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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낭아 Jun 13. 2022

카지노 가입 쿠폰에게서 생과 사가 갈린 이들

채수

1482년 성종 13년 8월 대사헌 채수가 글로써 대죄(待罪)를 청하였다.

“폐비의 죄가 크지만, 벌이 너무 큽니다. 국모였던 이를 여염집에 살게 하는 것에 백성들이 슬퍼합니다. 경비가 없어 아무나 출입을 하는 상황이고, 의료를 제공해야 합니다.”

성종이 화를 내면서 ‘원자가 있어서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냐?’ 하며 ‘폐비에게 사약을 내리고 채수와 권경우를 국문하라’고 의정부에 명을 내렸다. 『성종실록』

성종이 윤씨를 폐하면서 한글로 그 죄상을 써서 중관과 승지를 시켜 윤씨의 집에 가 읽게 하여 반성하도록 했는데, 끝까지 뉘우치지 않아 사사했다. 후에 연산군이 폐비 당시 승지로 있던 신하들을 모두 죽였는데, 채수는 한글을 몰라 홀로 죽음을 면했다. 『패관잡기』

채수는 성종 때 홍문관 응교로 임사홍의 비행을 탄핵하고, 대사헌 때 폐비 윤씨를 돌보자고 건의하다가 파직되었다가 복직 되었다. 연산군 5년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갑자사화에 연루 되었는데, 폐비 윤씨를 돌보자고 건의한 일로 사형을 면하여 유배 되었다가 풀려났다. 중종반정에 동의하여 공신 4등이 되었지만, 조정에 벼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낙향하였다. 그의 사위가 김안로이다.

권경우

성종 8년에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역관 조숭손이 함부로 마포 2백 62필·수달피 15장·호피 47장·초피 5장을 구입해 오는 것을 적발하여 고발하였다. 이는 권신들에게서 부탁받은 물품들이었다.

그 권신들은 서거정·호산군 이현·신정(신숙주 아들)·한언 등이었는데 성종은 이들을 가두지 말고 조사하라고 명했다. 사헌부에서 잡아가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성종은 의금부의 추안을 기다려 처리하겠다며 미뤘다. 그러면서 성종은 권경우에게 네 계급을 올려 통선랑 행 사간원 정언으로 제수하였다.

후에 성종이 중전 윤씨를 폐서인 하여 사가로 내보내자 시독관이던 권경우는 “폐비의 죄가 커 폐서인 하는 것은 마땅하나 국모였던 분을 여염집에 살게 하는 것은 신하와 백성이 마음 아프게 여깁니다. 임금이 사용하던 물건은 수레와 말조차 감히 무람없이 처리를 하지 못하는 것은, 지존을 위해서입니다. 따로 처소를 장만하여 주고 관(官)에서 물품을 공급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고 하였다.

이에 인수대비가 권경우를 징계하라는 글을 내려 보냈다. 성종은 권경우를 가두고 세자에게 아첨한다며 꾸짖었다. 그리고 사면 시켜 주었다. 연산군 때 권경우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관련하여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아우 권경유가 연루되어 사형되자 권경우는 연좌로 강릉부 관노가 되었다. 다음해에 연산군이 역마를 보내어 불러들여 옷과 신을 하사하고 직첩을 돌려주려 의논하니 한치형 등이 반대하였다. 권경우는 중종 때 신원되었다.


허씨 삼남매

전하는 말에는 허종과 허침 형제가 누이의 권고를 듣고 윤비 폐출 회의에 참여하지 않아 갑자사화에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허종은 성종 29년에 죽었고, 허침은 1504년 갑자사화 당시 우의정을 지낼 정도로 오래 살았지만, 윤비 폐출 당시 할머니 상을 당해 불참했던 덕에 화를 면하였다고 한다.

『사재칙언』에, 카지노 가입 쿠폰이 세자로 있을 때 허침은 필선(세자시강원의 정4품 관직)이 되고 조지서는 보덕(세자시강원 종3품 관직)이 되었다. 세자는 날마다 유희만 일삼고 학문에 마음을 두지 않았는데, 조지서는 천성이 굳세고 곧아 매번 나아가 강의할 때마다 책을 앞에 펼치면서 말했다.

"저하께서 학문에 힘쓰지 않으시면 신은 마땅히 임금께 아뢰겠습니다."

이에 세자가 조지서를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하지만 허침은 그러지 않고 부드러운 말로 조용히 깨우쳐 주었으므로 세자가 좋아했다.

어느 날 세자가 이렇게 말했다.

"조지서는 큰 소인이요, 허침은 큰 성인이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조지서를 매우 위태롭게 여겼다. 과연 카지노 가입 쿠폰이 왕위에 오르고 갑자년의 화가 일어나자 먼저 조지서를 베어 죽이고 그 집을 적몰하였다. (조지서의 후처가 정몽주의 증손녀)

허침은 우의정으로서 카지노 가입 쿠폰의 잘못을 바로잡지는 못했으나 매번 왕의 명을 받들면서 죄수를 논죄할 때에 주선하고 구원하여 살린 사람이 매우 많았다. 하지만 정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매양 피를 두어 되가량 토하더니 이내 분하고 답답해하다 죽었다고 한다.


정광필

정광필이 연산군의 잘못을 적어 상소하니 연산군이 불렀다.

“과인을 망국지주에 빗대었겠다?”

하며 칼을 천천히 뽑았다.

“이 칼이 다 뽑히면 너는 죽을 것이다.”

하여 칼이 다 나오도록 정광필의 안색이 변하지 않자 연산군은 칼을 도로 넣고 귀양 보냈다. 『동야휘집』

연산군 10년에 안윤덕과 정광필이 연산군에게 ‘밤까지 사냥함이 온편치 못하다.’고 하여, 국문하게 하였다. 연산군은 장 1백에 귀양 보냈다. 정광필은 정조반정 후에 복직 되어 영의정까지 올라갔다.

강혼

정붕이 강혼과 심순문에게 데리고 있는 기생을 모두 버리라고 하였다.

강혼은 곧 기생을 버렸고 심순문은 차마 연을 끊지 못 하였는데, 이 두 기생이 궁중으로 뽑혀 들어가 연산군의 총애를 입었다.

후에 강혼은 1498년 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장형을 받고 유배되었으나, 얼마 뒤 풀려나와 문장과 시로써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다. 『병진정사록』

연산군의 궁녀 하나가 죽자 연산군이 매우 슬퍼했다. 이때 강혼이 궁인애사와 제문을 지어 연산군의 마음을 위로하여,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다. 중종반정 후에 강혼은 연산군 폐출의 정당성을 들어 중종즉위 교서를 기초했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여 문리가 완성되지 못하니 사람들이 여우와 이리의 문장이라 하였다. 『해동야언』

중종반정 때 박원종 등이 강혼을 죽이려 했는데, 강혼은 영의정 유순의 주선으로 반정군에 목숨을 빌고 반정에 가담하여 공신록에 올랐다.


심순문

심순문은 심온의 증손자이다. 심온은 세종의 장인인데 태종이 외척 제거 할 때 누명을 씌워 죽였다.

1504년 연산 10년 윤4월 25일 카지노 가입 쿠폰이 전교하였다.

“심순문이 장령이 되었을 때에, 어의의 넓고 좁은 것을 말하였으니, 이는 위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무례하니 죄를 주려하는데 어떠한가?”

하고 가두었다가 개령으로 귀양 보냈다. 『중종실록』

갑자사화 때 연산군이 심순문을 죽이려 하자 대간 성세순과 헌납 김극성이 죽음을 각오하고 상소를 올렸다. 연산군은 듣지 않았지만, 두 신하를 벌하지는 않았다. 『패관잡기』

결국 심순문은 귀양지에서 참형을 당하였다.

후에 장남 심연원은 위사공신·청천부원군·충혜공에 책록 되고 영의정이 되었고, 차남 심달원은 이조판서에 올랐고, 삼남 심봉원은 동지돈녕부사에 올라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4남 심통원은 좌의정에 올랐다. 게다가 장남 심연원의 손녀는 명종 비 인순왕후가 되고, 8대손은 경종 비 단의왕후가 된다.


심순경

심순경의 조부 심회는 성종 때 폐비논의에 참여한 일로 연산군에게 부관참시 당했고, 아우 심순문은 어의 문제로 참형 당했다.

심순경이 훈련첨정 겸 재승의 직책을 맡고 있을 때 몹시 조심해야 했다. 연산군이 대궐문 처마 밑에서 잔치를 열고 탕춘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심순경이 급히 말을 대령해야 하는데, 처마 밑의 잔치자리가 그대로 있어 말을 그 위로 몰고 가야 할 상황이었다. 심순경은 꿇어앉아 자리의 이음새를 잡아 양쪽으로 갈라 그 사이로 말을 몰아 나아갔다. 『기재잡기』

이에 연산군이 기특하다 하여 절충장군으로 특진 시켜 주었다. 하지만 며칠 후에는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장을 치고 변방으로 쫓아버렸다. 후에 심순경은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호위하여 중종으로 옹립시켰다. 그리고 연산군을 잡아 강화의 교동도로 압송한 공으로 공신 2등에 책록 되었다.


박상(朴祥)

박상은 연산군 2년에 생원시에 합격, 연산군 7년에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다.

『청구야담』의 기록에 의하면, 연산군 후궁 김씨의 오라비가 나주에 살면서 포악을 일삼아 부임하는 인근 관장들이 김씨에게 인사를 해야 할 정도였다. 박상이 나주 목사로 자원하여 부임하였는데, 김씨는 5일이 지나도 신임 목사가 인사하러 오지 않는다며 종들을 보내 나주 관아의 삼공과 좌수를 잡아오라 하였다. 이에 박상이 군졸을 동원해 김씨를 잡아다 매를 쳤다. 김씨가 죽자 감사에게 즉시 보고했다. 그 사이 김씨 종이 궁에 연락하여 연산군이 대노하여 박상에게 사약을 내렸다. 금부에서 사약을 가지고 내려오고 있는데, 박상은 이보다 먼저 임금에게 사죄를 청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오다가 길이 엇갈렸다. 그리고 중도에서 벗들이 박상을 빼돌려 술을 먹였다.

연산이 이 일에 온 신경을 쓰는 동안, 중종반정이 성공하였다. 박상이 궁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니 다른 임금이었다. 비로소 반정이 일어난 줄 알고 낙향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승에는 중도에서 고양이가 길을 막아 다른 길로 들어선 덕에 금부관리를 피할 수 있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연산군일기』에는 갑자사화 때 조지서·정성근의 죄를 논할 때 박상도 찬성했다는 기록만 있다. 박상이 나주목사로 간 때는 중종 때의 기록에 있어서, 위의 야화를 뒷받침 할 기사는 찾지 못했는데, 후궁 김씨의 기록은 연산군일기에 있다.

‘카지노 가입 쿠폰은 나주 기생 백견(김숙화)을 총애하여 전라 관찰사에게 명을 내려 좋은 논 50결과 밭 30일 갈이를 내려주되 어디든 그 부모가 땅을 고르도록 했다. 또 백견의 형부 김문경을 목사에 임명하기 위해 빈자리가 있는지 묻고, 부안 땅의 어전(魚箭-물고기 잡기 위해 설치한 어살)을 백견에게 주게 했다. 백견이 강령부정 이기(李禖)의 집을 빼앗으려 무고하자, 카지노 가입 쿠폰은 이기의 부친과 형제를 가두고 재산을 몰수 하였다. 그리고 백견의 집 빈터에 울타리를 둘러친 사람과 그 이웃까지 잡아오게 하였다. 백견 아비 김의를 당상으로 승진시키고, 백견의 족친 최수광에게 벼슬을 주었다. 백견 아비 김의가 나주로 내려갈 때 말을 제공하게 했다. 이렇듯 나주 소부리 땅의 종 김의는 딸이 카지노 가입 쿠폰의 총애를 독차지 하자 교만 방자하여, 온 전라도가 그를 맞이하고 전송하며 지공 접대하기에 분주하였다. 김의는 수령과 마주앉아 술잔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중종반정 때 군기시 앞에서 백견의 목을 베니 사람들이 기왓장과 돌을 던졌다.’

이처럼 나주 기생과 관련하여서는 박상의 이름이 없는데도(실록에 기록 못 한 내용도 있을 테지만) 위의 야화가 있는 것은, 중종 때 박상이 나주목사로 가서 공명하게 치민하니 나주민들이 이런 목사가 연산군 때 왔으면 어땠을까 하여 만든 것일까 싶기도 하다.

박상은 중종의 부름으로 사간원에 들어갔는데, 종친의 중용을 반대하다가 하옥되고,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상소하다가 유배되는 등 고초가 많았다. 주로 외직으로 돌면서 기묘사화 이후 살아남은 조광조의 문하생들을 자신의 집에 거둬 보살폈다. 충주목사 때는 조광조의 동문인 김안국과 김세필이 여주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것을 듣고 여주목사 이희보에게 조곡 200석을 빌어다가 이들에게 나눠주고 가을이 되면 자기 쌀을 직접 실어다가 조곡 갚기를 매년 했다고 한다.

또, 심정(沈貞)이 경기도 양천에 소요당을 짓고 크게 벌이는 잔치에 초대되어 심정을 까는 시를 지었다.

“반산(半山)에 상을 차렸고 가을구렁 추학(秋壑)에 술잔들을 벌였구나”

반산은 왕안석이고 추학은 가사도로, 송나라를 망친 위인에 빗댄 것이다.

박상은 심정의 원한을 사 외직으로 쫓겨났다. 이런 박상에 대해 생전의 조광조가 극구 칭찬하였고, 퇴계 이황도 ‘명예와 신분에 전혀 흠이 없는 완전한 선비’라 했다. 조카가 사암 박순(朴淳)이다.

조신(曺伸)

조신이 사역원에 소속되어 명나라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연산군이 오색 비단을 사 오라 명하였는데, 비단은 못 사고 대신 진주를 사 왔다. 조신이 죽을 것 같아 내시들과 의논하니, 내시들은 조신에게 글을 배운 인연이 있어 귀띔해 주었다.

“상은 화가 나면 수염이 옆으로 꼿꼿하게 벌어지고 기분이 좋으면 얼굴이 평온해 지니 용안을 보아 기분이 좋을 때 연락 할 테니 그 때 들어와 보고하시오.”

내시들의 귀띔으로 연산군이 기분 좋을 때 보고하니, 연산군은 진주를 비빈들에게 나누어 주고 조신에게도 무명베 150필 하사하였다. 조신은 이것을 내시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송계만록』

조신은 조위의 이복아우로 서얼출신이지만, 시문에 능해 김종직·김안국·남효온·정여창·박상·이행·홍언필 등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외국어 실력이 좋아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데 재능이 있어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카지노 가입 쿠폰 초에 형조위는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이름 있는 문신이었다. 성절사로 북경에 간 사이 무오사화가 터졌다. 김종직과 관련 된 사람은 모두 죽는 사건이었다. 조위는 바로 그 문제가 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록에 실어 편찬한 장본인인데다 누이가 김종직의 부인이었다. 조위는 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의주에서 체포되어 겨우 죽음을 면해 의주로 유배 되었다.

이때의 일을 김정국이 『사재척언』에 기록했는데, 연산군이 조위가 귀국하면 사형시키라 명하자 아우인 조신이 점을 보았다. 점복자가 다음의 싯구를 들려주었다.

“천층 물결 속에서 몸을 뒤집어 나오고 바위 밑에서 사흘간 잠을 잔다.”

조신은 천층의 파도 속에서도 빠져 나온다며 안도하였다.

조위는 압록강을 건너자 체포되었다. 이극균 등이 극력히 상소하여 사형은 면해지고 유배되었다. 순천으로 이배되어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병들어 죽었다. 후에 갑자사화 때 연산군이 조위 등을 부관참시하라 명했다. 조위의 시신은 사흘간 바위 아래에 노출 되었으니 점괘대로 되고 말았다. 조위는 2년 후, 중종 즉위 때 신원되었다.

아우 조신은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 김천으로 낙향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중종 때 왕명을 받아 김안국과 함께 『이륜행실도』를 편찬하였다.

성세정

카지노 가입 쿠폰은 여러 기녀를 궁에 두었는데, 한 기녀가 ‘꿈에 옛날 남편을 보았다’고 하자, 카지노 가입 쿠폰은 기녀의 옛 남편 목을 베어 은쟁반에 담아 기녀에게 보내더니 기녀도 죽였다.

성세정이 영남감사 때 만난 기녀를 첩으로 삼아 집에 데려왔는데 연산군이 빼앗아 갔다. 연산군이 기녀에게 성세정이 보고 싶으냐고 물으니 기녀가 대답했다. “성감사를 따라 올라왔지만 본처가 무서워 자주 못 만나 원망하였는데 보고 싶겠습니까?” 그랬더니 연산군이 “성세정을 죽이고 싶으냐?”고 물으니, “곧바로 죽이기보다는 멀리 귀양 보내 고생시킨 다음에 죽이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하여 성세정이 죽음을 면하고 귀양 가 있는 동안 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성세정이 목숨을 구해 준 기녀에게 집과 종을 내어주어 자유로이 살게 하고, 그 아들 성륜도 봉급을 받으면 기녀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기녀도 수절하여 80세 까지 살았다. 『장빈거사호선』

정인인

카지노 가입 쿠폰 때 조인규 부친이 사헌부 장령으로 있었는데, 제주 목사로 발령받은 사람이 찾아와 “평소 병이 있어 뱃길에 죽을 것 같으니 주상께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게 해 주시게.” 하고 부탁했다.

조인규 부친이 사헌부로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카지노 가입 쿠폰에게 가서 “신은 사람이 못나 제주 목사의 사사로운 부탁을 받았으니 직책을 수행할 수가 없으므로 면직 시켜 주십시오.” 하였다. 이 일로 카지노 가입 쿠폰은 제주목사 발령자를 국문해 죽였고, 조인규 부친은 이 일로 한평생 한으로 살았고 조인규에게는 아들이 나지 않았다. 『월정만필』

이 내용의 당사자를 찾아보니 연산군 9년 5월 22일 기사에 ‘제주목사 정인인(鄭麟仁)이 병으로 사임을 청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연산군은 대신들과 논의하여 “직첩을 거두고 추국하되, 중한 죄로 처벌하여, 뒷사람들이 경계하도록 하라.”고 명했다.

정인인은 유자광을 탄핵한 인물이다. 홍문관에 재직할 때 왕의 실정을 풍자한 시를 써서 연산군의 미움을 받고 있다가 제주로 발령이 나자 병을 핑계로 사임한 것이다. 연산군은 다음해 갑자사화 때 이 일을 소환하여 참수 시킨 것이다. 중종반정 후 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었다.


최부(崔溥)는 성종 때 제주에서 배를 타고 돌아오다가 표류하여 명나라에 닿아 북경을 거쳐 돌아와 『표해록』을 지은 인물이다.

홍문관에 있을 때 동료 송흠과 함께 고향에 잠시 내려갔는데, 송흠이 영광에서 나주까지 역마를 타고 최부를 방문하였다. 최부가 나라의 역마를 사사로이 탔으니 탄핵하겠다고 하니 송흠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였고, 최부는 주의만 주고 끝냈다. 『해동야언』

이렇듯 청렴한 최부가 연산군 때 성절사로 명나라에 간 사이 무오사화가 터져 김종직의 제자라는 명목으로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에 참형을 당했다. 이때 함께 성절사로 갔던조위(曺偉)도 무오사화 때 처형 되었다.

이 두 사람의 일을 안타깝게 여긴 누군가가 야화를 만들었던지 『동야휘집』에 기록되어 있다. 조위의 부인이 귀양 가면서 아들 조사우를 절에 맡겼다. 반정이 일어나 조위가 신원이 되자 조사우는 스님과 함께 예전에 살던 집으로 가 보았다. 다른 사람의 집이 되어 있는 옛집을 보자 눈물이 나서 골목을 거닐다가 담장이 허물어진 어느 집에서 글을 읽는 여자 아이를 보았다. 피죽도 못 먹은 얼굴로 단정히 앉아 글을 읽는 여자아이를 보니 측은한 생각이 들어 옥가락지 하나를 빼어 문틈으로 던져 넣고 돌아섰다. 후에 중종이 연산군 때 죄를 받은 이들의 자손에게 관직을 내렸는데, 조사우는 무장(전북 고창) 현감을 제수 받았다. 조사우가 무장현에 부임하여 혼처를 소개 받았는데, 숙부의 집에 의탁하고 있던 최부의 딸이라고 했다. 최부의 딸은 혼기를 놓쳐 늦은 나이 임에도 혼인을 거부하였다. “소녀는 이 옥지환을 아는 이가 아니면 혼인하지 않겠습니다.” 조사우가 보니 자기가 던져 넣었던 바로 그 옥지환이었다.


최유회

최유회의 딸이 가야금을 잘 타서 정승 한치형이 종으로 삼고 사랑했는데, 연산군의 궁녀로 뽑혀 들어가 숙의가 되었다. 최숙의가 부친이 죽은 줄 알고 머리를 풀고 울자, 연산이 화를 내며 사람을 보내 최유회가 죽었는지 확인하게 했다. 최유회는 병석에 누워 있다가 궁인이 온 이유를 듣고 딸이 거짓말 한 것이 되어 벌을 받을까 겁이나 자결했다. 연산군은 거짓 자결한 것인지 의심하여 목을 베라고 명했다. 시신을 확인한 후에 죽은 최유회에게 참의 벼슬을 내렸다. 『해동야언』

최유회의 이름은 『실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연산 11년 9월 11일 기사에 ‘최 숙원의 아비 죽음에 여러 물품을 내어 주게 하다’는 내용이 있다.


한치형은 한확의 조카이고 인수대비와는 사촌이 된다. 숙부와 인수대비의 후광을 입어 승승장구하다가 카지노 가입 쿠폰 때 영의정까지 올라 카지노 가입 쿠폰과 삐걱하여 미움을 받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2년 후 갑자사화 때 추죄되어 부관참시 되고 일가가 몰살당하였다.

한곤

연산군이 기녀를 뽑을 때 겸사복 한곤이 첩 채란선에게 언문 편지를 보내 “예쁘게 꾸미면 뽑히니 예쁘게 꾸미지 말라.” 한 것이 들통 나 추국을 받게 되었다. 연산군은 한곤을 능지처참하고 부모를 장(杖) 1백에 섬으로 이주시키고 자식 및 형제는 장 80에 처하고 군대에 넣게 하였다.


이극균

이극균은 이극돈의 아우로 갑자사화 때 좌의정이었다. 윤씨 폐비논의에 찬성했던 일로 귀양 갔다. 사약을 가지고 온 관원에게 “내 나이 70에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나라에 봉사한 것 외에는 죄가 없다. 이 말을 왕에게 전하라.” 연산이 전해 듣고 시신의 뼈를 부수라 명했다. 『해동야언』

연산군은 이극균을 죽이고도 화가 안 풀려 이극균과 친한 사람과 집에 드나들던 사람까지 매질하게 하고 이극균의 집을 파내어 못으로 만들게 했다. 그리고 이극균이 세운 법조문도 지우게 했다.

이극균은 박팽년 며느리의 형부이다. 세조 때 박팽년의 며느리가 몰래 아들을 키우는 것을 성종 때 신원되도록 도와주었었다.


정성근

갑자사화 때 연산군은 정성근과 조지서를 다시 심문하게 하였다. 성종의 상 때 낮은 관원으로서 3년간 상복을 입었다는 것을 트집 잡아 사형을 명했다.

정성근이 잡혀오다가 광주(경기도) 천현을 지나며 슬피 곡하였다.

“부모의 묘가 근처에 있는데, 수갑이 채워져 있어 절을 할 수 없구나.”

정성근의 부친은 정척인데 『성종실록』에 그의 졸기가 있다.

‘정척은 몸가짐이 청렴하고 근신하며 일을 처리함에 정밀하고 상세하여 관직에 임해서는 근신하고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해자와 전문의 글씨가 정밀하고 교묘하여 새보(璽寶) 와 관인(官印) 이 모두 그의 솜씨에서 나왔었다. 전고(典故)를 익숙하게 알아 조정의 의례와 제도를 많이 찬술하였다. 성품이 또한 충성스럽고 효도하여 고관과 벗의 초상에는 질병이 있더라도 검소하게 먹었다. 매달 삭망에 가묘에 제사를 지내며, 별다른 음식은 반드시 조상신에게 올렸다. 세종이 병환이 나서 포도를 맛보려 했으나 절후가 늦어서 구할 수가 없었는데, 정척이 자신의 집 정원에 있던 수정포도를 따서 올렸더니, 임금께서 말하기를, ‘가슴 속이 답답하더니, 이 포도를 먹고 상쾌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해마다 포도를 따서 올리고 세조께도 포도를 올렸다. 세조가 정척의 청렴과 정직함을 칭찬하였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갑자사화에 죽은 이들은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제문을 두고 김일손 등의 죄를 논할 때 모두 찬성한 신하들이다.

연산군 4년 17일 기사에 정문형·한치례(한확의 아들)·이극균·이세좌·노공필·윤민·안호·홍자아·신부·이덕영·김우신·홍석보·노공유·정숙지가 의논드리기를,

“김종직이 세조조에 벼슬을 오래하고도 세조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여겨 울분과 원망의 뜻을 품고 제문을 지어 세조를 기롱했으니 극히 부도합니다. 그 심리가 병자년에 난역을 꾀한 신하(사육신)들과 무엇이 다르리까. 마땅히 대역의 죄로 논단하고 부관참시해서 ......”

극형에 동의한 신하들의 이름이 유지·박안성·성현·한치형·신준·정숭조·이계동·권건·김제신·이계남·윤탄·김극검·윤은로·이집·김무·김경조·이숙함·이감·변종인·박숭질·권경우·채수·오순·안처량·홍흥·이인형·표연말·이극규·이창신·최진·민사건·홍한·이균·김계행·정성근·이복선·이세영·권주·남궁찬·한형윤·성세순·정광필·김감·이관·이유녕 등이다.

집의 이유청과 사간 민수복·유정수·조형·손원로·신복의·안팽수·이창윤·박권 등은 “죄가 크지만 이미 죽었으니 작호를 추탈하고 자손을 폐고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하며 부관참시를 반대하였다.

그러자 카지노 가입 쿠폰은윤필상등에게 명하여 부관참시 반대자들을 형장심문하게 했다. 갑자기 나장들이 철쇄를 가지고 일시에 달려드니, 재상 이하가 놀라 일어서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유청 등은 형장 30대를 맞고 김종직에 대한 다른 정(情)이 없다고 공초하였다.


이렇게 무오사화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성종 때 윤씨의 폐위를 찬성 했다는 이유로 갑자사화 때 추죄되었던 것이다.

연산군 때는 서로 죽고 죽이는 시대였다. 심순문은 한위·채수를 논죄했었고, 정성근은 김종직의 죄를 찬성했고, 정성근의 죄를 논할 때는 조정의 모든 관원이 찬성했다. 심순문도 정성근 처벌에 찬성한 며칠 후에 논죄를 받고 처벌되었다. 그리고 윤필상도 유배지에서 사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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