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는 스타벅스가 무려 네 개다. 도곡역 쪽에 둘, 대치역 쪽에 둘. 동네가 넓은 것도 아니다. 네 매장을 한번씩 다 들러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도 30분이면 충분하다.
이 구역에 이토록 스타벅스가 많은 까닭은 학생들이 많아서다. 카공족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제일 싼 음료 하나 시켜놓고 하루종일 죽치는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매출에는 마이너스고 카페주인들이 어떻게든 카공족을 몰아내고 싶어 온갖 아이디어를 내는 판에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그건 대학생들 혹은 취준생들 이야기다. 우리 동네 카공족들은 주로 중고등학생들이다. 이 아이들은 대학생 카공족 처럼 오래 있지 않는다. 학원 시간이 정해져 있기때문이다. 또 엄카, 아카 가지고 다니는 학생들이라 돈을 아껴야한다는 마음도 없어 칼로리 폭탄 같은 비싼 음료들을 잘 시킨다.
그런데 도곡역쪽 스타벅스와 대치역쪽 스타벅스가 묘하게 분위기가 다르다. 도곡역 쪽은 사교육 업쟈들이 대치역 쪽은 학생과 학부모가 주로 이용하는 느낌이다. 그래야 한다는 법칙은 없지만 그냥 느낌이 그렇다.어쨌든 이 동네에서 아침마다 스타벅스에 가면 카페 하면 떠오르는 잠깐의 여유, 바쁜 현대인에게 허락된 조그마한 자유와 감성의 시간 이런것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모두들 결사적으로 혹은 적어도 결사적으로 보이려는 모습으로 문제집이나 학원 교재를 들이파고들 있으니 말이다.
방금도 카페 문이 열리며 엄청난 사이즈의 가방을 매고 오른쪽 옆구리에는 교재묶음을 낀 학생이그나마자유롭게 쓸 수 있는 왼팔과 어깨로 힘겹게 문을 열고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옆구리에 끼고 있는 학원 교재 표지에는 이런 문장이 찍혀 있다.
He laughs best who laughs last.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입시생들에게 개나 소나 귀에 심어주는 바로 그 말, "최후에 카지노 게임 추천자가 가장 크게 카지노 게임 추천다."는 말의 영어 원문이다.
오늘따라 이 말이 자꾸 눈에 박힌다. 먼저 best라는 말이 계속 어른거린다. 우리는 이 말을 너무 당연하게 "크게 카지노 게임 추천다"로 번역해서 썼다. 하지만 굳이 옮기자면 이 말은 "가장 잘 카지노 게임 추천다."라야 한다. 그런데 잘 카지노 게임 추천 게 어떻게 카지노 게임 추천 것일까? 더구나 가장 잘 카지노 게임 추천것이라면? 정말로 크게 카지노 게임 추천 것이 잘 카지노 게임 추천 것일까?
가장 큰 웃음이 반드시 가장 좋은 웃음은 아닐 것이다. 불운이 너무 겹쳐 오히려 어이없을때도 큰 소리로 허탈한 웃음을 웃고, 혹은 직장 상사의 썰렁한 농담에 할수 없이 웃어주어야 할때도 큰 소리로 웃음소리의 의성어를 발음해가며 웃는다. 반면 가장 행복한 순간, 나의 내면에서 무한한 기쁨이 솟아오르는 순간에 큰 소리로 웃었던 기억은 별로 없다. 그때는 나도 모르게 뺨을 적시는 미소를 지었다.
이걸 "가장 오래 웃는다." 로 번역한 경우도 보인다. 하지만 이것도 이상하다. 웃음의 양으로 웃음의 질을 평가할 수는 없다. 사실 오래 웃으면 오히려 숨찬다. 흔히 숨넘어간다 이런말도 쓰지 않는가? 오래 웃는 것은 오히려 크게 웃는 것 보다 가장 잘 웃는 것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웃음이란 대체 뭘까? 웃음 자체가 아니라 그 웃음을 일으키는 정서가 열쇠일 것이다. 아주 작거나 짧은 웃음이라도 좋은 정서 상태에서 나오는 웃음은 좋은 웃음이고, 아주 크거나 오래 웃더라도 별로 좋지 않은 정사 상태에서 나오는 웃음이라면 나쁜 웃음이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정서 상태란 무엇일까? 모두가 다 아는 단어다. 바로 행복이다. 행복할 때 웃는 웃음, 행복감이 밀려나오며 저절로 드러나는 웃음, 그게 가장 좋은 웃음이다.
하지만 입시생들에게 강요되는 저 격언의 의미가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 뜻은 누가 봐도 이거다.
지금 웃을 일을 참아라. 입시에 승자가 되면 그때 크게 웃어라
물론 경쟁에서 승리하면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살아가며 승리의 순간이 과연 한 번 뿐일까? 그리고 입시경쟁이 가장 마지막 경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인생이 경쟁으로만 점철될 것일까? 경쟁에서의 승리가 다른 무엇보다도 행복감을 더 고양시킨다고 할 수 있을까?
이건 누구도 알 수 없다. 인생을 다 살아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건강관리 특별히 안하고도 80대를 넘겨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소 철저히 건강관리 하는데도 60 아니, 40이 되기전에 급서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승리를 위해 다투는 경쟁이었다면, 나는 그 인생이 그리 행복한 엔딩일 것 같지 않다.
불확실한 세상. 불확실한 인생.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삶의 마지막이 웃음, 그것도 가장 좋은 웃음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마지막에 가장 좋게(혹은 크게) 웃기 위해 계속 웃음을 미뤄 두었다간 영영 웃지 못하고 삶의 마지막을 맞이할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크게 웃지 않으려 한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크게 웃는 사람이 너무 많다. 나는 한국 기준으로는 웃음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작은 웃음을 웃는다. 그 때문에 때로는 츤데레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웃음을 잘게 나누어 찰라마다 웃어보려 한다.
입시 스타일로 말해 본다면 내 평생의 정서를 미분했을때 모든 X값에서 양수였으면 한다. 마지막 멱함수를 기대하며 드러누운 그래프를 그리고 싶지 않다. 굳이 마지막 문장을 이따위 현학적인 문장으로 쓰면서도 나는 살짝 카지노 게임 추천다. 이런 말을 모르는 삶보다는 아는 삶이 조금은 더 나은 삶이구나 하며 말이다. 이렇게 계속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