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와 지금의 차이
한 번은 같이 활을 쏘는 짝꿍이 승단대회에 응시해서응원 차 구경을 간 적이 있다. 다들 쟁쟁한 실력자들이 응시를 해서인지 여기저기서 과녁 명중을 알리는 심판의 '관중' 소리가 들려왔다. 최소한(원칙적으로는) 각 소속 활터에서 승급(9순 45발을 쏴서 22중)을 하여 승단시험 응시자격을 갖춘사람들이 도전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당연하겠지만 참 낯설기도 했다.
짝꿍과 같은 사대에서 카지노 게임 사이트 쏘시던 어느 접장님은 4단 응시를 했었는데 끝내 합격을 했다. 4단이면 현재 협회의 기준으로는 9순(45발) 안에 30발을 맞혀야 한다. 한 순(5발) 당 평균 3.33발을 맞히는 수준이다. 당연히 승단시험 응시자 모두가 합격하는 건 아니다. 내가 구경 갔던 그날 합격율은 10% 초반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쟁쟁하던 사람들도마지막에 가서는 대부분 겨울바람을 맞은 나무 이파리처럼우수수 떨어졌다.
태조 이성계는 다섯 마리의 까마귀를 모두 맞히거나 담비 스무 마리를 모두 화살로 쏘아 맞혔다는 기록이 문헌에 남아있다. 정조 임금이10순(50발)을 쏴서 49발을 맞히고 나머지 1발은 일부러 맞히지 않았다는 기록은 유명하다. 10순에 49발이면 한 순(5발)을 쏘면 평균 4.9발을 맞힌다는 뜻이다. 대한궁도협회의 승단 기준 중 가장 높은 9단이 9순(45발)중 39발이다. 한 순 기준 평균 4.3발을 맞히는 수준이다. 9단도 정조에겐 비빌 수가 없다.
문득 궁금했다. 과연 선대의 궁사들과 후대의 궁사들 중 누가 더 카지노 게임 사이트 잘 쏠까?
물론 시대적 배경이나 장비의 차이, 과녁이나 거리 등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엄밀한 비교는 어렵겠지만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건 자유니까.
시수꾼이라고 하면 '꾼'이라는 표현 때문인지 과녁 맞히기에만 천착이 되어서 궁사의 기품이고 뭐고 맞히기만 하면 장땡이라고 외치는 사람이 그려진다. 그러나 이는 엄밀히 조선궁술연구회에서 간행한<조선의 궁술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활터에서는 한 번 쏠 때 5발씩 쏘는 것을 1순이라 하고, 10순(50발)을 1획이라고 하는데1획 50발을 쏘아 30발을 맞히면 시수꾼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시수꾼 말고도소살판, 살판, 대살판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각각 1획기준 15발, 20발, 25발에 해당한다.
시수꾼 기준으로 하면 한 번 쏠 때(1순, 5발) 평균 3발을 맞힌다는 건데, 현재 협회의 승단 기준으로 보면 2단(2.88발)이나 3단(3.11발) 정도의 수준이다. 생각보다 평범(?)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장비와 과녁의 차이다.
현대의 국궁은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그 근원을 <조선의 궁술에서 찾고 있다. 대한궁도협회에서 발간한 교본인 <한국의 궁도가 <조선의 궁술을 참고한 것만 봐도 그렇다. <조선의 궁술은 체육인을 위한 유엽전 활쏘기를 집대성한 책이다. 유엽전은 화살의 종류 중 하나로, 과거 무과 준비생들이 무과 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연습용 화살이자 실제 활쏘기 시험 과목 중 하나가 유엽전 쏘기였던 만큼 실제 시험용 화살이었다.
그런데 일단 유엽전의 규격 무게가 8돈이었다. 현재 활터에는 8돈이나 되는 화살을 쓰는 분은 잘 없다. 보통 40~50파운드 이내를 가장 많이 쓰기 때문에 5~7돈이 대부분이다. 화살이 무거우면 바람을 덜 타는 장점이 있겠지만 그만큼 비거리가 짧아진다는 단점이 생긴다. 비거리를 보완하려면 활의 세기를 늘리거나 표(조준점)를 더 조절하는 등의 궁사의 조치가 필요하다.
게다가 지금은 균일화된 생산라인을 갖추고 카본(Carbon)을 위시한 현대적 재료를 쓰니 비교적 화살별 오차가 적지만, 과거에는 100% 수작업으로 만들고 재료도 대나무 등의 자연에서 나는 재료를 쓰니 오차가 더 컸을 것이라 생각한다.모르긴 몰라도선조들은 장비 면에서는 현대의 궁사들보다더 열악한 환경에서 카지노 게임 사이트 쏘았던 것이다.
과녁의 차이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유엽전 과녁의 크기는 무과에서 가로 4.6자에 세로가 6.6자였다. 센티미터로 환산하면 가로 약 141.7cm에 높이 약 203cm가 된다. 지금 국궁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녁의 규격 크기는 6.6자에 8.8자로 가로 약 200cm, 높이 약 267cm이다. 예전 과녁이 훨씬 작았다. 그만큼 명중의 난이도도 더 올라가는 건 당연지사다.
사대에서 과녁에 이르는 거리도 더 짧아졌다. 지금의 국궁 과녁까지의 거리는 145m이다. 그런데 해방 전에 활을 쐈던 분들의 일관된 증언에 따르면 당시 과녁의 거리는 150m였다고 한다. 지금이나 그때나 과녁 거리의 기준은무과에서 실시된 유엽전 쏘기의 거리였던 '120보'에서 나온 것이다. 다만 '1보'의 거리를 환산하는 기준을 영조척 1자(30.8cm)로 잡을 것이냐, 일본 자(30.3cm)로 잡을 것이냐에 따라 과녁의 거리가 달라진다. 영조척 기준으로 하면 약 150m가 나온다. 145미터를 역으로 환산하면 일본 자에 가까운 수치가 나온다.협회 홈페이지에는 145m로 한다는 규정만 있을 뿐 근거를 명시하고 있지는 않다.
상기한 차이점들을 고려했을 때 똑같은 한 발의 명중이어도 그 무게감이다르다고 봐야 한다. 한 발 맞히기가 지금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예전이 난이도가 훨씬 더 높았을 테니까.
그럼에도 더 어려운 환경에서 활을 쐈던 우리 조상님들이 활을 더 잘 쏜 것이라고 단순하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현대인에게 활은 마이너한 취미이나, 선조들에게는 당연한 일상이었다. 게다가 무과 시험인 유엽전 쏘기를 위해서 한량(무과준비생)들은 밥 먹고 활만 쐈지 않았겠는가.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활쏘기 문화가 훨씬 일상적인 당대의 시절에 활쏘기 실력이 더 좋을 확률이 높은 건 당연지사다.
그 증거가 바로 양궁 대표님의 압도적인 실력 아닐까. 밥 먹고 활만 쏘면 어떤 잠재력을 지닌 민족인지를 양궁팀의 존재가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예나 지금이나 카지노 게임 사이트 겨레의 DNA에는 활 DNA가 똑같이 흐르고 있는 셈이다.
중요한 건 '잘 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보다 넓은 차원에서의 담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과거에도 살판이니 시수꾼이니 하는 말이 있었지만 그것이 활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전국대회 우승을 몇 번 했는지, 몇 단인지 등 몇 발을 맞히기가 거의 '전부'인 것처럼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인간은 언제나 답을 찾아낸다는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우리 DNA 속 활 유전자는 어떻게든 활을 잘 쏘는 법은 기똥차게 찾아낼 것이다. 남은 것은 활에 대한 진정성 있는태도와 바른 지식에 대한 추구다. 물론 각자 밥 먹고 살기에도 급급한 현대 사회에, 선대가 그러했던 수준만큼은 당연히 언감생심이다. 그러나 최소한 과녁에 몇 발을 맞히는지의 이상의 화두를 활에서 찾아내고자 하는 궁사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전통 무예이자 우리의 얼이 담긴 전통문화로서의 우리 활을 올바르게 후대에 남겨줄 수 있지 않을까.
1. 정진명, 『한국의 활쏘기』, 학민사, 2018
2. 신병주, "[신병주의역사저널] 조선시대 왕들의 활쏘기", 세계일보, 2024.8.12,https://www.segye.com/newsView/20240812517078?OutUrl=naver
3. 이기환, "'50발 중 49발 명중' 정조 활쏘기 비법 자랑 친필 나왔다", 경향신문, 2019.2.6.,https://www.khan.co.kr/article/201902061429001
4. 정진명, "[활쏘기 문화 산책]활터는 조선 무예의 저수지", 충청매일, 2020.2.23.,https://www.ccdn.co.kr/news/articleView.html?idxno=635919
6. 유엽전, 네이버지식백과,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39479&cid=46622&categoryId=46622
7. 황학정 국궁 교본에 나와있는 궁시 조합 이미지 출처,https://yukn99.tistory.com/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