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동전사 카지노 게임 사이트 지쿠악스 비기닝(2025)
<기동전사 카지노 게임 사이트 지쿠악스는 “샤아 이즈나블이 일년전쟁에서 연방의 적기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탈취하는데 성공했다면?”이라는 상상으로 시작된다. TVA로 아마존 프라임에서 해금되며, 극장판으로 1~2화가 선공개된다. 여기엔 안노가 콘티로 참여한 ‘일년전쟁’ 특별분이 있다. 예전 질감과 <퍼스트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 대한 오마주로 가득한 이 분량은 작품 전체에 대한 보충 설명이자, 동시에 원작 팬에 대한 선물이다. 구태여 미사어구를 붙인 건 본편과의 톤앤매너가 다르기 때문이다. 일년전쟁 특별분은 최대한 원작을 따라가며 이를 따라 ‘if’ 전개에도 힘이 붙는다. 가령 마블에서 제작한 본편의 if편은 애니메이션 형태로 제작됐다. 톤앤매너 자체가 다르니 서로 다른 세계임을 설명하는 데 그리 큰 공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타노스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 합류하거나 하는 이야기도 MCU 팬이 할 수 있는 그런저런 유머로 소비된다. <지쿠악스의 본편도 톤앤매너로만 보면 원작과는 차이가 크다. 원작자인 토시노옹부터가 이미 2000년에 ‘졸업’을 선언하고 전 세기를 흑역사로 남긴 상황에서, ‘카지노 게임 사이트’은 우리들의 ‘세기’로 나아갔다. 20세기는 흑역사로 남는다. 이 흑역사는 전쟁과 파괴, 증오와 갈등이 치달은 고립계였다. 21세기는 그것과는 반대가 되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팬이 아니다. 고쳐 말하면 ‘우주세기’를 살고 있지 않다. 그러니 이 글에서 다루는 건 어디까지나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아니라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라는 대문자임을 양해해 주기를 바란다. 여하튼 우주세기의 아무로는 뉴타입을 두고서 “인간은 언젠가 시간조차 지배하게 될 거야"라는 식으로 정의한다. 이 대사는 뉴타입이 인간을 구분 짓지 않고 서로 연결될 수 있으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통’이 가능하다고 본 토시노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한다. 뉴타입은 일종의 ‘신경감응’이 가능한 존재다. 이들은 자신에 다가올 시간을 예측하고 더 나아가 그걸 뒤로 돌릴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을 뒤로 돌린다고 한들 그들 자신이 그렇게 되지는 못한다. 어디까지나 시간을 돌리는 건 이곳 [세계]에만 한정된다는 뜻이다. 뉴타입은 올드타입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병들고, 지치고, 상처 입는다. 토미노가 흑역사를 긍정하는 방식이 졸업이었던 건 그 때문이다. 우주세기를 지난 세기로 돌린다는 건 그 모든 일을 지켜보는 ‘당신’이 있는 덕택이다. 뉴타입은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지만 반대로 한 [세계]를 끝내지는 못한다. 아무리 영화 속에서 자유롭다 한들 영화가 끝나면 자리를 떠야 하는 건 매한가지다. 우리는 존 포드의 영화들처럼 지친 몸과 마음을 스크린 안에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검게 칠해진다는 점에서 흑역사다.
유운성은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에서 자신은 미래의 독자들을 믿는다고 말한다. 들뢰즈도 이와 유사하게 “세계에 대한 믿음”만이 영화의 운동을 결정하는 모든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예측은 이후 양자론의 대두로 어느 정도 현실이 됐고, 영화는 우리가 선택할 수도 있었던 한 세계 판본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졸업에 관한 토미노의 생각이 정확히 그렇다. 토미노는 아마 자신은 흑역사의 사람이며, 사라질 수는 없지만 반대로 증언할 수는 있다고 믿었을 테다. 흑역사를 긍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흑역사를 땅에 파묻는 게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한 세계를 돌아볼 수 있는 지점으로 삼는 일이다. 어둠 속에 자신을 밝힌다는 점에서, 역시 <지쿠악스도 단순하게 볼 수만은 없다. 무엇보다 일년전쟁 특별본은 극장판에만 있다. 이를 관객이 극장에 보러와 주기를 원하는 팬서비스인 것만이 아니라 영화의 한 속성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면 어떨까. 영화가 지닌 증언의 속성을 고려하면 일년전쟁 장면은 본편의 후편에 덧붙여진 팬서비스가 아니라 이곳이 결국 인간의 세기임을 말한다. 본래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슈퍼로봇물에 속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런 생각은 무엇보다 타당하다. 단단한 강철의 몸도 아프거나 다치고, 슬프거나 기쁠 수 있다는 ‘리얼계’로의 이행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숀 레비의 <리얼스틸은 고철 로봇을 고쳐 지하격투에 참여하는 얘기를 다룬다. 사실 기계 몸으로만 한정하면 <총몽의 전투장면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아마 이는 그만큼 레퍼런스화된 설정이라는 뜻일 테다. <리얼스틸이나 <아이로봇 혹은 <WALL-E 같은 영화는 로봇을 마치 사람처럼 대하려고 시도했다. 이를 인간의 공감능력으로 설명할 수 있겠으나, 그보다는 왜 강철 신체에 ‘병들고 다치는’ 속성을 부여했는지가 최대 쟁점이다. 생각해보면 ‘카지노 게임 사이트’ 로봇물의 특징 중 하나는 그것들에 현실성과 핍진성을 부여하는 것 그 이상으로, 한 존재가 상처받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로봇의 신체가 파일럿의 신체에 동화된다는 점이다. 기체가 얻어맞으면 파일럿도 아파한다. 마치 치과 치료를 받는 사람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고통스러워한다. 하지만 우리는 <탑건 같은 영화에서 전투기 외장에 총 좀 맞는다고 얼굴을 찌푸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 로봇 만화가 파일럿의 표정에 주목했던 건 그냥 만화 특유의 작법이었을 뿐이다. 한 세계를 신체 표면으로 분출하는 ‘만화적’ 신체의 정수, 증기기관사 미키의 똥당거리는 신체처럼 여기엔 ‘리얼월드’가 수축과 팽창을 반복한다. 그리고 그 표정에는 아마도 주름이라는 게 존재한다.
주름은 들뢰즈가 라이프니츠에게서 발견한 ‘가치’이기도 하지만, 다음 세기를 예견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가령 애벌레는 주름이 없으면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없다. ‘걷는다’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리가 단순히 일직선 막대기라면 인간은 걸을 수 없다. 관절이 특정 방향으로의 ‘접힘’을 제공하기에 어딘가로 나아가는 일이 가능하다. 즉 고통을 느끼는 신체의 ‘발명’이 우리를 ‘발전’시켰다고 보면 된다. 초창기 영화의 인물/캐릭터는 희화화돼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죽거나 병들거나 다치지 않았고, 다음 컷으로 가면 얼마든지 되살아나 관객을 웃겼다. 그러나 어느샌가 사람들은 영화에 ‘죽음’을 접목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카지노 게임 사이트월드가 혼합됨으로써 느와르가 유행하기 시작한다. 2차 대전기 이후로 유행했던 이 느와르가 세기의 어둠을 반영했다면, 이것이 ‘흑역사’를 연상케 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토미노는 졸업을 택했다. 자신이 흑역사를 지켜보며 감시하는 쪽이라면, 이제 세계는 다음을 상상한다. <지쿠악스는 우주에서 태어나 어느 방향이 하늘인지를 알 수 없다고 독백하는 한 소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수성의 마녀는 두 소녀가 서로를 끌어안고 Z 축의 관성으로 빙글빙글 돈다. 이 장면은 중력이 발생하지 않는 우주장에서도 인간의 관계가 원심력을 끌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단순히 시간의 엇나가게 하는 예외공간이 아니라, 한 관계에서 신뢰의 자장을 발생시킬 수 있다.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을 두고서 우리는 ‘영화’라고 부른다. 어떤 면에서 시간을 지배한다는 건 이렇게 자리를 떠서 주변 콘텍스트로 넘어가는 관객을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하다. 이른바 어떤 형태로 당신이 그 시간을 ‘느꼈는가’하는 것은, 모든 개인에서 벗어나 자기 주체에만 종속되는 ‘독립계’다. 타인의 이 시간을 느끼거나 자신을 표현하는 등,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행보는 어딘지 모르게 고독을 피하려는 현대인의 심정과도 닮았다. 이를 위해 공기 중에 떠다니는 세기의 흐름을 읽고 어떠한 밈 ‘입자’에 반응하는 것은 우주를 다니는 ‘산책자’의 흐름에 비견된다. 과거에 영화를 보는 일이 프레이밍을 통해 어떠한 [세계]로 접속한다는 감각을 동반했다면, 아무런 숙지 없이 기체에 올라타 이를 움직이는 일은 ‘본다’는 기본 감각에 충실하다고 볼 수 있다. 아이는 처음에 손과 발을 움직이며 이를 수도 없이 의식한다. 이후 운동계에 익숙해질 무렵에는 피겨 스케이팅이나 발레 같은 조형 스포츠를 함으로써 이에 재귀할 수 있다. ‘본다는 것’이 익숙해진 세기에 이에 벗어나려는 일, 어떤 형태로든 비평의 자세를 유지하는 일이 그렇다고 느낀다.
영화를 설명하는 많은 방식이 있지만, 관객은 항상 영화에 관한 ‘바깥’이 된다. 이는 즉 영화가 한 세계로서 존재하는 데에 그와 같은 ‘지속’이 몹시 중요하다는 점을 뜻한다. 영화가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아니라, 줄곧 관찰의 행위를 지속하는 게 바로 [세계]를 구성한다. 하지만 끝내 우리가 닿을 수 없는 한 벽이 존재한다. 타인을 직접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세기말에 던져진 화두였고, 여기서 파생된 건 안노의 <에반게리온이었다. 안노는 <신극장판에서 대체 현실을 구상하려 했지만, 어떠한 사건을 겪고 나서 다시금 현실을 살기로 결심한다. 즉 한 세계를 탈출하는 게 아니라 졸업하기를 택한다. 이런 설명을 듣고 나면 아무래도 ‘관객’의 성질을 떠올리게 된다. 영화를 끝내는 건 속도를 더 빨리 내는 일이 아니라 아무 곳도 생각하지 않는 일이다. 어떤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를 잊기도 한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받아들이기에는 이 [세계]의 용량이 너무 작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무언가를 잊는 것과 같다고 보지 말았으면 한다. 중요한 건 ‘이곳’과 ‘저곳’이 서로 다른 시간이 아니라 줄곧 지켜보는 관객의 시간이다. 타인의 고통을 지켜보는 일이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특징이라면, 이 평행우주는 다시금 현실에 닿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