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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Apr 04. 2025

오늘의 낱말: 카지노 게임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들

여전히 날이 쌀쌀하다. 베란다로 나가 반짝이는 초봄의 햇살 아래 커피 한잔 마시는 사치를 누리고 싶건만, 매년 선명해지는 지구 온난화는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추위 따위가 어찌 카지노 게임들을 막으랴. OO아~ 노올자~라는 친구의 부름에 소파에 늘어져 일요일의 나른함을 즐기던 딸카지노 게임가 벌떡 일어나 후다닥 밖으로 나간다. 반소매 셔츠만 입은 통 큰 카지노 게임에게 베란다로 나가 재킷을 던져주며 이런 날씨에 그렇게 입고 놀면 감기 걸린다고 주의를 준다. 재킷을 받아 든 카지노 게임는 놀이터에서 기다리는 친구에게 뛰어간다. 제법 센 바람이 초록으로 피어난 나뭇잎을 차르르르 에인다.


옷깃을 여미고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카지노 게임 풍경을 흩는다. 우리 가족이 사는 아파트 앞에는 농구 코트가 달린 놀이터가 있다. 유아가 놀 수 있는 작은 언덕, 모래밭, 그네가 있고, 큰 아이들이 좋아하는 정글짐, 구름다리, 짚라인이 있다. 하늘을 찌를 듯 쭉쭉 뻗은 아름드리나무들이 놀이터를 둘러싸고 그 밑의 잔디 위로 아이들이 뛰어다닌다. 한여름에는 아이스크림 트럭도 합세해 분위기를 띄우는데, 오후 4시면 어김없이 딩동댕 귀여운 리듬과 함께 나타나는 트럭 앞으로 카지노 게임 아이들이 길게 줄을 선다. 앞치마를 두르고 하얀 주방 모자를 쓴 풍채 좋은 아저씨가 허리 숙여 아이스크림을 주는 모습은 그야말로 평화롭고 한가롭다.


놀이터에서 노는 딸아이의 모습을 가만히 눈으로 따라가자니, 살짝 정신이 몸에서 빠져나오는 유체 이탈을 경험한다. 난 새의 시선으로 이 카지노 게임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항상 흥미롭다고 느꼈던 어떤 모습을 재확인한다. 바로 놀이터를 중심으로 보이는 암묵의 경계선이다. 놀이터의 오른쪽에는 정부 지원 아래 비영리 주택협회가 운영하는 2층짜리 사회 주택이 있고, 왼쪽에는 네덜란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 3층 주택이 있다. 부동산 사이트에서 보면 일반 주택은 매매가가 약 8, 9억 원 정도 되는데, 대게 경매로 진행되기 때문에 실제 배팅 가격은 훨씬 높다. (그나마 지방 소도시여서 이 가격이지, 암스테르담의 집값은 서울 못지않게 상상을 초월한다) 그에 반해 사회 주택은 임대다. 과거에는 소득 수준과 관계없이 광범위하게 임대해서 계층 간의 혼합이 가능했고 특정 지역의 슬럼화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2015년, 주택법이 바뀐 후로는 연 소득이 38,000유로(한화 약 5천육백만 원) 이하인, 이른바 저소득층에게만 임대하고 있다.


사는 사람도 다르다. 오른쪽은 주로 무슬림이나 동유럽 및 튀르키예 출신의 이민자 가족이 살고 왼쪽은 99퍼센트 백인 가족이 산다. 이들은 오른쪽은 오른쪽대로, 왼쪽은 왼쪽대로, 그 안에서 잘 어울리지만, 양쪽이 섞이는 일은 거의 없다. 종종 왼쪽에서 길을 통으로 막고 이웃끼리 잔치를 벌이는데, 카지노 게임들을 위해 설치한 에어바운스로 오른쪽 카지노 게임들은 오지 않는다. 반대로 오른쪽에서 대형 스피커로 들썩들썩 음악을 틀며 잔치 음식을 나눌 때 왼쪽 카지노 게임들은 오지 않는다.


내 시선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한 바퀴 돌아 내가 사는 4층짜리 아파트에 이른다. 이 아파트는 경계선 딱 중간에 위치한다. 주로 18~20평 되는 방 두 개 아파트에 커플이나 싱글들이 산다. 카지노 게임까지 있는 가족은 총 40 가구 중 우리 가족 포함 두 가구뿐이며, 외국인은 내가 유일... 아, 아니다, 바로 윗집에 이탈리안 커플이 사니까 나 포함 3명이다. (내가 모르는 외국인 이웃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세는 중산층이 살 수 있는 가격이다. 중간, 혹은 중산층이라는 위치 때문인지 내 딸카지노 게임와 다른 가족의 카지노 게임는 오른쪽과 왼쪽을 오간다. 오른쪽에서 음식을 얻어먹고 왼쪽에서 에어바운스를 타고 논다. 이는 분명 양쪽 모두 마음만 먹으면 교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만, 아직 내 눈에 띈 적은 없다. 소도시 한구석, 이 미약한 놀이터에서도 존재하는 이 경계선이 흥미롭고 무겁다.


난 이 모든 걸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듯 철저히 ‘이방인’의 자리에서 ‘관찰자’의 시각으로 본다. 오토바이 안장에 어슷하게 기대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염없이 서 있는 (정말이지 몇 시간이고 그렇게 서 있는!) 사회 주택 털보 아저씨와 이른 아침부터 앞마당에서 부산스레 노닥이는 그의 가족도 보고, 어스름한 노을 아래 코트에서 농구공을 튕기는 일반 주택 백인 부자(父子)도 본다. 무리 지어 다니며 초인종 누르기 장난하는 무슬림 소년들도 보고 놀이터 주위로 롤러 블레이드 연습을 하는 백인 소녀들도 본다. 개입하지 않으니 편견은 없지만 비겁하고 건조하며 무심하고 무책임하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보았던 한 영국 여성 화가의 그림이 떠오른다. 화가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 그녀는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 조선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일본에서 근무하던 언니 부부를 방문하던 중 3.1 운동이 막 끝난 1919년, 처음 조선을 찾은 그녀는 그 풍경에 매료되어 조선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수채화, 판화 등 80여 점을 남겼고 서양화가로는 최초로 1921년과 1934년, 한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한국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워 때때로 여행객은 기이한 감동을 맛본다.’, ‘예기치 못한 새로운 개발이 그 오래된 땅의 매혹적인 풍경을 망가뜨릴까 걱정이 된다.’ 등의 기록을 남겼다 하니, 조선이 그녀의 마음을 꽤 사로잡은 모양이다. 이는 2020년 ‘책과함께’ 출판사에서 출간한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올드 코리아란 책에 잘 모아져 있다. 장기를 두는 양반들, 소를 타고 산등성이를 지나가는 아버지와 아들, 연지곤지 찍고 초조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새색시 등 세밀하고 정겹게 표현된 옛 한국에서 ‘푸른 눈의 이방인’이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조선에게 품은 애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이 카지노 게임에서 산 지도 어언 4년이다. 아주 짧지도, 그렇다고 아주 길지도 않은 4년의 시간이 조선을 향한 엘리자베스 키스의 사랑처럼 이 카지노 게임를, 나아가 네덜란드를 사랑하게끔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가끔 내가 의도적으로 날 ‘이방인’의 위치에 세우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방인이란 기본값은 외롭지만 편리하다. 선을 긋고 슬쩍 그 뒤로 물러나 공공의 책임을 회피하고 오로지 이기적으로 나만 생각할 수 있다. 그 타성에 젖어 주변인으로만 남으려는 내 비겁함이 부끄러우면서도 그 속에서 묘한 편안함을 느끼는 내 심리를 당신은 이해할까. 호기심은 있지만 자세히 알고 싶지는 않은, 아니 괜히 함부로 알다가는 피곤해질 것 같아 피하는 내 못된 게으름을 당신은 이해할까. 다른 이방인도 나처럼 느낄까. 갑자기 내 시선은 이 카지노 게임로부터 한없이 멀어진다.


바람이 더 세진다. 이탈했던 정신이 바람 때문에 다시 몸으로 돌아온다. 비가 올 것 같다. 아이를 불러 들어오라 할까 하다가 저렇게 신나게 뛰노는데 뭘 방해하나 싶다. 3월도 어느새 봉우리를 찍고 능선을 따라 골짜기로 내려간다. 인간적으로 이제는 좀 따뜻해져야 하는 거 아니냐 투덜대지만, 한 길 하늘 속은 알 길이 없다. 부르르르 온몸을 떨며 안으로 들어온다. 남편이 저녁으로 으깬 감자에 시금치와 소시지를 넣은 네덜란드 전통 음식 ‘톰푸스’를 먹자고 한다. 딱히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지만 자기가 요리하겠다는 말에 얼씨구나 오케이 한다. 대신 난 종이를 펼친다. 이 하얀 종이에 나도 그 엘리자베스 키스처럼 네덜란드의 모습을 그려볼까 잠시 생각한다. 다시 베란다로 나가 카지노 게임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민다. 이렇게 하면 난 이 카지노 게임를 사랑할 수 있을까. 주변에서 얼쩡거리지 않고 카지노 게임 속으로 뛰어들 수 있을까.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속절없이 어느 봄날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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