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의 한 분이 이 영화 '아무르(Amour)'의 리뷰를 써오셨다. 그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다들 숙연하고 먹먹해졌는데, 써오신 분은 영화를 두 번이나 곱씹듯 보셨다고 했다. 모인 자리의 사람들은 모두 50대, 60대, 그리고 70대로 연령층이 다양하면서도 동시에 그 리뷰를 읽고 나눈 이야기들이 그저 먼 곳의 말들로만 느껴지지는 않는 나이이기도 하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넷플릭스에 로그인했다. 평소 아이디가 있어도 보지 않던 사이트였는데 ‘아무르(Amour)’를 검색했다. 그리고 조용한 오후, 먹먹했다, 돌아온 오후, 아이디가 있어도 보지 않던 넷플릭스에서 이 영화를 찾아내 봤다.
노부부만 둘이 사는 파리의 아파트. 평화롭고 느릿한 일상은 카지노 게임의 병으로 인해 깨어진다. 스스로 거동할 수 없게 된 카지노 게임, 불친절한 간병인, 병원에 가야 한다고 다그치는 딸. 모든 상황은 나쁘다. 하지만 카지노 게임 못지않게 노쇠한 남편은 카지노 게임가 다시는 자신을 병원에 보내지 말라고 하는 약속을 지키려 애쓴다.
결국 인생의 막다른 길에 닿은 노부부. 카지노 게임는 더 이상 살고 싶어 하지 않고, 남편은 울면서 카지노 게임의 얼굴에 베개를 덮고 온 힘을 다해 누른다. 숨이 멎은 카지노 게임를 침대에 눕히고 꽃으로 장식한 후 거실의 소파에 눕는 남편.
열린 창으로 마치 카지노 게임의 영혼과도 같은 비둘기가 날아들어 오고, 소중히 그 비둘기를 껴안아 준 이후 다시 창밖으로 날려 보내는 남편. 그는 그저 매일매일의 일상을 카지노 게임에게 이야기하듯 쓴다. 창으로 들어온 비둘기를 날려 보내주었어.
그리고 어느날 부엌에서 설거지하며 자신을 부르는 카지노 게임의 목소리를 듣는다. 놀라지만 일어설 기운도 부족해 휘청이는 남편. 설거지를 마친 카지노 게임는 얼른 코트를 입고 나가자고 말하고, 노부부는 그렇게 건강하던 시절에 외출하듯 함께 집을 나선다.
죽은 노부부가 발견된 건 여러 날이 지나서이다. 이미 시신이 부패하는 냄새는 온 아파트에 가득하고, 침대에 뿌려놓은 꽃은 이미 바싹 말라 시들었다.
영화의 엔딩은 딸이 아무도 없는 빈 아파트에 들어오는 장면이다. 집안에 햇살이 가득하고, 노부부는 더 이상 없다.
제목인 '아무르(Amour)'는 프랑스어로 '사랑'이란 뜻이라고 한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래딧이 올라갈 때까지도 먹먹함이 그대로 남은 채 이 영화의 ‘사랑’, 그 의미를 생각했다.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인생의 막다른 길에 닿은 노부부의 사랑은 젊은 연인의 불꽃 같은 사랑과도 다르다. 전우애나 동지애와도 또 다른, 말하자면 부부라는 이름으로 인생을 오래 공유해온 사람들 사이의 그 어떤 것.
젊은 시절 중매로 만나 아이 셋을 낳고 살아온 부모님은 크고 작은 많은 일을 겪으며 함께 나이를 먹었다. 엄마는, 나이가 드니 아빠가 불쌍하다고 말했다. 젊어선 그렇게 당당하던 사람이 늙고 나니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슬픈 얼굴을 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병이 찾아와 같은 달에 두 분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을 때도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나는 그 말을 하던 엄마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남편이 얕게 코고는 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어 있는 깊은 밤에 문득, 많은 사람 사이에서 누군가 어르신! 하고 불러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백발을 괜히 한 번씩 만져볼 때도 문득, 엄마가 하던 그 말을 떠올리곤 한다. 어느새 나도 이제 그런 나이가 되어가는 걸까.
영화 카지노 게임 (Amour) 속 노부부의 삶을 본다. 책을 읽고, 함께 음식을 먹고, 음악을 듣는다. 우습지 않은 농담도 주고받는다. 그 어디에도 특별한 이벤트는 없으며, 뜨거운 온도의 불타는 사랑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강물처럼 잔잔히 일상이 흘러간다. 아내에게 병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누군가 내게 말하길, 기쁘고 좋은 일이 있어서 행복이 아니라, 아무 일도 없어서 행복인 것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사람이 나이 든다는 것, 병이 든다는 것. 아무리 관리하고 조심한다고 한들 결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어디까지 지킬 수 있을까.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이 내내 맴돌았다.
영화 아무르(Amour)에서 죽은 아내를 침대에 눕히고 꽃을 뿌려 장식한 후 방문을 닫고 굵은 테이프로 틈새를 봉한 남편은 아내와 함께 음식을 먹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던 식탁에 앉아 매일 일상을 기록한다. 마치 아내가 살아있을 때 이야기를 나누듯 혼자 종이에 소소한 일들을 써 내려간다. 하지만 아내와 무언가 먹고 마시던 그 식탁에서 그가 뭔가 먹는 장면은 한 컷도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서서히 죽어갔을 것이다.
죽은 카지노 게임가 주방에서 설거지하며 남편을 부를 때 기력이 쇠한 남편은 한 번에 일어서지도 못한다. 그러니 건강했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온 카지노 게임는, 죽어가는 남편의 환상이었으리라.
산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고, 축복이지만 때로는 겁이 나고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즐거운 일이 있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카지노 게임 일도 벌어지지 않으면 행복한 것이라는 떠도는 말들을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오늘의 나는 여기 있다. 그러니 오늘의 나 자신에게 충실한 것 말고 무얼 더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