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과 출산이 갖는 아이러니는, 그것이 아주 사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실상 부부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다는 데에 있다.
일단 새 생명의 첫 번째 세포가 엄마 몸의한 공간을차지하게되면, 이후의 시간은홀을 향해퍼팅된 골프공처럼 예정된 목적지를 향해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그리고 그 사이에 매일매일 시간제한이 있는 팝업 퀴즈 같은 문제들이 예비부모의 이름표를 달게 된 이들에게 주어지게 된다.
어떤 문제들은 신속한 결정이 요구되고(어느 산부인과를 갈 것인가?),
어떤 문제들은 개인의 기호가 아닌 객관적인 사실을 토대로 결정되어야 하며, (어떤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인가?)
어떤 문제들은 다자간의 세밀한 조율을 필요로 한다. (어떻게 양육 시간을 어레인지 할 것인가?)
그리고 이 문제들은 학창 시절의 쪽지시험과 달리 답안을 백지로 제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결혼을 하기 전, 나는 내가 이 모든 문제들을 현명하고 재치 있게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마치 판사석에 앉은 마크 트웨인처럼 말이다.
하지만 실제 레이스가 시작되고 보니, 나는 실상 마크 트웨인 보다는 롤랜드 고릴라에 더 가까운 인간임이 드러났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점은, 현대 사회는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임신과 출산에 대한 촘촘한 가이드를 마련해 두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할 일은 가이드 북을 찬찬히 훑어보고,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그러니까 가급적 보수적이고 무난한) 선택을 하는 것뿐이었다.
작게는 육아용품 구입에서부터 크게는이사를 가는일까지.
우리는 거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가능한 범위 내에서다른 선배 부모들이 주로 고르는 해답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딱 한 가지 과제에 대해서는 순수하게 나와 아내의 생각에 기인한 답안을 제출하고 싶었는데, 바로 아이의 카지노 게임을 정하는 일이었다.
카지노 게임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생명이 지구상에서 갖게 되는 첫 번째 개성이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섞이게 되는 아이의 행정적 이름과 달리, 대부분순수하게 아빠와 엄마에 의해 정해진다.
내 생각에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사회적이나물리적,금전적 제약 없이 순수하게 미학적 견지에서 판단할 수 있는 과업은딱 두 가지밖에 없다.
태몽과 카지노 게임.
그러나 태몽은 내가 마음대로 꾸는 것이 불가능하기에아이의 카지노 게임만큼은 꼭직접,멋지게 지어주고 싶었다.
문제는내가 이름을 짓는 일에 아주 젬병이라는 것이었다.
어찌나 젬병인지, 게임 캐릭터 이름을 지을 때도 구글의 단어 무작위 생성 프로그램을 사용하거나, 당시에 나를 가장 화나게 하는 사람의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가령 디아블로 3 캐릭터의 이름은 내 아내의 이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의 카지노 게임을 단어 무작위 생성을 통해'커피 아령', '우주 만화가', '두목 고양이', '프리지어 부동산 케이크'라고 지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내가 좋은 걸로 생각해 볼게."
굉장히 미심쩍어하는 아내의 시선을 받아넘기며이렇게 호기롭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평범하지만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카지노 게임들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튼튼이, 축복이, 기쁨이, 행복이, 은총이 같은 이름들 말이다.
이런 카지노 게임에는 이 넓디넓은 우주에서 부족한 두 남녀를 부모로 선택해 준 아이에 대한 감사함과, 아이의 미래를 축복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아니면 십이간지 꾸러기 수비대에서 따온 카지노 게임들도 있다.
청룡이. 토순이. 요롱이. 키키.
이런 이름들은 귀여울 뿐 아니라, 태어날 아이의 성품까지 상상하게 만들어서 듣는 이를 웃음 짓게 만든다.
옛날 옛날, 우리네 조상님들은 아이의 카지노 게임이나 아명으로 오히려 못난 단어를 붙여주기도 했다.
개똥이. 말똥이. 소똥이.
너무 귀한 아이여서 혹여나 나쁜 귀신들이 그 가치를 알아보고 잡아갈까 봐 두려워서일 수도 있고, 못난 이름을 갖고 있음에도 눈부시게 빛나는 아이를 보면서 그 소중함을 되뇌기 위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 좋았다.
그래서 오히려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나아가서 내 아이만의 개성 있는 카지노 게임을 생각하는 일은 더더욱 어려웠다.
아내와 처음 갔던 해외여행지의 멋진 야경이 떠올라 '노을이'라는 카지노 게임을 생각해 봤다.
하지만 갓 태어날 아기의 이름으로 '노을'은 어쩐지 조금 이상할 것 같아서 기각.
여름에 태어날 아이이니 '여름이'는 어떨까?
하지만 친구네 부부가 아기의 진짜 이름으로 '여름'을 써버리는 바람에 기각.
차라리 글로벌 시대이니 영어로 된 카지노 게임은 어떨까?
천사의 이름을 따서 '미카엘'이나 '라파엘'이나 '티리엘' 같은 이름 말이다.
하지만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디아블로의 시네마틱 영상이 떠오를 것 같아서 기각.
오히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내가 원하는 방향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빠와 엄마로서 아이의 삶에 바라는 점을 넣은 카지노 게임을 지어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종국에는 '어떤 삶이 좋은 삶일까?'라는 고민에까지 생각이 뻗어갔는데, 이쯤 되니 카지노 게임 작명이 문제가 아니라 내 인생에 대한 후회와 반성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정작 작명에는 별로 진척이 생기지 않았다.
아이고 복잡해라.
그러던 중, 카지노 게임 고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내의 직장 동료가 이런 말을 해주었다.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 단순하게."
아, 그래.
그래야겠다.
속 시끄러운 일 없이 단순한 게 제일 좋은 삶이지.
그래서 우리 아기의 카지노 게임은 '단순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