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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hye Grace Lee Apr 28. 2025

5-3. 카지노 게임 사람답게 대하는 일

클라이언트가 아니라, ‘한 카지노 게임’으로 대할 때 관계는 비로소 시작된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다 보면 종종 ‘클라이언트’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게 된다. 실무에서는 꼭 필요한 명칭이고, 행정과 기록에서도 빠질 수 없는 표현이다.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단어에 낯섦을 느끼기 시작했다. ‘클라이언트’라는 말이 마치 누군가를 특정한 틀에 넣고 바라보게 만든다는 것을, 그 안에는 ‘서비스 제공자’와 ‘수혜자’라는 선명한 구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나는 업무기록파일에 익숙하게 ‘클라이언트’라고 적었다. 그런데 그 카지노 게임과 마주 앉은 순간, 나는 어떤 말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그는 단지 한 카지노 게임으로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이름이 있었고, 지난 시간이 있었고, 복잡한 감정과 설명되지 않는 침묵을 가진 카지노 게임이었다. 그를 다시 ‘클라이언트’라고 부르려는 마음이, 그 순간 왠지 무례하게 느껴졌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의 관계를 두 가지로 구분했다. ‘나와 그것’의 관계와 ‘나와 너’의 관계. ‘나와 그것’은 대상화된 관계이고, 기능적이며, 일방적인 구조다. 반면 ‘나와 너’는 존재가 존재로 응답하는 만남이다. 사회복지의 실천이 진정한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관계의 형태가 ‘나와 너’가 되어야 한다. 그 카지노 게임을 문제의 집합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삶’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인간은 사회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했다. 그러나 그 사회는 인간을 수단화하거나 계량화하는 구조로 움직이기 쉽다. 복지 체계에서도 우리는 종종 ‘대상자’를 숫자로, 통계로, 예산 항목으로 분류하게 된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그 이상이다. 카지노 게임을 카지노 게임답게 대한다는 것은, 그 카지노 게임이 처한 사회적 조건을 넘어서, 한 존재의 서사를 듣고, 감정을 이해하고, 존재의 깊이를 존중하는 일이다.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은 ‘각자의 삶은 그 자체로 서사적 정당성을 지닌다’고 했다. 누구의 삶도 다른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폄하되거나 간소화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이 말을 마음속에 오래 품었다. 내가 만나는 카지노 게임들의 삶도, 그 자체로 하나의 세 이고, 고유한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대상자’의 언어로 가두는 순간, 나는 이미 그 카지노 게임의 일부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기억나는 한 어르신이 있다. 치매 초기로 진단되었고, 가족과도 단절되어 있었다. 서류상으로는 ‘사회적 고립’이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지만, 그분이 꺼내는 말 한 마디 한 마디 속에는 그 문장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이 있었다. 전쟁을 겪고, 가족을 떠나 보내고, 혼자 살아낸 긴 시간...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업무 기록지 대신, 조용히 그분의 말을 받아 적고 싶었다. 그 순간, 나는 업무 ‘대상자’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카지노 게임’을 만나고 있었다.


카지노 게임을 카지노 게임답게 대한다는 것은, 그 카지노 게임의 상태보다 사연을, 필요보다 감정을 먼저 듣는 일이다. 그 카지노 게임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묻기 전에, 그 카지노 게임이 지금 어떤 마음인지 먼저 물어보는 것이다. 그것은 더 많은 시간이 들고, 더 많은 인내가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관계는 오래간다. 관계의 중심이 ‘문제 해결’이 아니라 ‘존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는 변화를 강요하지 않아도, 치유는 조용히 시작된다.


나는 이제 다시 기록지를 작성할 때면, 그 카지노 게임의 이름을 더 오래 들여다본다. 단순한 한 명의 클라이언트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서 그 카지노 게임을 마음에 새긴다. 그리고 다짐한다. 내가 마주하는 모든 카지노 게임을, 숫자나 진단이 아닌 '이름'으로 기억하겠다고. 카지노 게임을 카지노 게임답게 대하는 일. 그것은 사회복지의 시작이자, 끝까지 지켜야 할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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