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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 Hyun Apr 01. 2025

상상화

음악소설집 3

당신을 보내세요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야.”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춘 끝에 덧붙이듯 말했다. 왠지 간곡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전화를 끊기 전에 다른 누군가가 떠올랐다.


이른 오후에 회사에서 나왔다. 2008년의 마지막 남은 연차를 반차로 썼다. 여러 번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 섰을 뿐, 주저 없이 집을 향해 걸었다. 집까지 걸어가려고 했다. 한참을 걷다 방향을 틀어 경마장을 향하는 도로의 인도를 따라 걸었다.

대공원에는 밤안개가 잔뜩 끼어있었다. 바람이 없어서 연무가 머물렀고 온라인 카지노 게임 그것 때문에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도로를 넘어서지 못했다. 보이는 것이 별로 없었다. 는개였다.

겨우 그 길을 넘어서자 주차장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차장이 아주 넓다는 건 눈앞이 걷히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곳을 이리저리 달려보았다. 보이지 않는 곳도 단단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는 만큼 달리고, 또 보이는 만큼 달렸다.

한참을 달리고, 주차장 화단 앞에 앉아 음악을 들었다. 조지 거쉰의 ‘포기와 베스’의 한 곡이 흘러나왔다. ‘I love you Porgy’였다. 키스 재릿(Keith Jarrett)은 한참을 머뭇대다 F음을 시작으로 A, C, E음을 연속해 지그시 눌렀다. 그는, 태어나 소리를 처음 내듯 연주를 시작했다.

달리는 것은 평온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면 다시 달렸다. 몇 번을 반복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까지 하늘은 여전히 깜깜했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긴 시간 샤워를 했다. 샤워를 마치고 몸이 마르기 전에 석 잔의 술을 마셨다. 넉 잔째를 마시다 말고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 잠들기 직전에야 그녀가 나로부터 떠나기를 바랐던 나를 기억해 냈다.


커튼이 걷힌 거실 창으로 쏟아진 해가 눈을 사납게 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서둘러 옷을 꿰어 입고 밖으로 나왔다. 아무런 계획이 없었지만 집에서 멀지 않은 고속철 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퀴퀴한 냄새가 가득한 택시 안에서 머릿속 한쪽이 묵직하게 가라앉는 것만 같은, 몇 개의 기억과 계획들이 마구 혼재되고 그래서 어딘가로 떠나야만 할 것 같은, 가보지 못한 곳이 아니라면 익숙한 곳으로라도 옮겨가야 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을 느꼈다.

서울 외곽의 두 도시 사이 경계 위에 지은 기차역에 닿았다.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던 감정의 실체를 그제야 끄집어냈던 걸까, 역사를 서성이던 온라인 카지노 게임 오랜 연인으로부터 이별을 통보받던 순간 떠올렸던 그 누군가를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줄곧 외우고 있던 대사처럼 온라인 카지노 게임, ‘D역 한 장을 사자’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Y는 불투명한 막을 두른 채 언제부터인가 몸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K가 Y의 죽음을 전해주던 몇 년 전의 그날, 온라인 카지노 게임 곧장 그 죽음을 잊어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라면 몇 달 동안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랬을 것이고, 그렇게 오륙 년이 지나갔다. K와도 연락이 뜸해졌다.

Y는 특정한 때 없이 옅은 비가 갑자기 팔뚝을 적시듯 나타났다.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였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을만하면 나타나고 또 나타나더니 어느 때부터는 나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Y는 왜 자꾸만 나타나 머릿속 한가운데로 영역을 넓혀가는 것일까, 생각하곤 했다.


당신을 보내세요, 열차 좌석 머리받침의 광고문구가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리듬이 느껴지는 그 문구를 세 번쯤 읽다 보니 그럴듯해 보였다. 마지막 읽을 때엔 소리를 내 읽었다.

나를 보내야 할 곳은 어디일까. 내가 바라던 삶? 영위하던 일상? 가족이 있는 곳? 나도 모르게 시작된 생각들이 뒤엉켰다. 차창 밖으로 곱씹던 생각들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에는 눈이 내릴 기세가 전혀 없었는데 출발한 지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땐 폭설이라 해도 좋을 큰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열차는 내부가 하얀 아주 긴 터널을 지온라인 카지노 게임 것처럼 자욱하게 뿌려대는 눈 속을 지치지 않고 달려 나갔다. 차창 안의 조명 때문인지 차창 밖 태양의 빛깔 때문인지, 세상은 노란빛을 띠기 시작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꿈속을 달리는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기차가 따뜻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 온라인 카지노 게임 몽롱해진 시야를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눈이 다시 하얗게 보이기 시작할 때쯤 나는, 어떤 여름의 기억에 사로잡혔다. 하얀 여름, 눈부신 시간들이지만 뚜렷한 기억은 없는 그런 시간들 속으로 고개를 내미는 것만 같았다. 뜨거운 태양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여려졌다, 생이 반짝였다 허름해졌다, 그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 묻는 것도 같았다. 돌아와 다시 시작하지 않을래? 당신을 보내봐. 내가 돌아갈 곳은 어디일까, 지금 내가 나를 보내는 목적지 D시쯤일까, 나는 이정표가 흐릿한 생각들에 다시 사로잡혀 있었다. 객실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사람들은 눈을 껌벅거리면서 책을 읽거나 신문을 읽거나 창밖의 눈을 내다보고 있었다.

D시로 들어가는 고속열차는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과거로 들어가는 속도인 것만 같았다. D시와 가까워질수록 눈은 성겼다. 하기는, D시에 눈이 내리는 날은 아주 드물었다.

D시까지는 두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새로 차려진 역사는 붐볐다. 사람들 속 큼직한 안내표지판을 보고 나서야 나는 D시에 지하철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 옛날 D시의 중심 도로는 수년에 걸쳐 지하철 공사로 혼란스럽고 소란스러웠던 것이 어렴풋 떠올랐다.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지하철은 2호선까지 있었다. 게다가 그들 노선에는 나의 목적지까지 있었다. 2호선 종착역의 전전(前前) 역, 그곳에 Y와 내가 다닌, 혹은 다녔다고 하는 학교가 있었다.


울적하긴 했지만 머릿속은 맑아졌다. 지하철 승강장은 맑아진 머릿속만큼 깊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길고 긴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 전동차에 올랐다. 하지만 몇 정거장 못 가서 곧 명치끝이 답답해져 왔다. 동시에 온라인 카지노 게임 한겨울의 D시가 여기저기 불온할지 모른다는 것을 직감했다. 갑작스레 차려진 상가(喪家)에 뛰어 들어온 것 같은 기분, 온라인 카지노 게임 그런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기억의 교집합

그해 여름, 나는 분명 D시에 있었다. 그해가 아니더라도 신입생이던 봄부터 졸업하던 해 가을까지, 군대를 다녀온 기간을 빼면 나는 온전히 D시에 있었다. 아버지가 홀로 계시는 서울이었지만 방학 동안에도 하루이틀 말고는 올라가 머무른 적이 없었다. 입학이 결정된 후 나는 D시로 이사를 했고 고모네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마지막 학기엔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 시나리오를 쓴답시고 흥청거렸다.

고모네는 학교의 정반대 편, D시의 동쪽 끝에 있었고 학교는 반대쪽 끝에 있었다. 고모네 앞 큰길에서 버스를 타고 D시의 가장 큰 번화가에 내려 다른 버스로 갈아타고 학교에 다녔다. 문득 그때처럼 창밖으로 흘러 지나가는 D시를 보고 싶었다. D시에 내려온 게 꼭 9년 만이었다.

그런 생각이 옅어질 때쯤 D시 지하철 1호선 열차는 고모네가 있는 D시의 동쪽을 지나 D시의 중심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거리에는 식당과 술집, 외국어 학원, 휴대폰 판매점, DVD방, 대형 커피전문점이 아래위로 좌우로 빼곡하게 방비가 철저한 성곽처럼 둘러 서 있었다. 골목 안은 순도라도 높이겠다는 건지 온통 술집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대부분 고깃집들이었다. 인간들이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짐승스럽게 산다는데 학생들은 잠자리도 으르렁대며 가지겠군, 하고 잠깐 짓궂은 생각을 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몹시 허기졌다. 이리저리 살피는데 술을 파는 식당들은 대부분 장사를 시작하지 않았다. 장사를 시작한 집을 찾아 꽤나 서성대다 조명이 밝은 텅 빈 삼겹살집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을씨년스럽게 바람이 불어 대서였는지는 몰라도 기차에서 마신 술은 말끔하지 않았다.

술과 밥을 주문할 때 중년의 승(僧) 하나가 몸을 돌려 식당을 나서고 있었다. 목탁소리에 잔향이 묻어 있었다. 시주는 실패했는지 그의 바랑은 가벼워 보였다. 그 스님이 쓴 검정 뿔테안경 때문이었을까, 온라인 카지노 게임 잔을 들다 말고 K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 애를 썼다. Y의 죽음을 전해주던 날 K가 쓰고 있던 두꺼운 검정 뿔테안경이 또렷이 떠올랐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그만 스님을 주저앉혀 세상 얘기라도 나누고 싶은 심정이 되어버렸다.

바깥은 소스라치게 추웠다. 주문을 확인한 뒤로 식당 주인여자는 주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시선을 돌리다 식당 문 앞에 멈춰 선 스님의 뒷모습을 보았다. 바랑이 펄럭이는 모습이 제법 쓸쓸했다. 그래 보여, 중이 쓸쓸한 건 또 뭐냐, 중얼거렸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소주부터 가져다 한두 잔을 마셨다. 그 사이 주방에서 나온 주인여자가 나를 향해 싱긋 웃고 있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그 저녁 그 식당의 첫 손님이었다.

삼십 분이면 온다던 P는 한참 동안을 오지 않고 있었다. 밖이 어둑해지면서 두 번째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 내가 계산대 앞에 섰을 때 P가 식당으로 들어섰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악수를 하는 도중에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낯설어진 학교 앞 식당에 혼자 앉아 늦은 점심을 무려 두 시간을 넘게 먹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 내가 K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그러므로 Y의 죽음을 알게 된 것도 우연이었다.

K의 전화는 졸업 후 처음이었다. 늦은 밤 회사에서 K의 전화를 받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는 신입사원이었던 온라인 카지노 게임, 공교롭게 D시에서의 대학시절을 떠올리고 있던 참이었다. ‘D시가 아닌 거야?’라고 내가 물었을 때 K는 ‘인천입니다’하고 남자의 말투처럼 대답해 주었다. K를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고 그다음 날인가 다음다음날 회사 옆 맥줏집에서 K를 만났다.

K는 졸업 후 인천의 교대에 편입해 벌써 4학년이었다. 인천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답사여행에 K가 싸왔던 유부초밥 얘기며 수업시간에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져대곤 하던 내 학창 시절 이야기 등을 서로 늘어놓았다. 그러다 말고 K가 갑자기 Y의 이야기를 꺼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Y의 죽음을 전했다.

“죽었어?”

건성으로 듣던 온라인 카지노 게임 별생각 없이 되물었다.

Y의 죽음과 그렇게, 처음 마주했다. Y가 죽었다고 K가 말했을 때, 그저 Y라는 여자의 나이를 계산해 보았을 뿐이었다. 아마도 K와 같은 스물여섯 살쯤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K는, ‘죽었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얘기를 이어나갔다. 설암이었다고 했다. 입 속에 생긴 암이라니, 내가 중얼거리는데 K가 덧붙여 말했다.

“걔가 숨이 넘어갈 때도 선배 얘기를 했어.”

“내가 아는 애야? 이름이 뭐라고?”

온라인 카지노 게임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선배가 Y를 모른다고?”

K도 되물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선배가 Y를 모른다고? 선배 얘길 자주 했는데 …….”

그러면서 K는, 임종 직전 Y가 내게 전해달라던 말을 옮겨 주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당황스러웠고, 점점 더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라고? 죽었다는 그 아이 이름이?”

온라인 카지노 게임 Y의 이름을 몇 번이나 다시 물었다.

“선배 이야길 자주 했어, 선배가 뭐 하고 사는지 그런 이야길 듣는 것도 좋아했고. 정말 기억 안 나? 선배네 과후배였잖아, 같이 수업 들었을 텐데 …….”

Y의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K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이상하다.”

아무래도 K의 착각인 것만 같았다.

“선배가 우리 과 수업 들을 때도 같이 들었잖아. 맞아, 같은 조로 발표도 했고. ……나중에 걔가 아파서 말을 못 하게 되었거든 그때도 선배 얘길 하려고 한 적이 있을 정도로……”

이상해지는 기분을 어쩔 수가 없었다. 사학과 수업을 들었을 때를 기억해 내려고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선배가 기억 못 할 리가 없는데……”

K 역시 몇 번이고 되묻고 있었다.

“홍 교수님 수업 기억 안 나?”

백제사의 대가인 홍교수의 고대사강의를 들은 것은 기억나지만 나는 도무지 Y가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K는 쉽게 화제를 바꾸지 않았다.

물론 K가 Y의 죽음을 전해주기 위해 나를 만나러 온 것은 아니었다. K는 내가 Y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지만.

K를 만난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학과조교로 있던 후배 P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학과의 업무에 관여하고 있던 P가 다음날 찾아서 알려준 기록에 의하면 Y는 전공인 철학과 수업은 물론 사학과 수업까지 나와 같은 과목을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의아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철학과 선후배 둘이 사학과 수업도 같은 클래스에서 들었다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해 여름

시내로 갑시다, P의 말에 거리로 나와 택시를 탔다. D시는 지독하게 불경기라고 택시 안에서 P가 중얼거렸다. D시의 가장 번화한 시가지로 온 우리는 과 후배가 주인이라는 카페로 들어갔다. 나는 그곳의 출입문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그곳을 기억해 냈다. 눈에 익은 바였다. 옛 이름은 ‘쟁이’였지, 나는 카페의 이름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카페의 이름은 바뀌어 있었다.

혹 Y도 아는 곳일까, 나는 그 카페가 제대하던 해 봄쯤에 생겼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의 주인 여자가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유명여배우를 빼닮았었다는 것도 기억해 냈다. 그래서 손님이 많았었다는 것도.

그 여자배우를 닮은 여자는 없었다. 음악도 달랐다. 내가 막 들어섰을 때 들려오던 건 보사노바였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그 음악을 듣는 순간 나는, 갑작스럽게 헤어짐을 통보해 왔던 연인을 떠올렸고 눈이 펑펑 내리는 날 그녀와 함께 그런 한여름 밤의 음악을 듣고 싶었던 기억도 끄집어냈다.

P와 온라인 카지노 게임 그곳의 주인인 여자후배와 홀 한가운데 둥근 탁자를 둘러싸고 앉았다. 시간강사로 일하는 P가 강의에 관한 이야기를 했고, 카페의 주인이 선후배들의 동정을 화제에 올렸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P가 Y의 이야기를 꺼냈다.

“웬일로 내려왔어요? 일 년 내내 바쁘다면서. 여긴 아주 오랜만이겠어요. ……형이랑 같은 수업 들은 거는 맞아요. 예전에 제가 한번 알아봐 드리지 않았어요? 맞대니까요. 저도 기억이 날 거 같아요. 그 왜 키가 작은 애였는데, 단발머리. 매일 청바지 입고 다니고. 형이랑 양산에도 함께 가지 않았어요? 그때 왜, 야외철학세미나라고 있었잖아요. 그때도 아마 우리랑 같은 조였던 걸로 기억나는데 ……. 기억 상실이유?”

취기가 가득했던 나는, ‘키가 작고 단발인 데다 늘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 여대생이 어디 한둘이란 말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안하다 기억하지 못해서’라고도 두서너 번 뇌까렸다. 우리는 카페주인이 내 온 위스키를 얼음도 없이 쉬지 않고 마셔댔다. 술을 마시는 사이사이 그 얼마간, 나는 Y를 잊어버렸다.

P는 다시 Y의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아참! …… 내가 이거까지 조사해 왔잖소. 여기 집 주소, 그리고 전화번호. 여기 가본 적 없어요? 집이 여기잖아요. 죽을 때도 형 얘기를 했다는데…… 예뻤어. 형! 사귄 거 맞죠?”

P는 취해있었다. P는 정말 Y를 기억할까, 나는 P도 Y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북구 OO동 5-10번지. D시의 북구라면 나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곳이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동네이름하며…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이 분명했다. 테이블로 돌아온 카페주인이 Y를 궁금해했다. 하지만 그녀도 자신의 후배인 Y를 기억하지 못했다. 주인은 화제를 바꿔 나에 대해 불평을 해대기 시작했다.

“선배는 좀 재수 없었죠. 잘난 체하고 다녔던 건, 기억나요?”


그해의 여름을 아무리 떠올려 봐도 나는, Y는커녕 늘 붙어 다녔던 P와의 추억조차 제대로 되살려내지 못했다. 일기라도 써둘 걸 그랬나, 그런데 일기는 증거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남겨진 파편들을 긁어보아 원형을 추측하듯 그해 여름의 기억들을 모아나간 것은 술이 깬 이튿날 오후였다.

P의 오피스텔에서 잠들었던 온라인 카지노 게임 아홉 시 무렵 눈을 떴다. 일어나자마자 온라인 카지노 게임 K가 전해 주었던 Y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그해 여름은 선배 덕분에 정말 즐거웠어.’


“Y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건 역시 학적부 아니겠어요?”

P가 학교 갈 채비를 서두르며 사진도 볼 겸 학교에 가보자고 말했지만 온라인 카지노 게임 따라나서지 않았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오전 느지막이 오피스텔에서 나와 D시의 중심가를 걸었다. 시가지로 들어서지 않고 시가지를 우회하는 골목들을 걷기 시작했다. 흐린 겨울이어서인지, P의 말대로 극심한 불경기여서인지 사람들은 적었고 표정도 밝지 않았다.

중심가의 남쪽 끝까지 걸어 내려왔다. 거기 있던 ‘D극장’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자리는 콘크리트를 울퉁불퉁하게 깔아서 조성한 주차장이 차지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 D극장의 맞은편 심하게 낡은 건물에 있던 ‘녹향’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지저분한 계단을 천천히 밟아 올라갔다. 문은 열리지 않았고 ‘오픈타임 오후 2시’라고 한글로 쓰인 낯익은 팻말이 흔들거렸다. 나는 계단을 내려오면서 그해 여름 녹향을 자주 드나들었던 걸 기억해 냈다. 그해 가을 함께 여행을 떠났던 한 여자에 대한 기억도 떠올랐다.

녹향에서는 음악은 물론이고 음악과 함께 콘서트 실황을 틀어주기도 했는데 그 비디오를 비추는 스크린 뒤로 낡고 작은 방이 하나 있었다. 그해 여름, 나는 그 방에서 모이던 모임에 드나들고 있었다. 매주 감상회를 열고 논평들을 해대는 고전음악감상모임이었다. 그곳에서 알게 된 여자가 있었다. 나보다 네 살이 많았던 그 여자. 함께 서해의 해안가 마을을 여행했고 그래서 일몰도 몇 차례 함께 보았던 여자. 언젠가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빼들고 소파에 앉았을 때 발등 위로 떨어진 그 여자의 사진, 그리고 그 사진 아래쪽에 찍혀있던 빨간색 숫자의 연도며 날짜들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사진 속의 여자는 거센 바닷바람을 맞아 머리칼이 얼굴을 다 가리고 있었다. 그 여자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도무지 잘 떠올려지지 않았다.

평일의 오후 2시쯤이면 녹향으로 들어와 손바닥으로 무르팍을 두드리며 바흐를 듣던 노인도 생각났다. 주인장이 주던 시큼한 사이다 하며 달고도 새콤했던 오렌지주스도 떠올랐고 므라빈스키(Yevgeny Mravinsky)가 지휘봉 없이 손끝으로 연주하던 차이코프스키의 5번 교향곡도 회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녹향 어디에도 Y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자주 들리던 서점이며 레코드가게가 생각났지만 한두 곳 외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처음으로 LP를 사보았던 레코드가게, 혼자 가서 무려 몇 시간씩이나 주저하며 책을 골라서 나올 수 있었던 몇 군데 서점들, 싼 값에 술을 많이 마시기 위해 드나들었던 시립도서관 건너편의 술집,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다는 듯 사라지고 없었다.

시가지의 큰길로 돌아나가는 길에서 온라인 카지노 게임 멈춰 섰다. 그 자리에 있던 분식점 하나가 사라지고 없었다. 형광등 수십 개가 달린 대형 휴대폰매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분식점이라고 하기엔 우아하기까지 했던 ‘장미분식’이 더 이상 D시에 없다는 사실에 온라인 카지노 게임 진정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장미분식에는 ‘AR3a’라 불리는 오래된 스피커가 있었다. 눈높이 정도에 두 개의 선반이 꽤 넓은 거리를 유지한 채 달려있었고 그 선반 위에 고풍스러운 스피커가 왼쪽 오른쪽 나란히 가로로 놓여있었다. 고풍스럽기는 했지만 스피커 통이 칠이 벗겨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삼베로 만들어진 그릴도 참 예뻤다. 노르스름한 그 천 안쪽으로부터 달콤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늘 낮은 음량으로 음악을 틀어놓아서 나는 오므라이스를 먹다 말고 띄엄띄엄 라벨의 콘체르토 같은 걸 들을 수 있었다. 아, 혹여 Y와 함께 장미분식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오므라이스 같은 걸 먹은 적은 없는 걸까, 나는 기억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학교 앞으로 돌아왔다. 학교는 온통 공사 중이었다. 개발 중이라기 보단 폐허처럼 보였다. 동쪽 출입문 안쪽부터 땅을 고르는 작업을 하고 있었고 체대 앞에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인문대 쪽에도 짓다 만 건물이 보였다. 학교의 건물들을 뒤덮은 넝쿨은 그대로였다. 넝쿨은 그대로였지만 넝쿨을 바라보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 다른 사람이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과거 그 넝쿨에서 받던 초록의 기운을 다시 떠올릴 수 없었다.

인문대 건물로 들어섰다. 방학이어서 꽤 썰렁했다. 1층 로비의 게시판 앞에는 컴퓨터 다섯 대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었다. 낯선 통유리 너머로 교무과가 들여다보였다. 3층의 복사실에도 가 보았다. 그 복사실 앞에서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죽자며 나를 꼬드겼던 한 아이가 생각났다. 그 아이는 그때 비트겐슈타인(LudwigWittgenstein)의 ‘논리철학논고’를 들고 복사실 앞에 서 있었다. 물론 그 아이는 Y가 아니었다. 내가 여태껏 잘 살아있듯 그 아이도 죽지 못했다는 것을 온라인 카지노 게임 간간이 들리는 소문으로 알고 있었다.

인문대를 빠져나왔다. P에게서 받아 든 Y의 주소가 내 손가락 틈에 있었다. D시에 살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동네는 바람에 나부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Y의 학적부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미루고 싶어 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차피 모든 것은 사라지고 없을 테니까,라고 온라인 카지노 게임 생각했다.

학생회관을 올려다보았다. 그 음악 감상실! 크고 볼품없는 스피커가 설치돼 있었던 그 음악 감상실은 아직도 여전한 것일까. 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두 개의 출입문은 모두 잠겨 있었다. 여기서 내가 신청한 곡들은 무엇이었을까, 모차르트가 많았을 테지. 나는 이른바 모차르트 사건을 떠올렸다.


날씨는 화창했고 덕분에 그날 저녁은 봄날치고는 제법 훈훈했다. 바로 초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던 건데, 내게 있어 그 무렵의 저녁 바람은 세 개비의 줄담배보다 더 가슴을 부풀게 하는 그런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때 동아리방에 앉아 브루흐의 협주곡을 듣고 있었다. 가방과 책은 도서관 열람실에 둔 채였다. 동아리 신입생 하나가 동아리방으로 들어왔다. 나와 내 동기생 둘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프레시우먼이 나를 향해 빛나게 웃었다. 손에는 캔커피 하나를 쥐고 있었다. 나는 별반 감정이 동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동아리에 가입할 때부터 눈여겨보았지만 가슴이 두근대긴 해도 오르지 못할 나무라고 미리부터 단념하고 있던 터였다. 멈칫,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선배님 여기 계셨네요?”

“……응?”

학과사무실, 인문대 도서관, 중앙도서관 열람실까지 나를 찾기 위해 돌아다녔다고, 그게 커피를 전해주기 위해서였다고 내게 말하고 있었지만 내 머릿속은 마냥 하얘졌다. 한참을 주저하며 아마도 이상한 표정으로 웃고 있던 내가, 결국 내뱉은 말은 ‘왜?’였다.

“그냥요.”

이쯤 되니 두 친구는 밖으로 나갔다. 귀여운 녀석들!

나는 그녀와 사귀기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지고 말았다. 그 아이의 바닷가 고향으로 찾아가 실연을 거듭 확인하고 돌아오는 시외버스에서 나는 클라라 하스킬(Clara Haskil)을 떠올렸다.

실연의 그날, 나는 D시의 동쪽 터미널에 내려 고모댁으로 들어가지 않고 시가지에 있는 레코드가게로 향했다. 모차르트 협주곡 20번과 24번이 함께 수록된 하스킬의 레코드, 그리고 그뤼미오(Arthur Grumiaux)와 함께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 그렇게 두 장의 LP를 샀다. 나는 그날로부터 거의 보름동안을 그 음악들만 들어댔다. 누운 채였다. LP를 뒤집고 바늘을 올려놓기 위해 잠시 침대에서 일어나곤 했을 뿐이었다.

그런 시간의 끝에 나를 위로하기 위해 술자리가 열렸고 내가 주점에서 실려 나갈 때 언뜻 본 기억으로는 빈 소주병들이 테이블의 반을 채우고 있었다. 노천강당으로 옮겨진 뒤에도 나는 몇 병의 술을 더 마셨다. 다음 날 정오 무렵, 후배의 자취방에서 깨어나 위액까지 게워 낸 나는 다시 술 생각이 났다.

내가 맥주를 들이켜고 있으려니 친구들이 찾아왔다. 모두들 낄낄 웃어대고 있었다. 그들이 전한 바로는, 전날 취한 내가 ‘내가 바로 모차르트다, 너희들이 내 음악을 알아?’라고 선후배를 막론하고 무차별 공격을 퍼붓고서는 ‘모차르트 음악의 본질은 비애(悲哀)!’라고 일갈하고선 정신을 잃듯 잠들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날 저녁 무참하게도 모차르트가 환생한 것이었다. 그때는 이미 여름의 한가운데가 되어 있었다. 나는 모차르트를 가슴에 품은 채 그해의 가을을 맞았다.

그때 그 아이의 이름은 ‘은영’. Y의 이름과 한 개의 글자가 같았다.



너는 누구일까

교내의 큰길에서 왼쪽의 샛길로 빠져들었다. 길 가운데 화단 너머로 중앙도서관이 보였다. 화단 위 도서관에는 벌써 불빛들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하늘엔 햇무리가 비쳤다. 추웠고 흐린 날이었다. 눈이 당장 다시 내릴 것 같았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도서관으로 들어가 열람실 한 귀퉁이에 앉았다. 열람실에는 자리마다 메모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내가 앉은자리의 메모판에는 ‘오늘 세 시까지 아르바이트, 이 자리에 앉으신 당신! 오늘 공부 꼭 잘 풀리실 거예요. 파이팅!’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 것들 외엔 옛 모습 그대로였다.

아래층 휴게실엔 어수선한 가운데 학생들이 그럭저럭 붐비고 있었다. 막걸리 내기로 컵차기며 족구를 하던 시험기간이 떠올랐다. 물론 그 기억 속에도 Y는 없었다. Y와 함께 머물렀던 자리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건가, 나는 낙담했다.

위층으로 올라가 앞서가는 여학생의 뒤를 따라 자료실 입구를 슬쩍 통과했다. 그 학생을 따라 자신도 모르게 엘리베이터까지 타버렸다. 5층에서 내린 온라인 카지노 게임 쇠로 만들어진 회색문을 열어젖혔다. 한적실(漢籍室)은 아니건만 책 냄새 가득한 5층, 옛 서고의 느낌이 가득한 그곳. 내 마음은 십여 년 전으로 돌아가 설레는 것만 같았다.


Y는 그 아이였을까? 책을 어디에다 꽂아야 할지 몰라,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던 가무잡잡한 얼굴의 그녀. 사투리, 그래 강원도 사투리였다. 아니, 그게 강원도 사투리는 아니었나 보다. 아니었을 거다. 고향이 경북의 북쪽 끝이었나, 왜 북한말을 쓰냐고 내가 놀려댔었지. 나는 그녀를 기억해내려고 했다.

그녀와 나는 어느 해 여름방학, 중앙도서관에서 같은 조가 되어 아르바이트를 했다. 남학생 한 명이 더 있어서 세 명이 한 조였다. 우리 셋이 일한 곳은 5층이었고, 분명한 건 우리가 한 달 내내 소설책들과 시집들 그리고 비평집 따위를 만지작거리며 하루에 두 끼를 같이 먹었다는 것 정도. 전공이 뭐였을까? 문헌정보학 같은 거였나, 아니면 식품영양학이었나. 아, 모르겠다, Y는 아닐 테지, 그때 그 아이는 분명 나와 같은 과가 아니었으니까.

내가 자주 앉던 자리를 찾아보았다. 책상은 스탠드까지 달려서 서고(書庫) 깊숙한 곳에 있었다. 스탠드는 없어졌지만 책상은 그대로였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뒤를 돌아보면 창 너머 멀리 언덕 위의 교회가 보였다. 그 교회 안엔 거대한 파이프들이 도사리고 있었고, 온라인 카지노 게임 일 년에 한두 번쯤 있는 그 파이프들의 연주를 들으러 언덕 위로 올라갔다. 연주가 없더라도 가끔 자전거를 타고 그 교회를 향해 오르막 페달을 밟곤 했다. 그때 누군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그 언덕으로 올라가지는 않았을까. 어디선가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의 오르간 소리가 내 귀에 들려오는 듯도 싶었다.

그 자리에서 바라본 대학 본관의 첨탑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첨탑 아래 총장실에는 침실은 물론 고급스러운 샤워시설까지 있었다. 총장실을 점거했던 게 언제였더라. 총장이 재정을 전횡했었나, 등록금 투쟁이었나. 그때 총장실 바닥에 엎드려 ‘외국인을 위한 독일어교본’을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 중에 Y가 있었을까.

다산(茶山)이 말했던가. 여인의 자태는 기억나지만 그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나는 Y의 대강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질책했다. 외려 Y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라고도 생각했다. 그 여인이 다산의 시선을 어떻게 담아두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언제까지도 Y가 떠오를 것 같지 않았다. ‘하긴 모든 게 사라지는 법이니까’ 하고 생각했고, ‘사라지면 그것들은 잊히는 걸까’라고도 생각했다.


나는 Y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희미해지다 못해 사라져 버린 기억의 교집합을 되살리기 위해서였을까, 편지를 써서 서고 깊숙하게 꽂혀있던 ‘듀안 마이클’의 오래된 사진집 속에 넣어두기로 했다. 언젠가. 누가 와서 꺼내 읽어보겠지,라고 생각하며.



상상화

여긴 곧 문을 닫으려나 보다. 마음이 바빠지려다 말고 느긋해진다. 토스티의 멜로디가 서가(書架) 사이로 사뿐히 걸어 다니고 사람들은 고요한 듯 분주하다. 해는 벌써부터 사라졌다. 밤이다. 밤이 시작되기 무섭게 어둠이 해맑아지는 것만 같다. 기름기 빠진 저 테너 때문일까, 이 잉크 빛깔 플로리다블루 때문일까.

듀안 마이클의 오래된 사진집을 넘겨본다. 침대에 걸터앉은 여자가 뒤에서 남자를 껴안은 사진을 본다. 이 사진이 증거다, 듀안 마이클은 사진 아래 글을 적어 놓았다.

혼자 남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고, 불빛들이 모조리 꺼지지 않아 다행이다. 구내의 가로등은 무지 높고, 또 밝다. 여기 또 꺼지지 않은 작은 등들이 내 눈을 데운다. 문득 궁금해져 버렸다. 네 머리칼은 무슨 빛깔이니?

상상화란 꽃, 아니?

지난여름 형님네 식구들과 신흥사에 다녀왔다.

신흥사는 늘 그렇듯 북적였다. 동대문 시장도 휴가라고, 일주문 안쪽의 상인들이 말해주었다. 휴가 낸 상인들이 모두 속초로 몰려온 것은 아닐 텐데 그날만큼은 가는 길도 오는 길도 참 많이도 붐볐다. 한데 경내로 들어서고 다시 대웅전 앞마당에 올라섰을 때 사람이라곤 우리 식구와 기와불사 접수를 받는 보살 한 분뿐이었다. 경내는 갑작스럽게 고요해졌고 우리는 여유롭게 여기저기 둘러보기 시작했는데, 대웅전 아래 화단에서 특이한 꽃을 보게 되었다.

조카아이가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저 꽃 좀 봐요, 하듯 눈을 찡긋하면서. 전에 왔을 때엔 몰랐는데 아마 그때도 피어있었겠지. 예쁜 꽃이었다. 그런데 꽃을 받치고 있는 대궁만 있고 잎사귀가 없더라. 독특하다 했더니, 이 꽃은 상상화란다. 想像花. 보살님이 아이 곁으로 다가가 설명해 주는 것을 형님과 나도 함께 들었다. 잎사귀가 먼저 나는데 그 잎사귀가 메말라 떨어지고 난 후에야 꽃이 핀단다. 그러니 꽃과 잎사귀는 서로를 볼 수 없어 서로의 모습을 상상만 할 뿐이란다. 그래서 상상화란다.

얼마 전 바람이 세게 불 때 꽃이 몇 개 꺾였다고 하더라. 흔적이 있었다. 꺾이면서 꽃은, 다른 세상으로 가 잎사귀를 만났을 것이다. 잎사귀 또한 꽃을 만났겠다. 상상 그대로였을까, 상상이 깨지는 순간이었을까, 상상화란다. 상상화를 상사화(相思花)라고도 부른다는 것은, 나중에 검색해 보고서야 알았다.

언젠가 만나겠지, 그날까지 너를 잊지 않을게.

너를 만나면 상상 그대로일까?

도서관을 나서면 곧장 역으로 가야겠다. 돌아가는 길엔 완행열차를 타 볼 작정이다. 아마도 토스티의 가곡들을 흥얼거리며 늦은 밤 도착하게 되겠지.

이제야 너를 추모한다.



페퍼민트

도서관에서 나온 나는 따뜻한 차가 마시고 싶어졌다. 동문 앞 커피가게에는, 막 문을 연 듯 어린 여자 직원이 부스스한 머리칼을 동여매고 있었다. 나는 페퍼민트 한 잔을 주문하고 동문 앞의 퀭한 거리를 바라보았다. 커피가 든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다 대자 뜨겁고도 부드러운 기운이 몸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Y에 대한 기억 아닌 기억이 몸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이별을 말하던 연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제 늦은 밤, 그녀와 함께 마셨던 홍차며 페퍼민트의 향과 맛도 입 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때 그녀는 별 말이 없었다. 다만 그녀의 집 앞에 정차했을 때 그녀는 일부러 웃는 얼굴을 만들고 있었다. 눈앞에 그녀의 그 웃는 얼굴이 당장의 현실처럼 펼쳐지는 것 같았다.


기차는 더디게 움직였다. 더딘 시간들만큼 내 생각들도 더디게 움직였다.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기에선 서글픈 유행가가 흘러나오고 흘러나와서 첫 부분의 가사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몇 번 더 전화를 해보리라 작정하고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내가 바라보는 D시의 교외 정경에 슬그머니 오페라의 리브레토 한 구절이 겹쳐졌다.

얼마나 모진 고문인가, 부드러운 옛사랑의 기억이 있다는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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