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뒤의 너에게
요즘 우리 딸은 잠에 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아.
보통 7시면 목욕을 하고 7시 반에서 8시 사이에 침대에 내려놓으면 금세 잠에 들었던 네가 요즘은 방에 들어간 지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가 더 지나야 잠에 드는 날이 많아.
원인이 뭘까 고민하다가 한 가지 떠오른 게 있었어. 혹시 체력이 늘었나? 싶은 거야.
어디에선가 들었던 말인데, 아기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란대. 사실 엄마는 그 말이 크게 와닿진 않았어. 네가 지금보다 더 어렸던 시기에는 그렇게까지 눈에 띄게 쑥쑥 자라는 느낌은 아니었거든.
근데 네가 한 살이 되고, 걷기 시작하고, 뛰기 시작하니까 정말 하루가 다르게 팔다리가 길어지고 키가 쑥쑥 크면서 손아귀 힘도 세지는 게 느껴지더라.
지금 우리 딸은 태어난 지 22개월이 되었어. 곧 두 돌을 앞두고 있지. 쑥쑥 큰 몸만큼 우리 딸의 체력도 쑥쑥 늘어났을 거란 생각이 드니까 엄마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알겠더라. 지금까지 보다 너와 더 즐겁고 격하게(?) 놀아야겠단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어제부터 엄마는 너와 집 앞 공원에 나가기 시작했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일본의 작은 동네는 대중교통이 불편해서 차가 없으면 여러 문화시설이 있는 시내로 나가기가 사실상 어렵거든.
이것저것 다양한 경험을 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상, 엄마가 네게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너와 함께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며 체력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게 하는 거였어.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공원(이라기엔 작고 놀이터라기엔 큰 공터)에는 전에도 한 번 너와 갔었지만 그땐 공원에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엄마에게 달려와 안아달라며 울면서 잘 놀지 않았었거든.
이번에도 혹시 그런다면 나갔다가 바로 집에 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네 손을 잡고 함께 나갔는데 웬걸.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신나게 공원을 뛰어다니는 너를 보면서 더 일찍 나와볼걸, 하고 엄마는 여러 번 후회했단다.
그리고 다음날인 오늘은 오후에 비 예보가 있어서 아침 10시가 좀 되기 전에 같이 공원에 나왔는데 할머니들이 단체로 게이트볼을 하고 있는 거야. 공원 전체에 깃발을 꽂고 기다란 게이트볼 막대로 공을 통,통 치는 할머니들 틈 사이에 너를 뛰어놀게 할 수는 없겠더라고. 공 때문에 위험하기도 하고 할머니들에게도 방해가 될 것 같았거든.
어떻게 해야 하나 곤란해하다가 그냥 오늘은 산책이나 하자고 마음먹고 발길을 돌렸지.이 집으로 이사 오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방향으로 발길이 닿는 대로 너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슬슬 걸어갔어.
원래는 조금만 걷고 다시 그 공원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게이트볼을 치던 할머니 중 한 분이 곧 끝난다고 미리 귀띔해주었거든.) 생각했던 것보다 길이 너무 좋은 거야. 차도와 인도가 연석으로 확실히 구분되어 있고 인도가 굉장히 넓고 땅도 골라서 유모차를 끌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길이었거든.물론 햇빛이 적당하고 바람은 시원한 날씨가 한몫했던 것도 있지.
이대로 좀 더 걷자며 쭉쭉 앞으로 나가던 그때, 지나가던 한 할머니가 너를 보며 귀엽다고 손을 흔들며 다가오셨어.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할머니께서 그러는 거야. 이 근처에도 좋은 공원이 있다고. 유모차를 끌고 가기엔 조금 힘들 순 있지만 차량 진입도 금지되어 있고 아이들이 놀기에도 좋은 공원이 있다는 말씀에 엄마는 할머니가 알려주신 그 공원으로 또 발길을 돌렸어.
그렇게 한 10분 정도를 더 걸었나? 어느덧 푸르른 잔디가 넓게 깔린, 예전에 아빠와도 한 번 같이 왔었던 적이 있는 카지노 게임이 눈에 들어왔어.
그 카지노 게임은 원래 가려던 집 앞 카지노 게임보다 규모 면에서 몇 배는 더 크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오늘 너와 함께 와서 발견한 새로운 장점이 또 있었어. 바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잔디밭이 카지노 게임의 3분의 2를 차지한다는 점. 그리고 연령이 어린 아기들도 탈 수 있는 미끄럼틀이 있다는 점이었어.
그 카지노 게임에서 우리 딸은 마음껏 잔디를 밟고 열심히 미끄럼틀을 타며 아주 신나게 놀았단다.
만약에 엄마가 집 앞 공원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냥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우리 집 근처에 이렇게 좋은 산책길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거고 지나가던 할머니와 정답게 이야기하지 못했을 거고, 그 할머니가 알려준 공원에 너와 함께 와보지도 못했을 거야. 물론 그랬다면 우리 딸 역시 오늘 그렇게 신나게 뛰어놀지도 못했을 테지.
이런 걸 보면 뭔가 예상과는 다르게 하루가 흘러갔을 때 당황하고 낙심하지 말고 그냥 다른 쪽으로 발길을 휙, 돌려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열심히 뛰어놀아서였을까? 오늘 우리 딸은 목욕을 하고 침대에 내려놓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어. 물론 그러다가 또 8시 반쯤 깨서 한동안 침대 난간을 잡고 걷기도 하고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기도 했지만 곧 다시 잠들었단다.
이렇게 너와 함께 바깥에서 노는 게 너의 숙면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너와 함께 즐거운 추억을 쌓을 수 있다는 건 확실하니까 당분간은 날씨가 궂지 않다면 맨날 엄마랑 같이 집 앞이든 조금 먼 공원이든 나가서 놀자!
-예상과 다르게 흐른 하루에 처음엔 당황했지만 결국 더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어서 좋았던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