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3월은 이유 없이 희망이 부풀어 오르는 달이다.
새들의 노랫소리가 높아지고 굳게 닫혔던 문들이 열리고 사람들의 움직임이 경쾌해진다. 어찌 보면 희망이란, 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방문을 열고 창문을 열고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면서 마음의 문도 따라서 열린다.
겨우내 바람을 막아 줬던 문풍지를 떼어냈다. 방문을 떼어 문창호지도 다시 발랐다. 밀가루 풀을 쒀서 문창호지에 바른 다음 방비로 썩썩 문질러 붙였다. 옷을 갈아입은 방문을 햇볕이 잘 드는 마루 카지노 게임 일렬로 세워 놓았다.
봄볕을 받는 방문이 눈이 부셨다.
아직은 농사일이 그리 바빠지는 시기는 아니었다. 할 일 없는 청년들이 산으로 향했다. 이맘때는 칡이 물이 오를 때다. 어디 칡뿐이겠는가. 온갖 산천초목이 물이 오르는 시기이다. 겨우내 잠들어 있던 카지노 게임들이 물이 올라 대궁의 색깔이 변하고 있었다.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결이 달라지고 있었다.
건조하지만 카지노 게임가 뿜어내는 숨결이 느껴진다. 지난해 떨어진 나뭇잎들이 바닥을 덮고 있었고 그 밑으론 새싹들이 고개를 들고 있을 터였다. 산이 허리를 펴고 기지개를 켜며 몸을 뒤 틀고 있을 것이다.
곧 산에는 온갖 꽃들이 피어날 것이고 카지노 게임들이 저마다의 색깔로 잎을 피워 올릴 것이다. 카지노 게임는 꽃이 피거나 잎이 나와야 이름을 알 수 있다. 옷을 벗고 서 있는 카지노 게임들은 멀리서 보면 누가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
피어나는 꽃과 잎의 모양과 색깔로 산벚카지노 게임 이은 지 개복숭아 카지노 게임인지, 때죽카지노 게임인지, 굴참카지노 게임인지, 참카지노 게임, 떡갈카지노 게임, 생강카지노 게임, 화살카지노 게임, 미루카지노 게임인지 멀리서 봐도 알 수 있다.
카지노 게임들은 흔들리는 모양새도 저마다 다르다. 바람을 거슬러 흔들리는 카지노 게임가 있는가 하면 바람에 온몸을 맡기는 카지노 게임도 있다. 어쩌면 사람의 삶과 카지노 게임의 삶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괭이와 삽과 톱을 챙겨 들고 산등성이에 오른 청년들이 마른 칡의 줄기를 찾아내 땅을 팠다. 양지바른 곳의 땅은 한껏 부풀어 있었다. 괭이를 들어 땅을 찍어 내리면 쉽게 속살을 드러냈다. 삽과 괭이로 칡의 줄기를 따라 둘레를 파며 땅 속으로 내려간다.
흙의 구수한 냄새가 느껴지고, 구부린 등에서 땀이 배어 나올 때쯤이면 칡은 뿌리의 끝을 보여준다. 온전한 뿌리를 들어 올리며 청년들은 월척이라도 건진 양 환호했다.
칡도 암수가 구별되어 있다. 암칡이라야 달다. 수칡은 뿌리가 가늘고 길게 뻗었고 암칡은 허리가 불룩하고 길이가 짧은 편이다. 수칡은 물기도 적었고 달지 않았다. 암칡을 캐서 톱으로 자르면 물기가 배어 나왔다. 봄이 되면서 한껏 물이 오른 탓이다.
껍질을 손톱으로 돌려 깐 뒤 결대로 쭉쭉 찢어서 입에 넣고 씹으면 달고 쌉쌀한 맛이 났다. 질근질근 씹다가 단물이 다 빠지면, 퉤, 하고 뱉었다. 이맘때의 칡은 훌륭한 간식이기도 했다.
개울가엔 버들강아지가 만개하고 있었다. 경칩이 지나면서 개울물은 이미 얼음이 걷히고 돌 틈을 지나며 반짝이고 있었다. 소리가 맑고 씩씩했다. 아직은 차가운 개울물에 손을 담가 땀을 씻고 캐논 칡을 씻었다.
개울가 주변에 흐드러진 버들강아지를 꺾어서 살살 문지르고 잡아당기면 껍질이 벗겨졌다. 물오른 버드카지노 게임는 쉽게 속살을 드러냈다. 벗긴 버드카지노 게임의 껍질의 한쪽을 입으로 잘 다듬은 뒤 입으로 불면 피리 소리가 났다.
버들피리였다.
그때는 누구나 버들피리를 만들 줄 알았고 입으로 불 줄도 알았다. 버들피리를 입에 대고 불면, 뿌우 삘리리, 하는 소리가 났다.
개울가 돌 틈 어디선카지노 게임서, 막 잠이 깬 개구리가 놀란 눈을 뜨고 숨어 있을 터였다.
학교에서 돌아온 언니들은 웃자란 보리밭도 밟고 어린 동생들도 돌보고 엄마를 대신해서 밥도 하고 빨래도 했다. 그때는 일고여덟의 형제들이 제일 큰 순서에 의해 밑의 동생들을 건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그 많은 아이들을 낳아서 키울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정부에서 돌봐주는 시스템이 없었을 때였다.
‘아이는 낳아 놓으면 저절로 자란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소에게 여물을 주고, 여름에 소를 끌고 풀밭으로 나가는 것은 오빠들이 할 일이었다.
중학교에 다니는 오빠들은 산에서 나뭇짐을 지게에 지고 내려오기도 했다. 그때는 집안일에 애어른 할 것이 없었다. 모두가 함께 도왔다.
엄마를 따라서 오후에 동네에 내려가면 학교에서 돌아온 금자가 내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공책에 삐뚤빼뚤하게 써 놓은 한글과 숫자를 내어놓으며 숙제를 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보내준다는 학교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교에 보내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엄마가 부엌에 가면 부엌으로, 안방에 가면 안방으로, 심지어는 엄마가 화장실에 가면 문 앞에서 볼일을 다 볼 때까지 붙어 서서 울고 있기도 했다. 눈을 뜨면서부터 잠들 때까지 쉬지 않고 떼를 썼다. 밥도 먹지 않았다.
며칠 후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학교에 가게 됐다. 가슴에 코수건을 달고 가방을 메고서였다. 입학식이 끝난 지는 벌써 이십 여일이 지난 후였다.
그때 나는 일곱 살이었기에 학교에 갈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고 취학 통지서가 나오지 않았다. 학교에 다니면서 입학서류를 뒤늦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