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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OB Dec 28. 2024

카지노 쿠폰


한국에 돌아와 그간 찍어댔던 필름을 쏟아냈다. 109롤. 왜 돈을 모을 수 없었는지, 되려 모았던 돈까지 쓰고 온 건지 한 번에 납득되는 수량이었다. 그저 취미라고 하기엔 너무 큰 지출이 아닌가 싶다가도 역시 남는 건 사진이라 그렇게 찍고도 더 찍지 못해 아쉬웠다. 현상한 필름을 하나둘 넘겨보며 나는 시간을 거꾸로 걸었다. 그 길목에서 반가운 카지노 쿠폰들을 만나고 정겨운 이웃들을 만나고 그리운 장소들을 만나고 잊혔던 감정들을 만나고 나니, 새삼 내가 보고 있는 하늘이 어색해지고 새삼 내가 맡고 있는 공기가 낯 서러워졌다. 울렁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스크롤을 내리다가 멈칫. 손도 눈도 생각도 잠시 멈췄다. 울렁이던 가슴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좋은 친구였는데, 단둘이 여행을 떠날 정도로 분명 가까운 친구였는데, 분명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왜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을까. 사실 알고 있다. 그 친구는 나를 끝없이 의심했고, 나는 호흡 장애를 일으킬 정도로 그 의심을 어려워했다. 그때도 알고 있었지만, 그 친구는 나를 더 믿고 싶었기에 더 의심했다. 끝없이 의심했을 때도 내가 한결같기를, 그래서 나를 온전히 신뢰하기를 원했다. 처음에는 그 의심을 어떻게든 신뢰로 돌려주고자 했지만, 내 마음은 그 친구의 의심보다 크지 않았다. 알고 있었지만, 그때도 분명 그 마음을 다 알고 있었지만, 나는 결국 매몰차게 그 친구의 손을 놓았다.


망각은 정말 축복일까. 기억은 희미해지고, 아픔은 흐려지고, 감정은 탁해지는 와중에 카지노 쿠폰만이 버젓이 남아 새로운 기억과 감정과 추억을 재구성한다. 이 꼬여버린 기억과 카지노 쿠폰이 이전의 아픔을 오늘의 후회로 되돌려준다. 카지노 쿠폰에 상처가 남아 있지 않아 망각은 축복이지만, 카지노 쿠폰에 상처가 남아 있지 않아 이토록 죄스럽고 후회스러울 수 없다. 카지노 쿠폰이 새로 만들어 낸 찬란한 추억들이 너무 반짝여서 밉다. 나를 변호해 주지 않는 카지노 쿠폰이 나는 오늘 그토록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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