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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철학에서 묻다 Apr 22. 2025

나는 생각카지노 쿠폰’는 틀렸다:
하이데거의 반란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1) 서론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데카르트와 칸트 그리고 헤겔로 이어지는 근대철학과 주체철학의 종말을 알리는 시작점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언명을 한 이후에, “나는 생각한다.”가 인간 존재자의 존재를 정의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나는 생각한다” 이전에 “나는 존재한다”에 대한 논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당시 철학계를 지배하던 주체철학에 큰 비판을 가했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후에 푸코, 데리다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론 철학을 펼치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철학은 실존철학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자신의 실존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사람들이 그의 철학을 모든 학문의 기본이 되는 존재론으로 봐주기를 바랐다. <그에게 실존이란, 인간이 가진 본질적 특성이자 그의 존재론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사태 그 자체로”를 외치는 그의 철학은 가장 인간답고 실존적이다. 인간이 아무 의미 없이 세상에 내던져졌기에 실존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가 현상학이라는 방법론을 채택한 순간 그의 철학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존재와 시간”이 인간에 대한 무한한 믿음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후대, 구조주의 학자들이 인간의 의식은 구조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다는 사상의 뿌리가 되고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그리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다. 이것이 그의 책 전체에 녹아있는 하이데거의 믿음이자, 인류에 대한 선물이다. 그렇다면, 우리 같이 하이데거가 준 선물을 펼쳐보도록 하자.


(2) 존재는 왜 망각되었는가?

하이데거에 따르면, 서양 철학사는 존재 망각의 역사였다고 한다. 서양 철학은 존재를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자, 정의될 수 없는 것이며 그리고 당연하고 자명한 개념으로 간주했다. 이는 이해할만하다. 인간은 무언가를 보면 그것의 존재를 파악한다. 인간이 보고 느끼고 인식하는 모든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는 우리에게 가장 가깝게 느껴진다. 그리고 존재란, 그 정의상 존재자를 동반하기 때문에 존재자를 통해서 존재를 파악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는 서양철학이 존재 자체에 대한 논의를 중단하고, 존재자를 어떻게 인식하는 가에 초점을 맞추도록 강요했다. 존재를 존재자로 인해 접근할 수 있기에 존재자에 대한 인식이 철학의 본질이라고 여겼다. 이에 서양철학사는 관념론과 실재론 그리고 칸트로 인해 통합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인식론 발달의 길을 걸었다.


그렇다면, 존재에 대한 논의는 왜 중요한가? 이는 서양철학사에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첫째, 철학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지식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면, 존재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어떤 사실에 대해 막연히 안다고 주장해도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명함과 보편성이란, 지식을 추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지식을 찾는 질문을 제기해야 할 이유다.


둘째, 존재자가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존재자를 규정한다. 철학은 예로부터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었다. 하지만, 후설로부터 시작된 당대의 문학에 대한 문제의식 즉 모든 학문을 하나로 이어 줄 뿌리가 없다는 것에 대해 존재론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수학, 과학, 심리학등 모든 학문은 인간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이런 학문들의 기본 뿌리가 없기에 학문 간의 교류 및 발달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여기에 존재론이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면 모든 학문의 뿌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단단한 뿌리는 이런 학문들이 더욱 크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셋째,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이 본질이 없기 때문에 실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떠한 방법으로 인간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왜 인간은 다양한 가능성중에 자신의 실존을 선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인간이 더 나아가는 것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실존적 삶이란, 두려운 삶이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확실성과 지식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론은 인간이 본질적 삶으로 나아가는데 큰 토대가 될 수 있다.


(3) 하이데거의 방법론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쓰면서 현상학, 해체 그리고 현존재 분석이라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먼저, 하이데거는 자신의 스승 후설의 현상학이 존재론에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존재론이란, 존재자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를 드러내는지를 탐구하는 철학이다. 특정 객체는 언제나 자신의 본질을 곧바로 드러내지 않는다. 때로는 은폐되거나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객체의 특성이자 인간 인식능력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조차도 객체의 본질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결국 객체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진다. 인간이 자신의 본질로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모든 객체 또한 자신의 본질에 가깝게 다가가기를 원한다. 존재 또한 마찬가지다. 따라서, 존재의미와 방법을 밝히기 위해서 하이데거는 후설의 현상학을 채택했다. 현상학이란, “사태 그 자체로” 특정 객체를 파악하려는 방법론이다.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사태 그 자체”를 분석했을 때, 우리는 존재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하이데거는 믿었고, 이는 “존재와 시간”에 잘 드러나 있다.


둘째, 해체는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라는 철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그의 방법론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이해가 지식의 지평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정 사건 혹은 객체에 대한 과거의 지식이 지금의 이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과거의 거인들이 만들어 놓은 인류의 지식 지평을 파악하고 지평 안으로 들어가 해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그리고 헤겔 등의 존재와 시간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해체하고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가 어떻게 존재망각의 역사를 촉발했는지 그리고 데카르트가 소피아 학파의 길을 따랐는지를 보여주면서 우리의 지평에 사정없는 공격을 가한다. 이는 하이데거가 존재 자체를 “사태 그 자체”로 파악하려고 했던 것처럼, 인간의 이해와 지식의 지평을 “사태 그 자체”로 파악하려고 했기에 가능했던 방법이다.


셋째, 세상에는 다양한 존재자가 존재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의 존재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존재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되는 존재자를 찾아야 하는데 하이데거는 인간 즉 현존재를 존재 분석의 시작으로 삼았다. 하이데거가 현존재를 존재 분석의 시작으로 삼은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의미를 묻고 그에 따라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인간만이 자신의 본능에 대항하고 의미에 따라 살아간다. 동물들은 의미보다는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 꿀벌은 꽃에서 꿀을 채취할 때, 꽃에 얼마만큼의 꿀이 남아 있는지를 신경 쓰지 않는다. 단순히 자신의 본능이 명령한 만큼의 꿀만 채취하고 자신의 집으로 날아간다. 하지만, 인간은 남은 꿀을 어떻게 사용할지, 꿀이 모자라다면 꿀의 양을 어떻게 늘릴지 혹은 지금 꿀을 먹지 않고 저장한다면 미래에 어떠한 성과로 돌아올지 등을 파악하고 행동한다. 의미는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갖고 행동하는 현존재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현상학, 해체, 현존재 분석이라는 세 가지 방법을 통해 망각되었던 존재에 대한 사유의 길을 열여 밝혔다.


(4) 현존재와 세계-내-존재

하이데거는 인간, 즉 현존재를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로 규정한다. 이는 단순히 세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 방식을 뜻한다. 보통 우리는 인간이 어떤 물체를 인식하고 그 물체의 쓰임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전통적인 인식론의 시선일 뿐만 아니라, 보통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선이다. 이를 우리는 주체철학이라고 한다. 인간 즉 주체가 세상에 있는 다른 존재자인 객체를 인식하고 인식된 객체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생각이다. 하이데거는 도구적 존재자, 적소성, 유의미성 그리고 기호 등을 통해 객체 철학을 부정한다.


인간이 세계-내-존재라는 것, 그리고 인간은 세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행동이 세계에 의해 어느 정도 결정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망치를 도구로 사용한다. 하지만, 망치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못이라는 짝이 있어야만 존재한다. 인간은 망치와 못을 보고 망치는 못을 치는 용도로 인식한다. 망치가 못을 치는 용도로 쓰이는 것을 우리는 적소성이라고 한다. 도구가 다른 도구를 지시하는 것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망치와 못은 튼튼한 집을 지시한다. 튼튼한 집은 집안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의 행동을 지시한다. 기호 또한 세계의 존재를 증명한다. 자동차의 깜빡이는 인간의 행동을 지시한다.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오는 자동차를 보면 우리는 반대쪽으로 피한다. 기호의 의미를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세상이 의미 부여한 기호를 우리가 따르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도구는 세계에 적절한 위치와 목적을 가지고 있고 이를 유의미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궁극목적을 세우고 이에 맞게 도구의 유의미성을 결정한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것처럼 인간은 세계-내-존재이다. 또한 인간은 공동존재이기도 하다. 공동존재란, 서로서로가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주체적으로 나만의 궁극목적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살고 있는 대다수 즉 세인(보통사람)들의 영향을 받는다. 인간은 아무 이유 없이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다. 따라서, 인간은 아무 목적 없이 덩그러니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의미가 결정된 세상에 던져졌기 때문에, 스스로 가능성을 찾기보다는 타인의 기준에 따라 궁극목적을 결정한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해, 좋은 가족을 가져야 해, 사회에서 성공해야 해 등등은 세계가 이미 만들어놓은 기준이다. 따라서, 세계-내-존재인 현존재는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적으로 가장 가깝게 있지만, 존재론적으로 가장 멀게 있다. 인간이란 존재자는 존재에 가장가 깝게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존재자는 인간 존재의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재론적 즉 본질적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는 존재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시간과 공간도 세계-내-존재에 의해 결정된 유의미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공간이란, 데카르트의 말처럼 단순히 연장이 머무는 장소가 아니다. 현존재에게 공간은 단순히 도구가 위치하는 공간이 아니라, 도구에 의미를 부여한다. 공간은 멀고 가까움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도구가 위치한 공간의 멀고 가까움은, 도구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우선순위와 그 도구의 유용성에 연관해서 멀고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지금 당장 망치를 써야 하는 목수의 입장에서 망치는 손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톱을 써야 하는 목수의 입장에서 망치는 창고에 위치해야 하고 톱은 손안에 위치해야 한다. 이처럼, 공간은 절대적인 위치로 파악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공간을 물리적 배치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거기에 있음의 배경이다. 그리고 인간 실존이 펼쳐지는 장이다.


(5) 심경, 이해, 해석 그리고 진리

하이데거는 인간, 즉 현존재의 존재 방식을 “사태 그 자체”로 드러나는 방식 속에서 파악하려고 한다. 이에 그는 인간이 기분을 느낀다는 것이 현존재가 세계-내-존재임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항상 어떠한 기분을 느낀다. 인간이 기분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이 행복한 일에 처하면 행복한 기분을 느끼고, 인간이 불행한 일을 당하면 불행한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기분은 인간의 심경의 단편만을 보여줄 뿐이다. 인간은 항상 어떤 기분 속에 놓여있다. 특정 상황에서 변화하는 기분은 일시적인 정서일 뿐이다. 보다 근원적인 심경 즉 끊임없이 이어지는 기분은 인간 존재의 바탕을 이룬다. 그렇다면, 인간이 지속적으로 특정한 기분에 쌓여있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세계가 세계-내-존재인 현존재에게 다가오는 방식이다. 인간은 항상 세계에 대면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어떠한 기분에 쌓여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대면하는 세계가 행복함을 줄 때는 행복한 기분, 세계 자체가 공포스러울 때는 공포를 느낀다. 만약, 인간이 세계-내-존재가 아니라 홀로 있는 존재라면, 심경은 지속적이지 않고 일시적이어야 한다.


인간은 세계-내-존재로 만들어진 세계에 내던져있다. 이 말은 인간은 이미 의미가 주어진 세계의 구성요소에 둘러싸여 있음을 말한다. 위에서 나는 이미, 도구적 존재와 적소성 그리고 유의미성을 통해서 세계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미 의미 지어진 구성요소에 던져져 있기에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는 방법은 이해다. 이해는 세계의 구성요소를 인식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해란, 특정한 사물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으로 예지, 예시, 여파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우리는 이해의 지평이라고 부른다. 이해는 과거의 경험(예지) 현재의 인식(예시) 그리고 미래의 실천 가능성(예파)으로 구성된다. <가령, 인간이 망치라는 구성요소를 보면서(예시) 과거에 경험으로 망치의 쓸모를 파악하고(예지) 그 망치로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는가(예파)의 형태로 이해한다. 만약, 집에 도둑이 들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인간은 주변에 날카로운 칼을 본다(예시). 그리고 칼이 누군가를 다치게 했거나 혹은 영화에서 칼을 들고 싸우는 장면에 대한 배경지식으로 칼의 쓸모를 파악한다.(예지) 마지막으로 인간은 칼을 이용해서 도둑과 싸워 자기를 지킬 수 있다는 미래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예파) 이처럼, 인간의 이해는 과거-현재-미래로 이루어져 있고, 이는 하이데거가 인간의 존재는 시간성이라고 말한 것의 기반이 된다.(이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이해가 인간이 세계에 주어진 구성요소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법이라면, 해석을 통해서 주어진 의미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창조한다. 우리는 망치와 옷이라는 도구적 존재를 통해서 세계 구성요소에 대해 파악했다. 이를 하이데거는 손안에 존재라고 한다. 손안에 존재란, 이미 주어진 의미체계에 따라, 구성요소를 손안에 두고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체계가 아무런 문제 없이 작동할 때, 인간은 이해로 세상을 파악한다. 하지만, 망치가 부러지거나 혹은 너무 가벼워 자기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인간의 손 안의 존재를 눈앞의 존재로 치환하고 해석을 하기 시작한다. 망치가 너무 가볍다면, 어떻게 더 무겁게 할 수 있을까? 망치의 머리로 쓰고 있는 물체가 적절하지 않다면, 어떤 물체로 바꾸어야 할까? 이처럼, 해석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도구적 존재를 발견한다.


심경과 이해 그리고 해석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 3가지 요소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진리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서양 철학은 진리를 인식과 사물의 일치로 보았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러한 고대의 철학이 진리에 대해 잘못된 선입견을 심어놨다고 비판한다. 하이데거는 진리는 세계-내-존재의 존재가 세계와의 만남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는 은폐되었던 것이 드러나는 계시이며, 더 이상 인식의 일치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세계-내-존재의 존재는 정해지지 않고 각각의 세계에 따라 다른 의미가 부여된다. 또한, 현존재의 이해의 지평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고 해석된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입장에서 진리는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존재자가 세계와의 만남에서 드러나는 방식이다. 그 드러남은 현존재의 심경, 이해 그리고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서는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6) 손안에 존재와 눈앞에 존재 그리고 분업으로 인한 인간 소외

하이데거는 도구적 존재로 손안에 존재와 눈앞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자본주의라는 세계는 현존재를 도구화했다. 모든 인간은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고, 자본가는 다른 현존재를 도구로 취급한다.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도구가 곁에 없을 때 혹은 도구가 자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현존재는 도구 자체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완벽한 도구적 존재로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이 아프거나 혹은 동기가 사라졌을 때, 인간은 도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도구로 사용되는 인간을 눈앞의 존재로 마주하고 인간 본질에 대해 되돌아볼 기회를 준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분업을 통해 현존재가 손 안의 존재로부터 눈앞의 존재로 자각하는 가능성조차 차단한다. 분업이란, 사람들이 가진 특수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치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말한다. 이런 시스템에서 비어있는 자리에 누구나 기계처럼 대체될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현존재는 쉽게 다른 현존재에게 대체되고 이는 모든 사람들이 손 안의 존재로 머물게 된다.


(7) 본질적 삶과 비본질적 삶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공동현존재 이기 때문에 세인 즉 세상사람에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빈말, 호기심, 애매함이 현존재를 비본질적인 삶을 이끄는 요소라고 한다. 빈말은 세인들끼리 하는 말로, 현존재가 존재의 본질을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겉만 파악하는 정도의 이야기다. 그리고 현존재는 존재의 진리보다는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이것도 알고자 하고 저것도 알고자 한다. 그리고 빈말과 호기심이 합쳐져서 현존재는 애매한 상태로 세계를 파악하게 된다.


빈말, 호기심 그리고 애매함은 유튜브의 쇼츠와 인스타 그램에서 쉽게 보인다. 인간은 더 높은 수준의 도파민을 추구하기 위해 숏츠와 같은 짧은 영상을 시청한다. 이는 인간의 호기심은 충족시켜 주지만 인간이 진리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인간이 다양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면서 세계에 대해 이해했다는 잘못된 선입견을 심어준다. 그렇다면, 현존재는 왜 빈말, 호기심에 사로잡혀 애매한 상태로 세상을 파악하는가?


첫째,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동물이다. 인간은 인간의 신체적 특성으로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 의존하는 삶을 산다. 부모님의 관심을 얻지 못하면, 인간의 생존에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고 집단에 포함되고자 하는 습성을 익히게 된다.


둘째, 인간이 본질을 따르고 진리를 얻고자 하는 것은 고행이다. 진리는 항상 은폐되거나 변형되어 나타난다. 주어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의 모습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삶은 개인이 행복을 추구할 시간을 빼앗고 얻을 수 있을지 모르는 가능성을 향해 돌진하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은 확실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불확실하지만 힘든 삶을 선택하지 않으려 한다.


셋째, 인간은 죽음이 찾아오지 않고 먼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교육을 통해 자신이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는 무규정적이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주는 유한성을 무한한 선택이라는 실존이 덮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실현하려고 하고 이는 빈말과 호기심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빈말, 호기심 그리고 애매함으로 인해 비본질적 삶을 살게 된다. 반대로 본질적 삶은 자신의 실존적 삶을 살기 위한 노력 속에 가능해진다. 그것은 고통스럽고 확실치 않지만, 그 안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


<지금까지는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1부에 대한 리뷰였습니다. 다음주 화요일 4월 29일에 2부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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