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The Moment I Chose to Quit
한 문장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연인과 헤어지기로 결심한 이유,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순간, 오래된 친구와 친해진 계기 같은 것들. 애정을 담아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했던 회사를 그만두는 카지노 게임도 한두 문장으로 명쾌하게 정리하기는 참 어렵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매번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늘 시작보다 마지막이 어려웠다. 몇 년 전 김지수 작가님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책을 읽고 블로그에 남겼던 기록만 봐도 내가 얼마나 이별에 취약한지(그리고 얼마나 극단적인 F인지-) 알 수 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와 함께했던 내 삶 속의 장면들은 대체로 슬펐다. 행복했던 여행의 마지막 날, 전학 가기 전 마지막 등굣길, 돌아가시기 전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통화. 알프레드 디 수자의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이라는 유명한 시구가 주는 메시지에 따라 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면, 아마도 눈물이 마를 날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카지노 게임.
그래서 이 책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슬픔으로 다가왔다. 책장을 넘기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니.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주인공이나 작가에게 과몰입해버리는 독자 중 하나인 나는 두려운 카지노 게임에 지인들의 추천에도 이 책에 선뜻 도전하지 못했다.’
- [이어령의 카지노 게임 수업]을 읽고 남긴 기록 中, 2022.09.28. -
T이신 분들은 이미 여기에서부터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내가 좀 그런 편이다. 기쁨과 슬픔과 분노를 비롯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들을 아주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다(좋은 건진 모르겠지만). 그러니 온전히 나의 의지로, 일과 삶을 가르쳐 준 학교이자 따스한 가족과도 같았던 첫 회사와 헤어지는 일은 정말이지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회사의 미션이 개인적인 삶의 비전과도 잘 맞고 존경할 수 있는 멋진 동료분들이 많은 비즈니스 컨설팅/투자 회사에 운 좋게 입사해 누구보다 신나게, 재미있게 일했다. 어찌나 일을 좋아했던지, 블로그에 남긴 일과 회사에 대한 기록만 80개가 넘는 데다 내가 올린 블로그 글이나 유튜브 영상을 보고 회사에 입사했다는 동료들이 많아 이정도면 홍보 수당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도 꽤 들었을 정도다. 카지노 게임큼 정말 열성을 다했고, 사내 최연소 팀장으로 승진도 해보고 외부 강연도 다니며 어느 정도 인정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퇴사를 결심한 이유는 일이 싫어서도, 사람이 미워서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일도 익숙해져 이전만큼 어렵지 않았고, 관계가 힘들었던 시기도 이미 지나서 모든 게 편안했다.
그렇지만 아직은 적당히 안주하고 싶지가 않았다. 여전히 더 부딪히고, 더 배우고, 더 경험하고 싶었다. 기업들 대상으로 비즈니스 멘토링을 하거나 강의, 심사를 하면서는 내가 직접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고 팔아본 적도 없으면서 점점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가끔 팀원들에게 업무를 가이드하고 자료를 검토하며 피드백만 하다 퇴근하는 날에는 ‘아직 나도 모르는 게 많은데.. 나는 과연 성장하고 있는 걸까-’하는 생각이 스스로를 괴롭혔다.
결정하기까지의 시간이 짧지는 않았다. 확신이 생길 때까지 나름대로 치열하게 고민했고, 앞으로 무엇을 더 배우고 경험하고 싶은지를 막연하게나마 깨달았을 때 퇴사를 결정했다. 어느 순간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담은 책들만 찾아 읽는 나를 보면서, 무의식중에 보는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계속 같은 메시지의 영상들을 추천해 주는 것을 보면서, 내가 가고 싶은 길은 마음 깊은 곳의 두려움을 깨고 일단 한국이라는 안전한 울타리를 넘어야 걸어가 볼 수 있음을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직급과 연봉이 높아지고 이곳에 더 익숙해지면 쥐고 있는 것들을 놓고 무모한 도전을 하기가 더욱 두려워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의 우려를 안고, 구체적인 다음 스텝이 정해지지 않았음에도, 맡고 있던 4개의 프로젝트가 동시에 끝나는 최고의 퇴사 시기에 맞춰(보통 프로젝트들의 시기가 다 달라서 이런 날이 잘 오지 않는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른 시점에 퇴사를 하기로 했다.
제주에 사는 친한 친구들이 운영하는 식당에 혼자 앉아서 동료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메일을 몇 번이나 지웠다 다시 썼다. 감정은 복잡한데 최대한 담백하게 쓰려다 보니 눈물이 많이 났다. 몇 년간 거의 동고동락하며 함께했던 제주 지사 동료들이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준비해 줬을 때도, 제주를 떠나 본가가 있는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동료가 만들어준 ‘To.롤라’ 플레이리스트를 들을 때도, 서울 본사 동료들과 밥 또는 커피를 함께 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도- 계속 울었다. 이렇게까지? 싶기도 했지만 눈물이 나오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실연당한 사람처럼 며칠을 실컷 울며 그토록 어려워하는 또 한 번의 카지노 게임을 겪어냈다. 늘 시작보다 카지노 게임이 더 어려웠으니, 곧 맞이할 새로운 시작은 조금 더 쉽지 않을까- 위로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