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에 올라온 ‘마이크로 시네마’ 관련 기획을 읽었다. 마이크로 시네마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시네마보다 더 규모가 작은 형태로 운영하는 영화관을 뜻한다. 이는 ‘영화관’이라는 이름이 민망할 정도의 크기, 홈씨어터에 근접한 정도의 공간을 포괄한다. 공동체의 관점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 마이크로 시네마는 다른 예술 영화관조차 늘 있는 영화만을 틀 뿐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타인에 보여주는 것’에 집중한다. 물론 여기에는 복잡한 뒷사정이 존재한다. 서울의 모 예술 영화관은 자신들이 확보한 영화 필름 수를 항상 아쉬워한다. 예술 영화관은 영화 필름이나 파일이 없으면 영화를 틀 수 없고, 이는 돈 문제를 떠나 아예 파일 자체의 저작권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 귀인한다. 결국 예술 영화관이 매번 같은 영화를 틀게 되는 것엔 자신들의 확보한 DB가 그만큼 적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도둑일기』의 저자 한민수는 모 비공개 영화 공유 트래커에서 한국의 모 프로그래머로 추정되는 이를 발견했다고 말한 바 있다. 영화를 먼저 봐야 영화에 가치판단을 할 수 있고, 또 이를 국내에 소개할 수 있으니 이는 어느 정도의 이유가 있는 행동이다. 영화제에 프로그래머들이 방문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런 영화를 구매하는 마켓 참여이기도 하고 말이다.
마이크로 온라인 카지노 게임마에 대한 오인 중 하나가 그렇다. 극장이라는 공간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빔프로젝터나 각자의 스마트폰 등에 의존하기도 하는, 이런 식의 작은 공동체가 있다. 이들은 많은 경우 무대에 올려지지 못한다. 법의 테두리 안에 속해 있는 경우가 거의 없고 또 실제로 마땅히 경계를 두는 것 같지도 않다. 이들이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는 집단이라는 게 아니라, “인터넷 곳곳에 흩뿌려져 있는 개인들을 한 공간에 모으고 있다(씨네21).”는 평가가 정확하다는 소리다. 법 자체는 무언가를 명령하는 게 아니라 하지 말라고 하며 울타리는 세우는 쪽에 가깝다. 울타리 안에서는 가장자리에 딱 붙어 있어도 되고, 정중앙에 가서 사방을 들여다봐도 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울타리 안에 머무르는 건 그렇게 하기로 서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공동체’라는 건 서로 간에 무언가를 합의했다는 점을 뜻한다. 그리고 한 공동체를 발견했을 때 우리가 해야 할 건 이들이 서로 무엇을 합의했는지를 밝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마이크로 온라인 카지노 게임마는 무엇을 합의한 것일까? 만화평론가 아오키 강호는 인디의 인디펜던트의 ‘인디’는 인디비주얼의 ‘인디’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마이크로 온라인 카지노 게임마도 마찬가지로, 그것은 ‘마이크’를 쥐여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힙합씬에서는 이런 문화가 발달해있다. 보통 강연장에서 청중에 마이크를 쥐여주는 일은 마지막에 가서 겨우 이루어진다. GV 같은 곳을 가면 발언권을 얻기가 힘들어서 쓸데없는 질문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때도 있다. 하지만 힙합씬에서 마이크는 상대방을 무대에 올리는 일종의 도발처럼 여겨진다. 마이크를 들어라!고 일갈하는 일에서는 발언권에 무게 따위 큰 상관이 없다. ‘마이크로 온라인 카지노 게임마’도 이와 마찬가지로 바라본다면, 관객을 ‘즉각’ 호명함으로써 ‘지금-여기’를 공론장으로 만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까 스스로를 발언대에세운다는 것, 사람들에 발언권을 돌려주는 것이야말로 이들 공동체의 기능이다. 그렇다면 마이크로 온라인 카지노 게임마에서 법이란 어떤 의미일까? 누구나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어야 한다며 영화를 해적질하고, 이를 비-정품으로 상영하는 일을 대항문화로 일컫을 수 있을까? 할 말은 한다는 식으로 속이 뻥 뚫리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는 항상 확장가능성을 향해 열려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특히 힙합 크루 같은 형태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크루는 항해의 한 형태다. 서로 비슷한 의견이나 생각이 있는 이들끼리 모여 항해하는 게 바로 이들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온라인 카지노 게임이 따르는 법을 따르지 않는다. 예술 영화관에 놀러 다니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온라인으로 내려받는다. 어차피 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가 오프라인에 없으므로 이들에게 온라인 카지노 게임 집단의 규칙은 유명무실하다. 하지만 이들이 전통적인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형태와 동떨어졌거나 한 것은 아니다. 아즈마 히로키는 “가족 안에서는 전통을 지키는 일과 전통을 바꾸는 일이 결국 다르지 않다”고 말하며 “오히려 그 이중성이야말로 ‘같은 가족’의 지속 가능성을 보증한다”고 전했다. 마이크로 온라인 카지노 게임은 점조직의 형태, 지하 공동체의 형식으로 운영되지만 시네마의 형태를 무너트리려 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온라인 카지노 게임 안에서는 영화를 믿는 일과 이를 바꾸려는 일이 동의어로 사용된다. 꼭 영화를 극장에서 봐야만 진리라고 말하는 옛 시선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반대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있는 그대로를 끌어안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질문하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건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어떤 영화로 살아가고 싶은지를 자문하는 작업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 모순점이야말로 ‘온라인 카지노 게임’이라는 정체성에 줄곧 질문을 던지게 한다. 살아가는 게 말하는 일과 같다면, 삶은 ‘말해진 것’이다. 즉 온라인 카지노 게임은 한 결론에 도전하는 존재다.
혹자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이라는 말이 너무 낮간지럽다고도 하지만, 이는 결국 계속 말하기 위해 필요한 것뿐이다. 아무런 변화 없는 영화는 결국 죽은 영화이기 때문에 마이크로 시네마는 계속해서 변화를 끌어내려 한다. 어쩌면 정반대일지도 모르겠다. 살아가기 위해 변화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변화하는 자신에 삶을 발견하는 게 영화가 아니겠느냐고. 아즈마를 인용해 말한다면, 온라인 카지노 게임은 ‘같은 영화’를 수행하고 ‘같은 무언가’를 지킨다고 믿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방향을 잃지 않는다. “저 너머에… 우리의 ‘영화’가 있다.” 이때 영화는 이미 존재하고 있으므로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수행하는 것에는 그 어떤 강제성이나 필연성이 없다. 마이크로 시네마는 꼭 무언가를 보아야겠다고 말한다기보다 자신은 꼭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쪽에 더 가깝다. 세상에 많고 많은 영화가 있는 것만큼이나 사람들은 수천수만 세계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 안에서 개인은 자신이 지켜내야 할 세계가 무엇인지를 자문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여기 있는 자기 이상을 떠올리지는 못한다. 마이크로 시네마는 그 점에서 ‘자기’라는 종말론적 세계관에 도전한다. 오래전에 이 세계는 자기를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결국 자기를 끌어안아 영역을 전개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시각예술 매체 ‘마테리얼’이 활동을 시작한 지도 거의 6년이 되어간다. 함연선의 ‘씨네21식 비평’에 대한 비판 글을 원년으로 삼는다면 그렇다. 마테리얼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원년은 2019.09.19에 쓰인 세 개의 글(00년대, 86세대, 김소영 평론가 인터뷰)이지만, 그럼에도 11월 8일을 꼽은 것엔 이유가 있다. 사적으로 나는 2019년 11월에 영화이론 대학원 입학 면접을 보았던 경험이 있다. 이 면접에서 “최근 인상 깊게 읽은 영화글이 있느냐”는 질문에, 나는 마테리알 얘기를 꺼냈다. “씨네21식 비평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씨네21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이야기의 골자는 ‘씨네21식 비평’은 씨네21이 주로 사용하는 담론이나 문체를 가리킬 뿐, 그런 담론의 대표자로 씨네21을 꼽기에는 대표성이 약하므로 ‘씨네21’을 비판하는 논리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마주하는 비평 담론들에 ‘씨네 21’을 이름 붙이는 건 마치 새로 발견한 생물에 학명을 붙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연한 얘기지만 학명은 발견자의 이름을 따를 뿐, 그런 이름에 예비된 여러 얽힘까지 끌고 오지는 않는다. 씨네21식 비평은 그걸 말하고 싶어하는 쪽이 씨네21을 가져다 쓴 것뿐이다.
씨네21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는 다소 마이크로 비주얼적이다. 특히 씨네21이 영화잡지 중에서는 담론적으로 거의 유일무이하기에 스스로 갖는 부채의식이 있다. 이는 편집장의 노트를 비롯한 씨네21 내부 곳곳에서 징후로 감지된다. 재난 속에 홀로 살아남았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그 누구라도 뭐라도 말해야 하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생존자는 그 자체로 한 사건이나 현장에 대한 대표성을 갖게 된다. 반대로 그런 씨네21의 생존자적 지위를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씨네21이 설사 그렇게 말하거나 행동할 요령이 아니었다 한들, 적자생존이란 곧 씨네21이 시장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진화해왔음을 뜻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이를 따라 씨네21이 마치 무언가를 대표하는 듯 행동하는 일은 일종의 월권이 아니겠느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씨네21도 결국 온라인 카지노 게임 시장의 마이크로한 뭔가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결국 마이크로는 마이크로 비주얼이 자신을 마이크로 붙잡는 방식이다. 씨네21을 옹호하는 쪽과 비판하는 쪽 모두가 한편이라는 건, 그것만으로도 온라인 카지노 게임 집단이 마이크로화됨을 반증하는 사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