가입 쿠폰. 사람이 많으면 밥값도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런 장점도 있는 법이었다. 저녁을 먹고나면 어른이고 아이고 할 거 없이 제각각 일을 맡아 다음 날 팔 물건들을 소분하고 포장카지노 가입 쿠폰.
한명은 물건을 해체하고 다른 한명은 소분을 하고.. 어린아이들도 장사물건 포장하는 일을 도왔다. 어쨌든 집안 식구들 손을 빌리는 건 공짜였으니까.
그렇게 여러사람이 노력을 들이니 물건도 싸고 품질도 좋았다.
비누는 다섯장씩 묶어서 포장카지노 가입 쿠폰. 대부분의 손님들이 비누를 다섯장씩 달라고 하기 때문에 미리 포장해두면 빨리빨리 팔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팔던 물건 중에서는 양잿물도 있었다. 지금은 양잿물을 팔면 안되지만, 그때는 양잿물을 갖다 팔면 돈이 됐다. 옥시크린처럼 빨래 할 때 넣고 빨래를 하면 때가 잘 빠졌다. 양잿물은 도매에서 사올 때 드럼통으로 사와야했기 때문에, 소분이 필수였다.
양잿물은 고체였는데, 정으로 드럼통 가장자리부터 쳐서 깬 다음 그 안의 양잿물을 소분카지노 가입 쿠폰. 어지간한 고생이 아니라서, 온가족이 달라붙어 그 포장을 도와야 카지노 가입 쿠폰. 하루는 그 양잿물이 할머니 눈에 튀어 수돗가로 뛰쳐나가서 씻고 난리가 난 적도 있었다.
당시의 시장은 지금의 시장처럼 상설장이 아니라 5일장이었다. 단양은 6일장, 가곡은 5일장이었다. 가곡장은 더 작았다. 가곡장은 할아버지 혼자 가서 팔았고, 단양장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같이 나가서 장사를 했다.
장날이 되면 팔 물건들을 챙겨 난전이 열리는 길로 나갔다. 비가 와도 계속 장사를 할 수 있게 포장을 쳐놓고 장사를 했다. 지금처럼 비닐 천막이 있는 게 아니라 직접 그 천막을 만들어야 했다. 할머니는 광목천을 떼다가 재봉틀로 박아서 천막을 만들었다. 그 천막에는 파라핀 초를 먹여서 비가 새지 않게 했다.
80년 정도까지는 가게도 없이 그렇게 난전에서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카지노 가입 쿠폰.
외증조할머니는 장남인 할아버지에게만 일을 시킬 수 없어 본인도 나가 장사를 했다. 외증조할머니는 장남 아래 아들들에게 교육을 더 시키기 위해 본인이 나가 돈을 벌었다. 장남은 초등학교 졸업으로 학업을 그만두었지만, 그 아래 동생들은 학교에 더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외증조할머니는 장날마다 장에서 떡장사를 했다. 집에서 직접 시루에 떡을 쪄서 그걸 팔았다. 마구설기와 백설기, 절편, 바람떡, 인절미 등등을 했다. 그 외에 도토리묵도 팔고, 잔치국수도 팔았다.
외증조할머니는 장이 열리기 전전날 쌀을 물에 불렸다. 불리는 데에는 하룻밤이 꼬박 걸렸다. 쌀을 불린 후에는 체반에 밭쳐두었다가 소금과 당원을 넣어 간을 했다. 이때는 설탕이 비싸서 대신 당원을 넣었다.
간을 한 후에는 방앗간에 그 쌀을 가져가 빻았다. 빻은 쌀가루에는 콩과 건대추 불린 것, 견과 등을 마구마구 넣어 섞었다. 그래서 이 떡의 이름이 마구설기다. 그걸 새벽 시간에 큰 떡시루에 넣고 찌기 시작한다.
떡시루에 찔 때는 큰 솥에 물 붓고 그위에 떡 시루를 올렸다. 물에 적신 면포를 시루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설기 반죽을 가득 부었다. 그리고 뚜껑을 닫았다.
솥과 시루 사이에는 밀가루 반죽을 붙여 떡을 찌는 동안 수증기가 빠지지 않게 카지노 가입 쿠폰. 그리고 솥아래에는 땔감을 놓고 불을 땠다. 솥에 부은 물이 끓으면 수증기가 촥 올라와 그 위에 시루에 담긴 떡반죽이 익는 원리였다.
떡이 완전히 쪄질 때쯤엔 젓가락으로 한번 콕 쑤셨다. 쌀가루가 묻어나오면 덜 익은 거고 젓가락이 깨끗하면 완전히 익은 것이었다. 떡이 다 익으면 시루를 솥에서 떼어내 큰 다라이에 뒤집어놓았다. 그럼 잘 쪄진 떡이 하얀 김을 펄펄 뿜어내며 다라이로 툭 떨어졌다. 면포도 떡에 붙어서 같이 떨어지는데, 그러면 찬물을 손에 적셔 떡에 붙어있는 뜨거운 면포에 묻혔다. 그럼 면포가 쉽게 떨어진다.
장날이 되면 그걸 잘라서 팔았다.
밥알 인절미도 만들어 팔았다. 인절미의 경우, 찹쌀을 장 열리기 전날에 하루저녁 동안 불린다. 그걸 시루에 넣고 소금물을 조금 끼얹고 마구설기처럼 푹 쪘다.
찹쌀이 다 쪄지면 그걸 꺼내 절구에 쏟았다. 그리고 한 명은 절구에 찹쌀을 찧고 다른 한 명은 반죽에 절구 가에 붙지 않게 찬 물을 계속 발랐다. 인절미는 혼자서 만들 수 없는 음식이었다. 그렇게 찧다보면 쌀알이 식감이 무들무들하게 남은 밥알 인절미가 된다.
인절미에 묻힐 콩가루는 따로 노란색 콩, 백태를 준비해 방앗간에 가서 볶아서 빻아온다. 그리고 하얀 콩, 동부 콩은 불려서 껍데기를 벗긴다. 그리고 소금과 당원을 조금 넣고 절구에 빻는다. 그렇게 두 종류의 콩가루를 준비해 인절미에 잔뜩 바른다.
한 명은 물을 묻힌 칼로 숭덩숭덩 인절미를 자르고, 다른 한 명은 옆에서 콩가루를 바른다. 그걸 큰 통에 담아 그대로 장에 들고 갔다. 따로 비닐이나 포장용기가 없던 시절이었다.
집에 있던 찹쌀시루는 크기가 아주 컸다. 3되짜리였다. 이 지역의 됫박은 청주와 크기가 달랐다. 여기 됫박은 닷 되가 한 말(20리터), 단양 근처 다른 도시인 청주의 됫박은 열 되가 한 말이었다. 됫박의 크기는 지역마다 다 달랐다. 서울도 한 됫박이 작았다. 충청도 북부지방이 유독 됫박이 컸다.
그렇게 보면 우리집의 찹쌀 시루는 약 12리터 정도 되는 크기인것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는 우리집 떡시루가 엄청 크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아직도 이 시루는 버리지 않고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 할아버지의 보물들 중 하나이다. 이제는 아무도 떡을 쪄먹지 않지만, 그 시루는 아직도 할아버지 집 창고 한 켠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
외증조할머니는 도토리묵도 만들어 팔았다. 산에 널린 도토리를 주워와 도토리 물을 직접 빼고 묵을 만들었다. 도토리는 그냥 먹으면 떫은 맛이 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독을 빼는 과정이 따로 필요했다.
도토리는 산에서 주워와 방앗간에 가서 빻앗다. 방앗간에는 도토리만 빻는 기계가 따로 있었다. 도토리 자체의 쓴 맛 때문에 다른 곡물을 거기에서 또 빻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토리를 빻아달라고 하면 방앗간에서 다른 곡물과는 달리 조금 성기게, 덜 곱게 빻아주었다. 그럼 그걸 시루 바닥에 면포를 깔고 시루 안에 부었다. 그리고 그 위로 물을 붓는다. 콩나물에 물 주듯 계속 계속 며칠간 물을 부었다. 그럼 아래에 시루 구멍에서 시커먼 물이 빠진다. 최소 이틀 동안 그렇게 물을 주면서 도토리물을 뺐다. 실수로 그 물이 수돗가에 묻게 되면 오랫동안 그 얼룩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만큼 독카지노 가입 쿠폰.
그 후 다라이에 시앗자루를 놓고 자루 안에 푹 젖은 상태의 도토리 가루를 넣고 자루입구를 꽉 묶어 가루가 빠지지 않게 한다. 그 후 그 자루 째로 손으로 막 치대면 거기에서 녹말물이 면포 자루의 성긴 구멍 사이사이에서 빠져나온다.
녹말물을 뺀 후 그걸 가마솥에 넣고 끓인다. 팔팔 끓이면 녹말풀이 되는데, 나무주걱으로 계속 저으면서 끓인다. 그러다 어느정도 되었다 싶을 때 주걱을 들어 녹말물이 똑, 똑, 똑, 떨어진다. 그럼 불을 끄고 뚜껑을 덮고 뜸을 들인다.
도토리묵을 굳히는 판을 가져와 녹말물을 거기에 붓는다. 묵판째로 실온에서 식히면 말랑말랑한 도토리묵이 된다. 적당하게 한 모 사이즈로 잘라둔 다음, 장날에 나가서 그걸 팔았다. 외증조할머니는 국수용 멸치육수에 그 묵 썬 거를 말아 묵사발로 만들어 팔았다.
하루는 할머니가 자기 여서넛살된 둘째 아들이 도토리묵을 들고 어디론가 가는 걸 보았다. 아랫집 사는 지 친구 줄라고 가지고 내려가던 것이었는지 그랬다. 말캉거리는 묵을 양손으로 쥐고 덜렁덜렁 내려가고 있었다.
할머니는 아들이 시어머니가 장사용으로 며칠동안 정성껏 만들어둔 묵을 한 모 들고가는걸 보고 깜짝 놀랐다. 생전 소리를 안 지르던 할머니는 다급한 마음에 야!!! 소리를 질렀다. 묵을 훔쳐가던걸 들킨 둘째아들이 화들짝 놀라 목을 움츠리며 묵을 뒤로 휙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와다다다 집 아래 쪽으로 도망갔다.
할아버지 집에는 그외에도 오래된 시루들이 종류별로 다양하게 있었다. 할아버지 집에는 콩나물시루도 있었는데 그건 내가 몇년전에 당근카지노 가입 쿠폰. 도자기로 만들어진 좀 멀쩡하게 생긴 콩나물 시루였다. 구입가도 모르고 시세도 몰라서 그냥 3만원 쯤에 내놨는데 올리자마자 누군가가 허겁지겁 사갔다. 그 돈으로는 치킨을 사먹었다.
외증조할머니는 시골 장에 그렇게 음식들을 잔뜩 들고 나와 팔았다. 난전바닥에 엉성하게 만든 테이블을 깔아놓고 연탄불을 피웠다. 그리고 큰 양은 바께스를 그 위에 올리고 멸치 육수를 팔팔 끓여 국수도 삶아서 팔았다
추운 날 손님이 떡을 사먹으면 멸치 육수를 한 컵씩 주었다. 지금 분식집에서 어묵국물을 무료로 먹을 수 있는 것과 비슷카지노 가입 쿠폰.
돈은 그렇게 벌었지만, 먹고 사는 식량은 또 따로 조달카지노 가입 쿠폰. 남한강 강가에 있는 밭을 사서 작게 농사를 지었다. 거기에서 채소를 키워 그걸로 끼니를 카지노 가입 쿠폰. 돼지도 키웠다. 닭장 처럼 돼지우리를 직접 지어서 거기에 돼지를 키웠다. 할아버지는 돼지새끼를 처음 사와서 우리에 넣고 키울 때 기분이 아주 좋았다. 돼지는 돈이 되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집이 산비탈 바로 밑에 있는 꼭대기집이라 그 비탈에 돌담을 쌓아서 돼지우리를 지었다. 손수 만든 우리지만 슬레이트까지 올린 제대로 된 돼지우리였다. 지금은 양돈업이라 해서 양돈업자들이 신고를 하고 키우지만 그때 당시에는 닭 키우듯 돼지를 한두 마리씩 키우곤 했다.
사료는 비싸서 잘 못 먹이고 대부분은 짬밥을 먹여 키웠다. 할아버지는 요즘 먹는 돼지고기보다 그때 돼지고기가 더 맛있다고 카지노 가입 쿠폰. 사료 먹인 돼지보다 짬밥 막 먹여 키운 돼지가 더 맛있기 때문이라고 카지노 가입 쿠폰.
[사진출처]
중부매일, 이보환, 옛단양 명성 되찾자, 2016-09-10, https://www.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584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