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쿠폰하게 살아라. 인간은 다 죽는다.”
니체의 어록이란다. 철학과 출신이지만, 니체 사상을 배운 적이 없다. 학부시절 때보다 오히려 졸업하고 더 친숙해진 철학자다. 대한민국에서 마흔살을 마주하신 분들이 줄곧 니체를 찾고 있었고, 가끔 명언 한 문장을 포스팅하는 게시글에서도 자주 모습을 보인다. 연차를 쓰고 집에서 빈둥빈둥 쉬고 있는 지금도 ‘명랑’하게 살라고 조언 해주기까지. 맞는 말이다. 요즘 부쩍 필요한 단어긴 했다. 명랑함을 품은 눈동자를 갖고 있다고 자각을 한 지는 오래 전. 몇 안 되는 명랑함을 잃지 않기 위해 뜬금없게도 목요일에 연차를 써버렸다. 다음주 월요일은 대체 휴일이라서 금요일에 연차를 쓴다면 푸욱 쉴 수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멈추고 싶었고, 그래야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금요일의 희생 덕분에 오늘만큼은 명랑할 수 있었다. 아침 9시에 리듬을 탈 수 있었다. 최근에 겟한 켄드릭 라마 ‘GNX’ 바이닐을 LP판에 넣고 스피커 볼륨을 평소 듣던 게이지보다 두 단계 올렸다. 무슨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니체 선생님도 이 모습을 보시면 분명 흡족해 하실 만큼 오늘은 명랑하게 보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우리는 혈관 속에 리듬감을 품고 있다. 떨리는 심장 소리 뿐만 아니라, 음악을 들으면 움찔할 수 있는 감정과 퇴근시간이 되면 엉덩이가 들썩거린 적 있는 사람이라면 리듬을 내재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아무리 숨을 멈추어도 요동치는 심장 박동 소리는 감출 수 없다. 오히려 더 커질 뿐이다. 하지만 몸속의 리듬감 만큼은 스피커 볼륨처럼 조절할 수 있다. 어릴 때는 항상 볼륨이 맥스였다. 소소한 웃음거리에 몸서리 칠만큼 기뻐했고 슬프지 않은 슬픔도 땅이 꺼져라 울었다. 감정에 이성이 지배된 것이고 그만큼 투명했었다. 지금은 그럴 순 없다. 적어도 친한 친구 앞에선 눈치 보지 않고 맘껏 드러낼 순 있지만 사회에서 만난 분들과 있을 땐 ‘나는 솔로’ 24기 영식처럼 감정에 솔직해지긴 쉽지 않다. 문득 내가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상대가 표정을 읽기도 전에 친절히 나만의 감정을 전해주는 사람이었다면, 내 속 만큼은 근심 걱정 하나도 없으니 명랑함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흠… 잘 모르겠다. 고요한 지하철에서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을 낀 채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이 왜 연상 되고 있는가. 사실 직장에서까지 명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게 크다. 그저 평온하게, 쌓여 있는 메일을 하나하나 해치우며 퇴근만을 바라보고 있다. 퇴근시간이 다가올수록 내면의 리듬감은 서서히 예열 되고 있다. 그 두근거림이 없다면 어떤 재미로 회사를 다니겠는가. 다시 혀를 끌끌 차시는 니체 선생님… “죄송합니다. 아직은 명랑할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