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Feb 15. 2025

역사 없는 카지노 가입 쿠폰, 기억 없는 나

카지노 가입 쿠폰


사람의 MBTI는 변한다. MBTI는 본래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를 구분 짓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한 사회 안에서 누구를 누구와 붙여놓으면 능률이 오를지를 알아볼 요령으로 개발된 이 테스트는 엄밀히 말해 ‘과학적’이라 볼 수 없으며, 조금 억지를 부린다면 사주팔자에 더 가깝다. 사주는 한 인간이 태어난 때와 시간에 따라 한 사람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는다. 즉 일종의 운명론에 사로잡혔고, 바꿔말하면 자기실현적이다. 운명이 정해졌다면 그 이야기를 전달받은 순간부터 이미 그런저런 결론에 시달리는 게 아니냐는 소리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런 점에서 카지노 가입 쿠폰를 스포일러 당한 채로 관람하는 것을 좋아한다. 예를 들어, 역사를 다루는 장르에서는 앞으로의 이야기를 조금 알고 있다고 해서 카지노 가입 쿠폰를 보는 일이 재미없어진다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카지노 가입 쿠폰가 이미 현실을 충실히 따라가므로 그 현실에 관해 알고 있다면 카지노 가입 쿠폰 또한 어떤 전개로 흘러갈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즉, ‘역사’를 다룬다는 건 이미 지나간 것을 말하기보다 앞으로의 미래를,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다루는 것이다. 사실 스포일러를 당한 상태에서는 결론이라는 게 변하지 않지만, 그에 이르는 과정이 어떻게 될지를 머릿속에 이어보는 재미가 있다. 앞으로 가는 일이 땅을 박찬다는 뜻에서의 반작용을 응용한 것임을 떠올려보자. 카지노 가입 쿠폰는 아무쪼록 현실을 반대항으로 둘 듯하나, 사실은 아니다.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지 않고서도 우리가 행복을 논할 수 있듯이 역사를 논하지 않고서도 현실을 가리키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가령 사사키 아츠시는 「서브컬처가 서브컬이 된 순간」이라는 글에서 서브컬처와 서브컬을 구분한다. 논의를 요약하면, 본래 서브컬처란 주류에 대항하는 부류의 반문화였는데 이것이 상업성을 추구하며 서브컬로 전락하고야 만 것이다. 이를 따라 서브컬처에 있던 ‘역사성’이 사라짐에 따라 서브컬은 평면적인 무언가로 변모했다는 게 이 주장의 요지다. 이렇게 보면 꽤 자명한 사실로만 보이지만, 아무쪼록 시점을 더 확장해보아야 할 가치가 있다. 우선 서브컬의 평면성에 관해서다. 오늘날 서브컬의 평면성을 말할 때 처음으로 떠오르는 건 바로 아즈마 히로키씨다. 아즈마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모에의 속성을 말하며 결국 대상이란 것은 부분으로 산포된, 실체 없는 형태임을 역설한 바 있다. 그말인즉,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우선시하면서 “쓸모가 있는지, 재미가 있는지, 소재로 삼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는 서브컬엔 실체가 없다. 단지 자신이 좋았던 감흥만이 부분적으로만 남아, 마치 맑은 머리로 일어난 한낱 아침처럼 아무런 것도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냥 ‘좋았다’는 점만 드문드문 남아있을 뿐이다. 요컨대 ‘서브컬’이 제거한 건 단순한 역사성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다. 단지 기억을 잃었다고만 말하기에는 더 넓은 범주의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했던 것을 잃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나’를 잃고 말았다. 좋아하는 작품 몇 편을 목록으로 작성해볼 수는 있겠지만, 취향을 고백하는 일은 몹시 힘들어졌다. 왜냐하면 이 목록은 실체 없는 형식상의 무언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기분이 좋아지고 싶어서 카지노 가입 쿠폰나 음악을 감상하고는 하는데, 이는 그들 콘텐츠에 대한 감상이기보다 “기분이 좋은 상태인 나”를 향유하는 쪽에 더 가깝다. 기분이 좋아지고 싶은 ‘나’는 이 작품을 감상함으로써 획득되는 가치이지만, 반대로 그런 감정의 중심부에 ‘나’ 자신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나’가 기분이 좋은 게 아니라, 단지 기분이 좋은 나를 얻고 싶은 것. 이런 건 이미지 소비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미지조차 소비 대상이 된다고 보았던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우리는 자기를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옛 과거를 ‘좋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이미지 소비를 행하는 것뿐일 수 있다. 아츠시는 서브컬처와 서브컬의 관계를 두고서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현재가 과거를 착취하는 것”이라고 썼다. 같은 논리로 말한다면 여기서 ‘과거’는 단지 ‘좋았다’라는 감정이미지 소비를 위해 소모될 뿐인 것이다. 이를 따라 우리는 ‘과거’가 왜 항상 ‘좋았던 시절’로 불려야만 하는지에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위치짓기 안에서는 과거가 호재로서 선호되는 게 아니다. 과거는 좋았던 시절로서 우리 현실에 반하는 게 아니라 뭔가 ‘좋았다’고 여기고 싶은 자신의 현실만을 가리키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돌아갈 곳이 없다고 여기게 되어, 어디에도 ‘있을 곳이 없다’고만 여기게 될지도 모른다. 카지노 가입 쿠폰를 어디에서 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없다면… 돌아갈 곳 또한 없다. 마찬가지로 그런 장면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 수 없다는 말은… 카지노 가입 쿠폰가 ‘역사’를 잃었다는 뜻이다.


카지노 가입 쿠폰에서 과거는 어떤 의미일까. 카지노 가입 쿠폰는 드문드문 떠오르는 과거의 몇몇 장면만을 남긴다. 카지노 가입 쿠폰를 보았던 당시에는 별것 아닌 것만 같은 장면도 돌이켜보면 무언가 ‘좋았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정말로 좋은 장면이어서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기억에 의해 미화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지난 일을 잊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과거’의 상실은 필연이다. 과거를 잃어버린 자리는 자신의 현재가 채운다. 이를 두고서는 “카지노 가입 쿠폰를 그저 자신의 현실에 빗대어서만 생각하게 됐다”고도 비판해도 좋다. 이들은 그냥 무언가를 떠올리는 일을 좋아할 뿐 그게 정말로 자신에 미치는 영향까지는 생각지 않는다. 과거는 그저 과거로만 여기면서 그게 현재와 어떤 연결고리를 갖는지는 고민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과거는 한 현실에 대응하는 형태로의 반문화가 아니라, 당장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하는 서브컬로만 다뤄질 뿐이다. 요컨대 오늘날의 카지노 가입 쿠폰 문화, 독립된 형태로 존속하는 ‘과거’란 아츠시가 말하는 서브컬의 3요인, “쓸모가 있는지, 재미가 있는지, 소재로 삼을 수 있는지”를 충족한다. 지금의 나에겐 이런 카지노 가입 쿠폰가, 어떤 기분에는 이런 카지노 가입 쿠폰가 필요하다고 보면서 카지노 가입 쿠폰를 탈역사화한다. 과거를 선택적으로 편집하고 또 배치함으로써 그들 카지노 가입 쿠폰가 자기 삶에 받아들여지기만을 바란다. 다르게 말하면 오늘날의 시네필은 다소 어리광쟁이다. 집단에 구애하기보다 그저 받아들여지기만을 바라는 이 태도는, 명실상부한 ‘유년기’라 할 수 있다. 어떻게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응대하는 일이 적어도 성숙하다고는 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꼭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역사를 묘사하는 바람직한 방법인 것일까. 일반적으로라면 그렇지만, 과거가 정말로 ‘좋았다’고 느끼는 건 단지 우리의 삶이 팍팍할 뿐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목소리를 내기 위해 광장에 나온다면 그건 자신이 있을 곳이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광장은 모든 것의 바깥에 속해있기에 반대로 사람들이 머물만한 장소가 된다. 이와 유사하게 카지노 가입 쿠폰는 결국 그 어떤 현실도 될 수 없으므로 대중이 머물만한 장소가 된다. 어차피 현실이 아니라면 ‘그것들’의 과거로부터 ‘지금-여기’를 이어보려는 시도는 쉽게 무산된다. 카지노 가입 쿠폰에서 현실은 드문드문 불려 오는 ‘좋았던 시절’이 아니라 그곳에 없는 ‘나’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기억’이다. 마치 ChatGPT가 그럴듯하게 풀어내는 허구이야기처럼, 여기에서도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이 반대로 자신을 지지하는 일’은 존재한다. 이때 시간의 무게는 그만한 깊이를 잃고야 마는데, 사실 이 경우 카지노 가입 쿠폰를 구태여 봐야 할 이유는 없게 된다. 왜냐하면 카지노 가입 쿠폰를 ‘본다’는 건 카지노 가입 쿠폰가 짓누르는 시간의 무게를 견딘다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를 함께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역사 이후의 카지노 가입 쿠폰는 앞에서 뒤로 흘러간다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차 지키지 못하게 됐다. 카지노 가입 쿠폰에서 현실은 우리가 카지노 가입 쿠폰를 보는 일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선입견’에만 그친다. 아마 우리는 그것을 즉물적으로 다루고 싶은 것 같다. 서브컬처가 대항문화의 성격으로서 항상 무언가의 반례였다면 서브컬처는 무언가에항상 맞서왔고, 우리는 그걸 부숴야만 한다.


서브컬처가 있는 곳엔 항상 무언가가 방향지시표로 향해있다. 아즈마는 『정정하는 철학』에서 인간은 무언가를 기억하는 존재이기에 반대로 과거를 현재에서 ‘정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관점은 서브컬처가 지닌 역사성을 잊은 것이 서브컬이라는 말에 대해, 그것이 망각이 아니라 ‘정정’의 과정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카지노 가입 쿠폰에 대해 무언가 한 장면을 떠올릴 때 그것만을 두고서 카지노 가입 쿠폰 전체를 ‘좋았다’거나, 아니면 카지노 가입 쿠폰의 결말에 이르러서야 카지노 가입 쿠폰 전체에 대한 평가를 뒤집게 하는 것은 모두 정정의 힘이다. 아즈마는 이를 두고서 과거를 수정해서 고치는 힘으로 일컫지만, 역사수정주의와는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며 이같이 덧붙인다. “과거가 잘못되었으니까 모든 것을 리셋해버리자는 말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 정정하는 힘을 적용해본다면 어떨까?” 전 세계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이곳'을 의식한다면 지난 십 몇년 간은 가히 리부트의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카지노 가입 쿠폰 프렌차이즈가 망해버렸으니까 계속해서 리부트 판본을 만든다. 자신의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타인과의 관계를 적대관계로 설정하고, 이를 통해 확실한 우위를 얻고 싶어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여기에는 항상 가족유사성이라는 게 존재한다. 리부트를 하더라도 과거에서 이어져 내려온 무언가가 ‘바꿀 수 없는 것’으로서 지금 이곳에 잔존한다. ‘기분이 좋은 나’에서 바꿀 수 없는 것도 결국 ‘나’라는 점을, 그렇다면 카지노 가입 쿠폰를 보는 일에서도 ‘역사’란 ‘나’에게 있음을 기억해두도록 하자. 카지노 가입 쿠폰를 보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미래의 한 장면이기보다 과거의 전선에 서는 일이니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