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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낭아 Jun 16. 2022

살생부가 된 문서들

<몽유도원도 찬문

1447년 세종 29년 4월 어느 날, 안평대군 비해당 이용이 꿈을 꾸었다.

우뚝 솟은 봉우리 사이 골짜기에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있고, 오솔길 갈림길에서 기암절벽과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골짜기로 들어서니 탁 트인 마을이 나타났다. 대나무 숲과 초옥이 있고 개울가에 조각배가 떠 있었다. 최항과 신숙주가 뒤따라오는 것을 보며 꿈에서 깨어났다. (후에 최항과 신숙주는 수양대군 편에 붙는다)

안평대군은 화사 안견에게 꿈속의 장면을 그리게 하여 ‘몽유도원도’가 완성된다. 안평대군은 북문인 창의문 밖에 무계정사(武溪精舍)라는 정자를 지어 1만 권의 장서를 보관하고 선비들과 시를 짓고 교류온라인 카지노 게임.

1450년 세종 30년에 안평대군은 이곳에 ‘몽유도원도’를 걸어놓고 문인들을 초대하였다. 그림 속 복숭아밭을 구경하고 나온 이들이 감격하여, 박팽년이 서문을 쓰고 성삼문이 후문을 쓰고 신숙주·이개·하연·송처관·김담·고득종·강석덕·정인지·박연·김종서·이적·최항·윤자운·이예·이현로·서거정·김수온·만우·최수 등이 찬문을 썼다.

이들 21인은 후에 안평파와 수양파로 나뉘어 운명을 달리했다.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신숙주는 일찍이 세종 앞에서 세손의 보호를 맹세한 이들이었다. 이중 다섯 명은 세조에게 죽고, 신숙주와 박연과 최항, 그리고 신숙주의 처남 윤자운(윤회의 손자)은 수양대군 편에 붙어 영달을 누렸다.

유성원이 집현전에 교리로 있을 때, 수양대군이 들이닥쳐 황보인과 김종서 등을 살해하고 역모를 다스렸다며 정난녹훈의 교서를 기초하라 명하였다. 다른 학사들이 모두 도망가고 유성원이 붙잡혀 협박을 당해 문서를 기초 하고 집에 돌아와서 통곡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난공신의 책정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허락 받지 못했다. 단종복위 사건 때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가 처형 되고,유성원은 목을 찔러 자결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부관참시 당했다.

유성원의 아내는 송처관의 누이인데, 송처관은 성종 8년까지 살았다. 그의 졸기를 보면, ‘누이가 유성원의 아내인데 유성원이 죄를 받고 적몰 되어 남에게 품을 팔아 빌어먹었으나, 송처관은 집이 넉넉한데도 누이를 거두어 돌보지 않으니 남들이 다 비난하였다. 그래서인지 송처관에게는 아들이 없다.’

이적(李迹)은 세종 때 유산상속 문제로 부친을 때리고 욕한 죄로 유배 되었다가 12년 만에 석방되었다. 이때 가평에서 은거하면서 찬문을 쓴 듯 하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없다.

이현로는 매관죄로 탄핵을 받았고 병조정랑일 때 보고 없이 일을 하다가 유배 되었다. 시화에 능하여 안평대군과 교분을 두터이 하였다. 수양대군이 북경에 사은사로 가려하자 안평대군이 가야한다고 주장 하고, 김종서와 황보인과 안평대군을 연결하기도 하였다. 풍수에 능하여 일찍이 ‘백악산 뒤에 궁궐을 지어 기운을 누르지 않으면 정룡(正龍)이 힘을 잃고 방룡(傍龍)이 일어날 것’이라 하였다. (이 말대로라면 안평대군이 지은 무계정사는 단종을 옹호하고 수양대군을 막는 역할이다) 그런데 이 일은 수양대군 쪽에 빌미를 제공했다. 1453년 단종 1년 5월 19일 『실록』에 혜빈(세종 후궁 양씨)이 밀계하기를, “안평대군이 사직을 위태롭게 하기를 꾀하여 여러 무뢰배를 모으고, 이현로의 말을 듣고서 방룡소흥(旁龍所興)의 땅에 무계정사를 지었으니, 마땅히 미리 막아야 합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현로는 낙향해 있다가 계유정난 때 참형되었다. 그리고 세조 때 편찬된 『단종실록』에 이현로는 간사한 인물로 표현되어 있다.

하연은 고령으로 사직하여 있다가 계유정난 두 달 전에 자연사 온라인 카지노 게임고, 이예는 세조의 즉위에 온건하게 대처해 살아남아 벼슬을 계속 온라인 카지노 게임.

서거정은 1452년 문종 2년에 수양대군의 종사관으로 북경에 가다가 모친상을 당해 되돌아 왔다. 서거정은 모친이 위독한 것을 숨기고 있다가 꿈에 모친이 사망한 꿈을 꾸어 몹시 슬퍼하자 수양대군이 효성에 감탄하며 그를 가상하게 여겨 신뢰하게 되었다. 서거정은 세조에게서 관직을 받고 승승장구 하였다. 그리고 권람ㆍ한명회ㆍ신숙주와 친밀하게 지냈다.

김수온은 고승 신미(信眉)의 동생으로 불경에 통달하고 제자백가·육경에 해박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김종직의<조의제문

김종직은 1431년 세종 13년에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한골마을에서 출생하였다. 16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백룡부(白龍부)를 지어 냈지만 낙방하였다. 대제학 김수온이 읽어보고 “뒤에 대제학이 될 사람이다.” 하며 세종에게 보였다. 하여 세종이 김종직에게 영산훈도(창녕의 향교 교관)에 임명했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1459년 세조 5년에야 정시에 급제하였다.

세조가 실무를 위해 잡학을 익히라고 하자 “잡학은 선비의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가 질책 당했다. 1465년 어느 날에 김종직은 홍귀달과 함께 한강의 정자 재천정에 갔다. 송처관의 시에 홍귀달이 차운하여 시를 지으니 김종직이 답시를 써서 걸었다. 후에 김수온이 읽고 “이는 필시 백룡부를 지은 사람이 쓴 시다. 이 사람은 후에 내 자리에 오를 것이다.” 하였다. 김종직은 성종 때 함양군수로 나갔다. 함양의 정자 학사루에 올라 유자광이 쓴 시가 걸려있는 것을 보고 거두어 불태우게 하였다. 이 일로 유자광은 앙심을 품게 되었다.

1577년 10월 밀양에서 경산으로 가다가 답계역(성주)에서 자는데, 꿈속에 노인이 나타나서 “나는 초나라 회왕인데 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에 버려졌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잠에서 깬 김종직은 회왕을 애도하는 조문을 지었다. 김종직은 여러 관직을 거쳐 62세에 사망온라인 카지노 게임.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은 스승인 김종직을 너무 존경하여 이 조문을 연산군의 사초에 써넣었다. 또 사초에 잡다한 것을 써 넣었는데, 『해동야언』에 전하기를, ‘전라감사 이극돈이 성종의 국상 중에 기생과 어울려 놀았다’는 내용을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하여 이극돈이 사초의 기록을 삭제해 달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했다고 한다. 화가 난 이극돈이 어세겸에게 <조의제문에 관한 얘기를 전하였는데 어세겸이 별 반응이 없자 유자광에게 전한다. 유자광은 김종직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던 차에 노사신과 함께 연산군에게 고하였다.

1498년 연산 4년 7월 11일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를 모두 가져오라고 명한다. 실록청 당상 이극돈·유순·윤효손·안침이 사초는 왕이 볼 수 없다고 하지만 연산군은 즉시 가져오라 명한다. 하여 이들은 상고할 만한 부분만 절취하여 올리면 왕이 사초를 본 것이 아니라며 6조목을 절취하여 올렸다. 그러자 연산군은 한술 더 떠서 종실에 관한 기록도 가져오라 명한다. 그리고 의금부에 김일손과 허반이 잡혀 온다. 연산군이 세조의 일을 기록한 것에 대해 물으니 김일손이 대답했다.

“권귀인은 바로 덕종(의경세자, 세조의 죽은 장자)의 후궁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권씨가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 하여 기록온라인 카지노 게임습니다.” (세조가 수침을 요구했다는 의혹)

연산군이 누구에게서 들었냐고 물으니 김일손은 처음에는 대답하지 않다가 재차 강하게 추궁하니 귀인(貴人)의 조카 허반의 이름을 댔다. 연산군이 “세조의 일을 『성종실록』에 쓴 의도가 무엇이냐?” 물으니 “춘추좌씨전을 쓴 좌구명도 전해들은 것을 썼기에 신 또한 쓴 것입니다.” “전번에 소릉(문종 비 현덕왕후의 능, 세조가 부숨) 복구를 청한 이유는 무엇이냐?” “신이 성종조에 출사온라인 카지노 게임으니, 소릉에 무슨 정이 있으리까. 다만 『국조보감』을 보니, 태조께서 고려 왕씨를 끊지 않고 숭의전을 지어 제사를 받들게 온라인 카지노 게임으며, 정몽주의 자손도 보전하게 온라인 카지노 게임으니, 이는 모두가 조정의 미덕으로서 당연히 만세에 전해야 할 것입니다. 임금의 덕은 인정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소릉을 복구하기를 청한 것은 임금으로 하여금 어진 정사를 행하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권씨의 일을 쓸 적에 반드시 함께 의논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말하라.” “국가에서 사관(史官)을 설치한 것은 사(史)의 일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므로, 신이 직무에 이바지하고자 감히 쓴 것입니다. 그러하온데 이같이 중한 일을 어찌 감히 사람들과 의논하겠습니까. 신은 이미 본심을 다 털어 놓았으니, 청컨대 혼자 죽겠습니다.”

연산군은 허반을 잡아들여 물었다. “네가 일손과 더불어 권귀인·윤소훈의 일을 말했다는데......” “신은 귀인의 조카이자 양자이온데, 궁금(궁중)의 일을 어찌 감히 말하오리까. 김일손이 신을 끌어댄 것은 답이 궁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김일손과 허반은 고문을 당온라인 카지노 게임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결국 이 사초사건은 연산군이 사림을 제거할 빌미가 되어 무오사화로 확대되었다.


<양재역 벽서

1547년 명종 2년 9월 18일

부제학 정언각이 선전관 이노(사돈 집안)와 함께 양재역 벽에 붙은 익명서를 가져왔다. 붉은 글씨로 ‘여주(문정대비)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온라인 카지노 게임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하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라고 씌어 있었다.

명종이 곧 영부사와 삼공을 부르니, 이들이 우찬성 민제인과 판중추부사 허자, 예조판서 윤원형도 부르자 온라인 카지노 게임.

하니, 윤인경 등이 회계하기를,

“단순한 일은 아니나 익명서라 믿을 수 없습니다. 다만 요즈음 죄인을 가리켜 억지자복하여 죄를 입었다고 온라인 카지노 게임, 훈신을 가리켜 공이 없이 상을 받은 자라는 말이 떠돌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출처를 모르니 아뢰지 못온라인 카지노 게임 있습니다. 이 글은 믿을 수는 없으나 소문이 떠돌고 있으니 의논하여 아뢰겠습니다.”

하더니 김광준도 부르자고 하여 함께 의논하더니 단단히 봉한 문서를 올렸다.

“이 서계는 벽서를 보고 올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날 전에 의논한 것입니다. 당초(을사사화)에 역적의 무리에게 죄를 줄 적에 역모에 가담했던 사람을 파직과 귀양 시키는 가벼운 처벌을 온라인 카지노 게임기에 이런 소문이 나도는 것입니다. 이는 화근이 되는 사람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여 명단을 아뢰니, 즉시 죄를 정하여 교서에 자세히 기록해서 중외가 다 알게 하소서.”

이들이 봉하여 올린 글은 다음과 같다.

“봉성군 이완·송인수·이약빙은 사사하고, 이언적·정자는 극변안치하고, 노수신·정황·유희춘·김난상은 절도안치하고, 권응정·권응창·정유침·이천계·권물·이담·임형수·한주·안경우는 원방부처하고, 권벌·송희규·백인걸·이언침·민기문·황박·이진·이홍남·김진종·윤강원·조박·안세형·윤충원·안함은 부처(귀양)하소서. 또 생원 허충길이 ‘이덕응은 곤장을 참을 수가 없어서 무복(강제자복)한 것이다.’ 하였으니, 추문하게 하소서.”

(사신의 견해가 덧붙여져 있는데, ‘이들이 중종 아들 봉성군을 죽이고자 하는 것은 을사사화를 역모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니, 이는 너무 심하다.’)

그리고 정언각은 심영과 임형수의 사형을 주장했다. 심영은 대왕대비를 가리켜 신하로서 할 수 없는 말을 온라인 카지노 게임고, 임형수는 평소 윤원형을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는 이유였다. 『기문총화』에 정언각이 임형수를 얽어 죽이고, 임형수의 말을 타다가 떨어져 발이 등자에 끼어 끌려가 크게 다쳤다고 기록했다.



안명세의<시정기

(시정기-사관의 1차 기록물인 사초(史草)와 각 관청의 기록을 정리하여 편철한 것)

안명세는 명종 때 을사사화의 전말을 소상히 기록해 놓았다. 1548년 명종 3년에 을사사화의 주모자들이 이것을 보고온라인 카지노 게임.

<시정기에 기록하기를, 을사년에 문정대비가 윤임 등을 제거하고자 밀지를 내리자 백인걸이 밀지의 부당함을 주장했는데 대비가 화를 냈다. 각주에 ‘이날 주상은 끝내 말 한 마디 하지 않았고, 대비는 윤임 등의 죄가 깊고도 무거워서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반복하여 말하였다. 이때 홍언필 등의 대신들은 평소 주상을 향하는 존경심을 말하고 자신은 윤임 등의 소행을 모르고 있었음을 말하면서 화를 면하고 총애를 굳히려고 기도하였다. 그래서 서로 자신을 변호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이 사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저 사람이 벌써 말을 시작하곤 하여 어눌한 사람은 말을 잘하는 사람에게 차례를 빼앗기었다. 이기(李芑)와 허자는 이미 대비의 뜻에 동조하였기에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었고, 임백령은 옳은 선비인척하며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는 자신을 구제하는 말이다.’라고 사견을 달았다.

또 윤임·유관·유인숙은 사사하고, 이임은 극변에 안치하고, 권벌은 체직(해직)한 처벌 내용의 각주에는 ‘윤임 등을 사사하라는 전교가 내려지자, 이언적·정옥형·윤개·민제인·나세찬 등은 몹시 비통한 표정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의기양양하기까지 하였다. 아, 윤임 등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 하겠으나, 대행왕(인종)이 아직 빈소에 계신데 한 날에 대신들을 죽이니 어찌 불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옛 말에 죄지은 사람은 불쌍히 여길 것이요 죄인 적발한 것을 기뻐하지 말라 하였는데, 비록 마땅히 죄주어야 할 자에게 죄를 준 것이기는 하나 의당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될 듯하다.’......

명종은 기록관들을 처벌하라 명했다. 안명세·손홍적이 잡혀 와서 국문 당하였고 조박과 노윤천의 이름이 나왔다. 손홍적은 정주에 유배 하고 안명세는 참형에 처하고 안명세의 가족을 종으로 만들고 가산을 적몰하게 했다.

안명세는 선조 때 신원되었다.



<선조의 유교

선조가 말년에 대나무 그림을 그렸다. 바위에 늙은 왕대 한 그루가 힘없이 서 있고 옆에 죽순이 나오고 있고, 그 옆에 왕성한 악죽 한 그루가 싱싱하게 서 있는 그림이었다. 이 그림을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유영경·이홍로 등을 불러 보여주었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그림을 칭찬하고, 유영경은 묵묵히 있는데이홍로는 돌아앉아 눈물을 흘렸다. 밤에 선조가 이홍로만 따로 불러 물으니, “악죽 옆에서 떨고 있는 왕대와 죽순이 전하와 대군(영창대군)의 모습 같아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정무록』

1608년 선조 사망 다음날, 내전(선조비 인목왕후)이 선조의 유교(遺敎) 봉투를 내렸는데 외면에 ‘유영경·한응인·박동량·서성·신흠·허성·한준겸 등의 제공들에게 유교 한다.’고 쓰여 있었다. (이홍로의 이름은 없다)

“부덕한 내가 왕위에 있으면서 신민들에게 죄를 졌으므로 깊은 골짝과 연못에 떨어지는 것 같은 조심스러운 마음이었는데 이제 갑자기 중병을 얻었다....... 단지 대군이 어린데 미처 장성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 때문에 걱정스러운 것이다. 내가 떠난 뒤에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니, 만일 사설(邪說-그릇 되고 간특한 말)이 있게 되면, 원컨대 제공들이 애호온라인 카지노 게임 부지하기 바란다. 감히 이를 부탁한다.”

라고 적혀 있고, 사관이 덧붙이기를 ‘유영경·한응인·박동량·서성·신흠·허성·한준겸 등은 모두 왕자·부마 인척들이었기에 이 유교가 있었던 것이다.

이 선조의 유언장이 영창대군과 일곱 신하에게 화(禍)가 되었다.

선조가 사망한 다음날인 2월 2일에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다.

유영경이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유영경에 대한 탄핵이 시작되었지만 광해군은 허락하지 않다가, 수십 일 동안 상소가 올라오니 광해군은 억지로 따른다고 말하며 유영경을 유배 보낸다.

그리고 다음 달에이홍로를 절도에 안치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홍로는 임진왜란 때 임지에서 무단으로 떠나 선조의 피난을 호종하였다. 선조가 파주를 지날 때, 이홍로는 성혼이 여묘살이 했던 빈 여막을 가리켜 성혼의 집이라고 했다. 이에 선조는 성혼이 인사하러 오지 않는다고 서운해 했다. 하지만 성혼의 집은 파평산에 있어 파주읍에서 30리 거리에 있고 임진강과는 20리였다. 성혼의 처형 신식이 어가를 뒤쫓아 임진강에 이르니 어가는 이미 임진강을 건너고 배들이 이미 치워져 끝내 따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또 대신들이 전란의 지휘를 받기 위해 선조와 청대하고 나갈 때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가 신들의 죄입니다.’ 하고 나왔는데, 이홍로가 ‘대신들이 전위를 주청하려고 서로 약속하고 들어가서는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라는 말을 만들어 퍼뜨렸다. 이홍로는 이들 신하들을 비난하며 ‘속히 세자를 불러 함께 의주에 머물게 하여 다시는 분조하지 마십시오. 만약 사태가 발생할 경우 차마 하지 못할 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로부터 선조가 툭하면 전위하겠다고 말했는데, 대신들은 이홍로가 조정 대신들을 제거하려고 이 말을 퍼뜨렸다고 여겼다.

선조가 전위한 뜻을 밝힐 때마다 세자는 불안 해 했다. 그래서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 이홍로를 쫓아낸 것이다. 양사에서 이홍로를 죽이라는 상소를 올리자 광해군은 ‘대부의 반열에 있던 사람에게 갑자기 중한 벌을 내리겠는가?’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계속 되는 처벌 요청에 광해군은 유배 6개월 만에 유배지에서 죽게 하라고 허락했다.

1613년 광해 5년 4월 25일 포도대장 한희길이 서얼 박응서 등 강도일당을 잡아들였다. 이들은 명문가의 서얼들로 관직에 나아갈 수 없음을 비관하여 비행을 일삼다가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강도짓을 한 것이었다. 그래도 명문가의 자손이니 처음에는 구명해 주려는 움직임 있었다.

이때 이이첨이 한희길을 불러 물었다.

“자네가 큰 도적을 잡았다고 들었는데 그 실상이 어떠한가?”

하니 한희길이 내막을 모두 알려 주었다.

그러자 이이첨은 한희길을 가까이 불러 비밀히 의논온라인 카지노 게임. 그리고 김개를 박응서에게 들여보냈다. 박응서는 친구들보다 먼저 자복한 것에 부끄러워하고 있으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이첨의 전갈을 받은 박응서는 말을 바꾸어 고변했다.

“7년 전에 서양갑이 맨 먼저 역모를 주장하여 심우영·허홍인·유효선 등과 함께 여주 강변의 넓은 들판에서 함께 지내다가, ‘우리들이 뛰어난 재질을 갖고 있는데도 오늘날의 법 제도 때문에 출세길이 막혀 뜻을 펴지 못하고 있다. 사나이가 죽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죽는다면 큰 이름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하며 무사들과 관계 맺으려 ........ 금년 봄 정월에 서양갑이 박치의·허홍인 등과 함께 은상을 때려죽이고 은 6, 7백 냥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동원해 밤에 대궐을 습격하려 계획했습니다....... 제일 먼저 대전(大殿)을 범하고 두 번째로 동궁(東宮)을 범한 다음 급히 국보(國寶)를 가지고 대비전에 나아가 수렴청정을 하도록 청하는 한편 성문을 굳게 닫고 백관을 모두 바꿔치려 계획을 세웠습니다....... 아직 사람을 모으지를 못해 시일은 정하지 못했고 또 대비와 대군에게도 알리지 못했습니다.......”

박응서의 고변은 이미 잡힌 서얼들의 이름만 나열했을 뿐이고, 이들을 국문했지만 다들 역모에 대해서는 부인온라인 카지노 게임. 하지만 이이첨은 이들의 입에서 ‘유교칠신과 김제남’의 이름이 나올 때 까지 고문 온라인 카지노 게임.

결국 5월 7일에 함경 감사 한준겸을 파직온라인 카지노 게임 유교칠신을 처벌하게 했다. 김제남 부자가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폐서인 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 강화부사 정항에게 살해되었다. 영의정 한음 이덕형과 좌의정 이항복을 비롯한 서인과 남인들은 유배되거나 관직을 삭탈당온라인 카지노 게임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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