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수면 상승 시대의 우화
“우리는 왜 동물을 존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동물 역시 인간처럼 '쾌고감수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 답할 수 있다. 최근 진척된 많은 연구는 동물도 인간과 동일한 쾌고감수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이를 기반으로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마사 너스바움'은 ‘동물권’을 비호한다. 고통을 인지하기에 이를 피하고 싶어 하는 인류, 다른 무언가에게 지배당하길 원치 않고 스스로가 상정한 목적으로 나아가길 원하는 자유로운 인간의 특성을 쾌고감수능력이 결정하고, 이에 따라 인간은 '인권'을 보장받는다. 그 쾌고감수능력이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을 학대하지 않고 가축화를 줄여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을 위해 필요한 환경 역시 보장해야 한다. 이처럼 동물권에 대한 인식을 전환해가는 오늘날에 동물을 다룬 예술들은 그들과 직접 대면하지 않더라도 그 다른 삶을 어느 정도 헤아리게 해준다. 긴츠 질발로디스의 <플로우 역시 인간이 그들에게, 특히 기후위기라는 재난을 겪는 동물의 삶에 흐를 수 있도록 도와준다.
1994년 태생의 긴츠 질발로디스는 라트비아의 영화감독이자 애니메이션감독이다. 그는 2019년 <어웨이로 장편 데뷔하였다. 질발로디스의 영화는 마치 '게임' 같다. 그의 작품 그래픽은 마치 '닌텐도'에서 플레이할 수 있는 어떤 'RPG 게임'을 연상케 하고, 카메라 워킹은 주인공의 '발과 눈'이 되어 따라다니기에, 마치 감상자는 '플레이'하는 기분이 든다. 그 플레이는 감상자가 객석에 앉아있는 사람이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행위자가 된다는 것, 이에 감상은 '체험'으로 뒤바뀔 수 있다. 이로써 관찰할 땐 그저 '남의 일'에 그쳤던 것이, 간접 참여하며 '나의 일'로 변모한다.
그렇다면 체험자가 된 감상자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애니메이션을 통해 무엇을 체감하는가? 그것은 삶과 죽음의 '긴장' 관계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작품은 '탄생'하며 시작한다. 직접적으로는 '조난'이지만, 나무에 줄이 걸려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모습은 흡사 '탯줄'로 연결된 탄생 이전을 연상케 한다. 이후 줄이 끊기고 땅으로 떨어지며 출산을 은유하지만, 갓 태어난 삶을 향해 거대한 '죽음'이 따라다닌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철학은 그 죽음을 느끼는 긴장감과 불안이 삶을 발전시킨다고 본다. 주인공은 간헐적으로 죽음을 물리쳐 평화를 누리지만, 그때 인간은 안일해진다. 반면 죽음과 대면한 순간에 이를 잠시 '유예'하기 위해 '괴력'을 발휘하거나 잠재되어 있던 '비행' 능력을 깨우친다. 즉 삶이 당연하지 않을 때, 왜 삶을 그토록 붙잡고 싶은지 드러나는 법이며,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삶의 저력이 해방된다.
그 삶은 혼자 살지 않는다. 영화에서 고립되어 있거나, 또 다수가 함께 있지만 모두가 똑같아서 '다름'을 느낄 수 없을 때, 죽음을 극복할 수 없다. 그런 존재들을 죽음은 필히 잡아먹는다. 반면 전혀 다른 종과 동행할 때, 각자의 다름으로 단점을 보완하며 죽음을 물리친다. 그렇게 다가선 삶이란 맑은 물, 달콤한 과실, 따뜻한 마을과 가족의 온기 등으로 삶의 특권이 감각의 즐거움이란 사실을 환기한다. 그 삶의 여행을 <플로우에선 카지노 게임 사이트가 떠난다. 그 존재는 어떤 삶을 향해 나아가고, 어떤 난관에 부딪히는가?
사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와 ‘여행’은 서로 참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다. 강아지라면 모를까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어지간해서는 여행을 선호하지 않는, 참으로 고집스러운 집순이·집돌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통 어쩔 수 없어서 여행을 떠난다. 서식지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만 다른 개체에게 빼앗겼을 경우에만 다른 어딘가로 흐를 뿐, 대체로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본 작품의 도입에 등장하는 '조각'과 같은 삶을 선호한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들은 모든 의식주를 보장하는 서식지를 선점한 그 첫 번째 기억을 계속 현재에 답습하며 살아간다. 바스라지기 쉬운 오늘과 내일을 아주 단단히 붙잡아 어제를 소환하고 반복하는 것이 묘생이기에, 과거를 항구적으로 유지하는 조각과 유사하다. 영화 속 카지노 게임 사이트도 그렇다. 자신이 터로 잡은 폐가에서 어제도 그랬고, 글피도 그랬고, 부모도 그랬으며 더 나아가 조상들도 그랬을 조각과도 같은 삶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질발로디스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 그리고 외의 동물들도 존중받아야 할 특성과 삶의 의지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그 보금자리에서 유유자적 내향적인 삶을 즐기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흡사 인간의 시선에서 '철학자' 같다는 말을 듣는다. 그들의 복잡 미묘한 속을 직접 들여다볼 순 없지만 고고하게 창밖 경치를 관조보거나, 거울이나 수면 위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골똘히 하는 듯한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흔한 사색의 상징이다. 이는 생각하기보단 일단 행동에 옮기고 보는 외향적이고 물질적인 강아지와는 정 반대의 심볼이다. 영화 속 카지노 게임 사이트도 마찬가지로 수면 위에 비친 제 얼굴을 보며 마치 말을 거는 듯한 모양새를 취한다. 그 얼굴을 향해 "너는 누구니?"라며 대화를 시도하듯 보이고, 그 너는 결국 카지노 게임 사이트 자신이기에 "나는 누굴까?"라며 스스로에게 철학을 되묻는 셈이다. 그러나 그 나의 초상은 수면 위에서 쉽게 흐트러진다. 그 모습을 사유로써 보존하거나 사색할 철학적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 이유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생존하기 위해서 아이러니하게도 서식지를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물을 마시기 위해 냇가에 갔더니 강아지와 맞부딪힌다. 그 위기로 인해 수면 위에 비친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모습은 쉽게 일그러진다.
치열하게 자신을 보존하고 싶어 하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욕구, 반면 이를 방해하는 외부의 침입은 성격이 정반대로 적대적이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숏에 담기는 것이 더 적합할 텐데, 여기서 의아한 점은 이 두 다른 경향이 똑같은 '롱테이크'에 담긴다는 사실이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그림자’처럼 행동하는 팔로우 숏과 결합한 롱테이크는 인간인 우리가 타 동물 종의 삶을 간접 체험해보기를, 이로써 똑같이 쾌고감수능력을 지닌 삶은 별 차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을 존중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러한 체험이라는 역할 외의 기능도 롱테이크가 맡고 있다는 것인데, 일단 카지노 게임 사이트가 자신과 유사한 다른 조각이 전시된 보금자리로 향하는 장면에서 롱테이크가 활용되었고, 이후 강아지들에게 쫓기는 장면에서도 롱테이크가 동원된다. 롱테이크는 하나의 숏이 긴 시간 쭉 이어지는 촬영과 편집 기법이다. 이 연출의 속성에 비춰서 전자를 본다면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중단하고 싶지 않은, 조각처럼 반영구적으로 쭉 이어내고 싶은 삶의 루틴이나 습관을 지녔다는 의미다. 동시에 후자에서 잘려지지 않는 무엇이 그 삶을 방해하는 어떤 영향이자 흐름이다. 당연하다, 어떤 존재가 제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선 다른 삶을 침해해야 한다. 주인공 카지노 게임 사이트를 기준으로 적대적인 뱀잡이수리나 들개들은 악역이지만, 그들에게 감상자가 감정을 이입해본다면 사냥 행위는 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주 타당하고도 당연하다. 동시에 카지노 게임 사이트가 살기 위해선 물고기를 사냥해야 하지만, 그 물고기의 입장에서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사냥은 얼마나 부당한가. 나의 당연함을 위해선 다른 것의 당연함이 침해되기에, 각기 달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한 롱테이크가 치열하게 오간다. 롱테이크엔 당연하게 잇고 싶은 각자의 삶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다툼을 피하고 싶긴 하지만 동시에 익숙하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나 강아지나 서로가 언짢지만 크게 낯설어하는 눈치는 아니다. 애초에 알고 있었다는 듯, 그래서 카지노 게임 사이트가 도망치고 강아지는 쫓는 행위가 매우 당연해 보인다. 그것은 아마 전례가 있을 것이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조각처럼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미래까지 이어질 어쩔 수 없는 삶의 법칙이자 대자연의 섭리다. 그러나 전례가 없는 위기가 찾아온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와 강아지의 서식지를 아주 위협적인 대홍수가 덮친다. 그 대홍수가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서식지의 식생이 수생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기 때문, 더해서 거기에 인류가 살고 있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규모의 대홍수가 당연했다면 과연 인간은 그곳에 터를 잡았을까, 또한 떠나갈 카지노 게임 사이트를 보존하기 위해서 조각을 만들었을 텐데 뻔히 침수되는 그곳에 이를 설치해두었을까? 물론 카지노 게임 사이트가 물을 마시던 개울에서 나룻배가 나무 위에 매달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전에는 대홍수가 나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대홍수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인간이 멸종하고 동물만 남았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전례 없는 오늘날의 대 위협, 기후 위기로 인한 해수면 상승일지다. 그래서 카지노 게임 사이트가 흐르는 여행을 하게 된 이유도 납득이 간다. 인간이 초래한 기후위기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떠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여행을 부추긴다. 그것은 서로 다른 종간의 갈등보다 더 근본적이고 위협적인 대위기다.
이러한 가운데 <플로우에서 눈에 띄는 두 형식이 기후위기를 가시화한다. 형식은 담길 대상을 가장 잘 보존할 수 있는 그릇이다. 대상의 속성을 가장 잘 부각할 수 있는 형태를 지녀야 함과 더불어, 대상이 오염되거나 훼손되지 않게 해주는 일련의 존재 양식이 바로 형식이다. 그렇다면 <플로우의 형식은 기후 위기 속에서의 어떤 존재 양식을 반영할 텐데 그것이 바로 현실과 다른 3D 질감의 사이버스페이스 그래픽이다. 질발로디스의 3D 그래픽은 디즈니 등 일반적인 3D 애니메이션 그래픽과는 질감이 다소 다르다. 하지만 동시에 꽤 익숙한데 게임이나 가상현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래픽이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의 세태를 반영한다. 전 세계의 대부호들이 현실의 땅을 모조리 사들인 결과로 프롤레타리아는 값싼 사이버스페이스만을 점유하게 될 위기에 처했다. 이런 와중에 기후 위기가 장소의 불평등을 더욱 부추긴다. 기후위기로 인해 동토가 녹아 녹지가 생겨나는 러시아, 캐나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경우 현실에서 쫓겨날 일이 적다. 오히려 그들의 영토는 넓어진다. 또한 기후 위기 피해에 어느 정도 대처할 수 있는 위치에 있거나 대안적인 기술과 자본을 지닌 미국과 같은 선진국들도 현실에 여전히 발을 내리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후 위기를 직격탄으로 맞게 될 동남아, 중남미의 경우 앞으로 보게 될 시각이 현실의 말끔하고도 투명한 풍경이 아니라, 사이버스페이스의 오돌토돌하고도 몽글거리는 질감일 수 있다. 영화의 형식은 기후위기 시대의 달라진 풍광을 반영한다.
이렇게 다가올 미래를 담아냄과 동시에 <플로우의 연출은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가 지금 당장 이해하고 느껴야 할 대상들의 삶을 반영한다. 본 작품은 무언극, 정확히는 '낑낑거리는 극'이라 규정할 수 있다. <군다, <카우, <당나귀 EO 등의 작품처럼 동물을 포착함에 있어서 어떠한 언어도 개입하지 않고, 오직 그들의 원초적인 언어만이 들려오는 영화다. 그 언어는 머리로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다. 더욱이 이성적인 요소마저 거의 없다. 대신 감정을 이입하기 좋은 이미지만 나열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계산하고 판단하며 따지기보다는 그저 동물들의 재난 극복기에 정서적으로 몰입하게 된다. 인간은 동물들의 비극에 크나큰 책임이 있기에 마땅히 공감하고 감정을 이입해야 한다. 그래서 기후 위기에 필시 등장해야 할 또 다른 형식이 오롯이 감정적이며 그들의 언어가 담긴 낑낑거리는 극이다.
즉 본 작품의 형식에는 기후위기로 인해 변화한, 그리고 변화할 세태가 담겼다. 그렇다면 그 형식이 담은 내용, 기후위기 이전과 이후는 어떻게 다른가. 카지노 게임 사이트와 강아지는 인간의 거주지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두 동물종이다. 하지만 인간의 눈에 둘이 익숙할지언정, 정작 둘은 조금도 익숙하지 않다. 정확히는 앙숙으로서 익숙하다. 둘은 첨예하게 다르다. 영화 속 강아지가 포식자라면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약탈자에 가깝고, 카지노 게임 사이트가 조각처럼 과거를 되풀이하며 보존하는 삶을 지향한다면 강아지는 거기에 오줌을 누며 부식하지만 즐거운 삶을 지향하며,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내향적인 반면 강아지는 아주 외향적이다. 그나마 대체로는 영역이 분리되어 있어서 물을 마시거나 사냥을 하기 위해서 잠시 서식지가 겹치는 일을 제외하고는 마주칠 일이 드물었다.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육지의 언덕과 산과 강 등은 그 경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기후 위기 시대에 그들의 발 아래로 '물'이 차오른다. 엄격하게 나뉘었던 경계들을 지워버리고 모든 서식지들을 하나로 뒤섞는다. 실제로도 과거까진 꽤 엄격하게 나뉘었던 북극곰과 불곰의 서식지가 해수면 상승 및 빙하 소멸로 인해 겹쳐졌고, 이로써 둘의 혼종인 '그롤라 베어'가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영화 속에서도 본디 만날 일이 없던 종들이 한데 뒤섞이기 시작한다. 중남미의 대표종인 카피바라부터 마다가스카르에 사는 여우원숭이, 아프리카 대륙에 서식하는 뱀잡이수리까지, 기후위기가 아니었으면 볼 일이 없었던 온갖 종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한 장소에 함께 머물던 서로 다른 종들도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더 낯설고 이질적인 종들이 한 장소에 모이자 더 커다란 갈등이 촉발된다. 깔끔한 카지노 게임 사이트와 달리 수더분하고 게으른 카피바라, 물건을 망가뜨리거나 갖고 놀고 싶어 하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 및 강아지와 달리 그것을 수집하고 관리하는 여우원숭이 간의 개체차로 인해 말이다. 즉 기후위기로 촉발되는 것은 이방인 간의 갈등이며, 이는 무수한 기후 난민이 발생할 수 있는 인간 역시 남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물은 양가적이다. 물은 기존의 서식지를 침수시키고 바스러뜨리며 파괴한다. 잔혹한 물 앞에서 지금껏 쌓아온 그 모든 것이 부질없다. 여우원숭이들은 유인원으로서 인간과 닮았다. 그들은 사치품에 별 관심이 없는 타 동물 종과 달리 아주 관심이 많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기후위기 속에서 부질이 없다. 사치품은 여우원숭이들을 즐겁게 만들지만 대홍수 앞에선 어떤 용도로도 쓸모가 없다. 인간이 값지게 여기는 그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심지어 수면에 비친 저 자신의 소중한 삶조차도 너무나 쉽게 일렁이고 흐트러진다는 것을 물이 보여준다. 동시에 물은 흐르며 다른 것을 가져다준다. 분명 우리가 자명하다고 여긴 기존 생태계를 파괴하지만, 동시에 물은 생명력의 원천으로써 다른 생태계를 구축한다. 대부분의 땅이 침수되면서 육지 동물들은 멸종 위기에 처한다. 반대로 엄청난 양의 물이 범람하면서 물고기들이 번성하고, 이들을 잘 사냥할 수 있음과 더불어 날아다니기에 침수에 큰 지장을 받지 않은 뱀잡이수리 역시 번영한다. 또한 폐허가 된 인류의 유산 위에 자연은 이끼와 싹을 틔워 다른 종의 서식지로 변모시킨다. 더욱이 동물들은 어떻게든 변화한 환경에서 해답을 찾는다. 물을 싫어하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였지만 어떻게든 수영에 익숙해지려 노력하고 물고기 사냥 기술도 갈고 닦는다.
또한 집결된 서로 다른 동물 종을 이해하고 공존하여 지금껏 본 적 없는 독특한 생태계를 형성한다. 그것이 쾌고감수능력을 지닌 생물들을 존중해야 할 또 다른 이유다. 다채로운 대자연은 각자 독특한 본성을 지닌 동물들을 탄생시켜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생태계의 구성원들은 서로 협력하고 존중하며 어떻게든 번성한다. 실제로도 자연은 협력을 섭리로 삼는다. 니컬라 라이하니의 『협력하는 유전자』를 따르면 단세포 생물들이 서로 협력하고 연합한 결과가 다세포 생물, 곧 현 지구상의 무수한 존재들이며, 지금의 무수한 생물 종들도 협력을 생존 원리로 삼아 번성해나가고 있다. 영화 속 날개를 다친 뱀잡이수리라 한들 여력이 되면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이듯, 무리와 종의 번영을 위해 뱀잡이수리와 카피바라가 기꺼이 조타 장치를 잡듯이 말이다. 그 지혜를 잊은 인간은 동물은 고사하고 인간 스스로의 쾌고감수능력조차 지켜내지 못하여 폐허만 남기고 몰락한 게 아닐까. <플로우의 나룻배가 무조건적인 연대의 결과라면, 인간의 노아의 방주가 기능주의적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대홍수를 일으킨 인간의 끝없는 이기심을 떠올리면 말이다.
질발로디스는 서로 다른 종들과 협력해야 할 이유를 또 다른 시퀀스들로 보여준다. 대홍수 전후로 영화에선 서식지에서 보편적으로 번성한 종들이 존재한다. 대홍수 이전에는 들개와 사슴, 대홍수 중에는 뱀잡이수리와 물고기, 대홍수가 끝난 이후엔 여우원숭이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들은 다른 것을 배태하는 모습을 보인다. 뱀잡이수리 집단에선 카지노 게임 사이트를 지켜주려는 한 개체를 아주 매몰차게 징벌하고 배척하며, 섬에 낙오된 개들을 배에 태웠을 때 다수가 된 개들의 생태가 배에서 당연시되는 점도 그렇다. 본디 많은 종은 자신을 보존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자신과 유사한 것들과 연합을 맺고, 그렇게 동일한 대상이 한데 모이다보면 같은 것이 당연하게 된다. 하지만 같은 것들만 모여 있을 땐 역설적으로 보존이 불가능하다. 모두 다 똑같이 행동하는 나머지 가능성과 변수를 창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후위기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서 더더욱 서로 다른 쾌고감수능력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다른 마음을 가진 이들이 모여 카피바라를 구조하는 것처럼,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수면 위에 비친 혼자만의 얼굴이 아니라 친구들의 얼굴을 동시에 응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그렇게 길어온 삶이 기후위기 시대엔 참으로 씁쓸하다. 질발로디스의 본 작품에서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은, 삶이 지옥이라면 죽음이 구원인 것처럼 보인다. 삶이 중력에의 휘감김이라면, 죽음은 중력에서 해방된 물방울과 뱀잡이수리가 두둥실 하늘로 승천하는 이미지, 마치 아름다운 은하수와 동화되어가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후 혼자 남겨진 카지노 게임 사이트가 세찬 물살에 저항하며 어떻게든 버텨내는 모습은 타르타로스의 끔찍한 노역 같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삶이 유의미하다면 그것은 죽음의 시원함 및 해방감과는 전혀 다른 긍정적인 감각, 친구들의 부드러운 살결과 단단한 대지의 안락한 안정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랴. 또한 죽음이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면, 삶은 나로서 지속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결말에서 겨우 삶을 지켜낸 친구들이 흔들리는 수면도, 깨진 거울도 아닌, 비로소 안정적인 수면에 비친 저 자신을 응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기후위기 시대에 모든 친구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제 얼굴을 응시할 수 없다. 날개를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다친 뱀잡이수리가 죽음을 바랐다면, 죽음을 바라지 않았을 법한 고래는 변덕이 심한 기후위기 속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고, 고래 덕분에여러 차례 위기를 모면한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그 앞에서 방법을 찾지 못한 채 근심한다. 그 이후 제 얼굴과 친구들의 얼굴을 함께 바라보는데, 그 옆에 고래도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렇게 질발로디스는 기후 위기 시대에 변화할 세계의 모습과 그 재난 속에서도 어떻게든 해답을 찾아낼 자연의 끈질기고도 지혜로운 생명력을 비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이 쌓아올린 많은 성취가 폐허로 전락하고, 변화를 견디지 못한 생물들이 쓸쓸히 저물어간다. 특히 그 생물들의 쾌고감수능력을 충실하게 묘사하여 그들의 비극에 직간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우리의 죄책감을 자극한다. 존중해야 할 다른 삶을 본 작품을 통해 체험하고 함께 모험한 인류는 기로에 서있다. 피할 수 없는 위기라 한들 그 정도를 낮춰 구할 수 있는 삶은 어떻게든 지켜내고 막대한 피해를 조금이나마 줄여볼 순 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에겐 시간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