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가입 쿠폰 유키나가와 일본 카톨릭
1592년 4월 시작된 임진왜란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왜장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일 것입니다. 그들은 그 7년 전쟁 동안 전쟁의 수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고 무장으로 서로 맹렬하게 충성 경쟁을 펼쳤습니다. 그런 라이벌 관계로 둘 사이는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선에서 전쟁 중엔 사사건건 부딪쳤고, 전쟁 후 일본에선 서로 칼끝을 겨누는 아군과 적군으로 갈라 서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은 임진왜란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둘이 많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종교도 고니시는 기독교 신자였고 가토는 불교 신자였습니다.
카지노 가입 쿠폰 유키나가는 최선봉인 1군 대장답게 조선 땅을 일착으로 밟아 부산 지역을 격파하고 수도 한양을 거쳐 평양까지 전광석화 같이 올라갔습니다. 반면에 가토 기요마사는 수도 첫 입성의 공을 카지노 가입 쿠폰에게 놓친 것을 분해하며 개성을 거쳐 최북단인 함경도까지 치고 올라갔고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의 성까지 점령했습니다. 오직 전진, 이렇게 쉽게 끝날 것과도 왜란은 1593년 1월 명나라의 참전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 전쟁 최대 변수인 이순신 장군의 등장으로 다른 양상으로 진행됩니다. 북쪽에선 육로가, 남쪽에선 해로가 막혀 그들 뜻대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카지노 가입 쿠폰와 가토는 그들 부하들과 함께 왔던 남쪽으로 다시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피아 주체와 진행 방향은 다르지만 훗날 6.25 전쟁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된 것입니다.
최선봉장이었지만 고니시 유키나가는 가토 기요마사와는 달리 임진왜란의 반대론자였습니다. 그것엔 그가 당시 조선과 일본 양쪽의 눈치를 모두 보며 살아오던 대마도의 다이묘 소 요시토시의 장인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위와 같이 전황이 바뀌자 그 전쟁에 승산이 없음을 간파하고 휴전과 종전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평양까지는 물밀듯이 올라갔지만 항복 선언을 받아야 할 조선의 왕 선조가 피란 가있는 의주까지는 요원했기에 그랬습니다. 그것은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한 명나라도 입장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정명가도를 주장한 왜군을 한시라도 빨리 그들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건너 일본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협상이 다소 어이없게 진행이 되어 결렬이 되면서 임진왜란 중인 1597년 또 한 번 대대적인 정유재란이 일어났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종전 조건이 명나라 공주와 조선 왕자들, 그리고 조선 8도 중 이남 4도를 일본에게 넘기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라 대로해서 재침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협상의 주역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의 심유경이 내용을 속여서 보고를 했기 때문입니다. 심유경은 황제인 만력제를 기만한 죄로 처형을 당했고 고니시는 같은 운명이 될 뻔했지만 주변 신하들의 만류로 목숨은 건졌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정유재란 시 선봉대장은 그의 라이벌인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당시 그 협상에 당사자인 조선은 빠져있었습니다. 그 또한 훗날 6.25 전쟁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정유재란의 시작도 카지노 가입 쿠폰처럼 왜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대신 육군은 식량 확보를 위해 카지노 가입 쿠폰 때와는 달리 호남평야가 있는 전라도부터 치고 들어가 남원과 전주를 함락하고 충청도로 북상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수군도 고니시 유키나가의 잔꾀로 모함에 빠진 이순신 장군의 파직으로 원균이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를 해 유리하게 흘러갔습니다. 영화 <노량에서 배우 백윤식이 열연을 펼친 카지노 가입 쿠폰의 3대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패한 것입니다. 하지만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이순신 장군이 복권되면서 정유재란도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란 말을 남기고 출정한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승리함으로써 대세가 조선 쪽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 영향으로 육지의 왜군은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해졌습니다. 올라가 봤자 보급이 문제가 되니 더 나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듯 이순신 장군은 바다만 지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덕에 선조는 한양에 있든 의주에 있든 수라에 올라오는 영광 굴비와 벌교 꼬막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130년 가까이 지속된 전국시대로 전쟁 귀신이 다 된 날고 기는 센코쿠 다이묘들을 다 물리치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의아해했을 것입니다. 그가 주도한 일본 통일은 그의 주군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1582년부터 8년 후인 1590년에 달성했는데 한 수 아래로 훨씬 쉬어 보이는 조선 정복은 무려 7년이 가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러다 결국 히데요시는 그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하고 1598년에 먼저 죽게 됩니다. 아울러 그 지루한 전쟁도 끝났습니다. 영화 <노량의 초반부에 나오듯 죽기 전 그는 유언으로 조선에 가있는 모든 왜군의 철군 명령을 내렸으니까요.
이제 왜군은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 최대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노량해전에서 "다시는 이 땅을 넘보지 못하게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라"고 포효했습니다. 결국 사천왜성이 근거지였던 상대 적장 시마즈 요시히로는 대패를 했지만 살아서는 돌아갔습니다. 순천왜성에 갇혀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노량해전 덕에 그래도 길이 열려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역시 울산왜성에서 아사 직전까지 간 가토 기요마사도 그 틈을 타 귀국을 했습니다. 모두 망신창이가 되어서 간신히 살아서 돌아간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세 왜장 모두 규슈 남단에 붙어있는 가고시마와 구마모토 지역을 다스리던 다이묘였습니다. 하지만 우린 안타깝게도 대승을 거둔 그 카지노 가입 쿠폰의 마지막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을 잃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뒷말이 무성한 그의 죽음입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기독교도라고 했습니다. 그냥 기독교도가 아니라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였습니다. 물론 카톨릭입니다. 제목에 올라온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세례명입니다. 그래서 그는 조선으로 건너올 때 그의 군사들만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다. 서양인인 포르투갈 신부들도 데리고 입국했습니다. 카지노 가입 쿠폰는 낮에는 전투를 하고 밤에는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 시절 아시아는 세계를 양분한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사라고사 조약의 영향으로 포르투갈의 영향권에 있었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스페인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고니시 유키나가는 한반도에 온 최초의 카톨릭 기독교도이고 그가 데리고 온 신부는 최초의 사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붉은 바탕에 하얀 십자가가 새겨진 깃발을 앞세우고 전투를 치렀습니다. 마치 중세에 이교도의 땅으로 원정을 떠난 십자군처럼 말입니다. 또한 그의 그런 모습에선 남아메리카 대륙을 무력으로 침공해 학살극을 벌인 스페인의 침략자 코르테스나 피사로도 연상이 됩니다. 그들도 기독교도였고 뒤엔 신부들이 따랐으니까요. 대신 그곳 신부들은 성경뿐만 아니라 와인 종자도 들고 다녔습니다. 미사주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칠레와 아르헨티나 와인의 시작입니다.
카지노 가입 쿠폰의 왜장들 중 악행으로 치면 아우구스티누스 고니시 유키나가가 최고일 것입니다. 라이벌인 가토 기요마사도 그 부분에선 밀릴 것입니다. 고니시는 조선 땅에 내리자마자 부산, 탄금대, 한양, 개성, 평양을 쓸고 올라가며 닥치는 대로 살상을 하였습니다. 조선 8도 중 5도를 도륙하며 다닌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적의 괴수 가운데에서도 흉악하고 교활한 자라 주륙을 해야 할 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그의 악행은 후퇴 시에 정점에 달했습니다. 명의 이여송이 출정한 조명연합군과의 평양전투에서 패한 후 한양에서 화풀이를 하듯 성 안에 있는 남자란 남자는 모두 죽인 대량 학살극을 벌였으니까요. 아울러 관청과 민가도 보이는 대로 불태웠습니다. 반달리즘의 극치를 보여준 것입니다. 경복궁 소실은 그 이전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 선조에게 성난 백성들이 방화한 것으로 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다른 역사에서도 숱하게 보듯이 종교와 전쟁, 그리고 신앙과 학살은 별개로 작동합니다. 때론 종교적인 이유만으로도 전쟁과 학살을 벌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십계명의 제6계명은 전쟁에선 예외인가 봅니다. 인류 최다 학살자인 나치의 히틀러도 세례는 물론 15세에 견진성사를 받은 카톨릭교도였으니까요.
일본에 카톨릭은 1549년 최초로 전파되었습니다. 그 6년 전엔 조총이 전해졌습니다. 모두 규슈 지역을 통해 들어왔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그 서구의 문명과 사상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오다 노부나가였습니다. 그는 조총을 적극적으로 개량하였고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았습니다. 조총 덕에 그가 칼로만 흥하고 망했던 전국시대의 다른 강력한 센코쿠 다이묘들을 제치고 1등 선두로 올라설 수 있던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커나가는 불교를 견제할 목적으로 오히려 장려할 정도였습니다. 마카오까지 진출해있던 포르투갈 사제들이 주로 전교를 하였기에 그 신자들은 기리시탄이라 불렸습니다. 크리스천의 포르투갈어인 크리스탕(cristão)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 사후 1587년 규슈정벌에 성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규슈에 기독교가 성행하는 것을 보고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그 말고 교황의 명령도 따르는 기리시탄의 세력이 커나가는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그래서 1590년 일본을 통일한 그는 기독교를 본격적으로 박해했습니다. 금교령을 내려서 더 커나가는 것을 막았고 1597년 1월엔 나가사키에서 26인의 기리시탄을 처형한 26성인의 순교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벌을 받았는가 그는 그 이듬해에 죽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금교령을 강화해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보다 더 강력하게 기독교를 탄압했습니다. 기리시탄은 배교와 순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일본에 와있던 포르투갈 신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과 그것을 영화화한 <사일런스는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기리시탄은 1637년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관군은 1년에 걸쳐 그것을 진압했습니다. 규슈에서 일어난 시마바라의 난입니다. 그 반란의 진원지는 나가사키현의 시마바라와 구마모토현의 아마쿠사 두 곳입니다. 아마쿠사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였던 우토 지역의 섬으로 그곳은 그리스도의 섬으로 불릴 정도로 많은 신자들이 살았습니다. 시마바라의 난 이후 기리시탄들은 지하로 들어가는데 음지에서 신앙생활을 한 이들을 가리켜 가쿠레기리시탄이라 부릅니다. 그들은 메이지 유신기인 1873년 금교령이 풀리면서 비로소 다시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규슈정벌에 공이 큰 가신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상으로 영지를 하사했습니다. 오늘날 구마모토현을 절반으로 나눠줘 번주인 다이묘가 되게 한 것입니다. 평민 출신이라 가문의 가신이 없던 히데요시에게 가신 그룹이 생기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구마모토성이 있는 북쪽 번은 가토에게 주었고 우토성이 있는 남쪽 번은 고니시에게 주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번의 경계선을 맞대고 임진왜란 출정 전부터 티격태격하였습니다. 서로 사이가 안 좋은 이웃이었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강세인 번과 불교가 강세인 번이라 많은 종교적인 시비와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일본의 새 주인을 가리는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라이벌답게 둘은 갈라섰습니다. 고니시는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를 옹립하는 서군에 가담했지만 가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가담했습니다. 사실 가토도 서군으로 출정하려 했지만 그가 아주 싫어하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서군의 대장이었기에 피해서 간 것이었습니다. 이에야스도 그때까지만 해도 그 내전의 명분은 히데요리를 위한 것이라고 했으니까요. 결국 이에야스의 동군이 승리함으로써 고니시와 미쓰나리는 처형을 당했습니다.
고니시는 사무라이의 명예로운 죽음인 할복을 거부하고 참수를 요청했습니다. 할복은 자살이기에 카톨릭 교리에 위배되어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 고해성사도 요청했으나 이에야스는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죽으면서는 불교 승려의 염불을 못 외우게 막고 예수, 마리아를 외치고 죽었습니다. 신실한 아구스티누스로서 순교자와도 같이 죽은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기리시탄 중에서 대표 신도급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죽음은 로마 교황청까지 알려져 당시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그가 조선에서 행한 학살은 제대로 보고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카지노 가입 쿠폰와 같은 기리시탄의 죽음은 전국시대 최고의 미녀로 꼽히는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부인인 가라샤의 죽음에서도 보여집니다. 그녀는 세키가하라 전투 전 서군 대장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인질로 잡혔습니다. 그녀의 남편 호소카와가 이에야스의 동군 편으로 서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자 가라샤는 죽음을 선택했는데 독실한 기리시탄이라서 자살을 할 수 없어 가신에게 죽음을 부탁하고 집을 불태우게 했습니다. 남편인 호소카와를 사랑해서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를 사랑한다면서 여러 첩을 두고 의처증까지 심했던 그였기에 신앙심이 우선인 죽음이었을 것입니다. 분개한 호소카와는 당연히 동군으로 출정을 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죽은 후 그의 집안은 멸문이 되었습니다. 아들과 동생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역시 기리시탄이었던 대마도 다이묘인 사위 소 요시토시만이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바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처분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외조부 성을 따른 외손자인 고니시 만쇼는 로마까지 가서 사제가 되어 돌아와 1644년 순교하며 일본인 마지막 신부로 기록되었습니다. 고니시의 영지인 우토성은 동군으로 참전해 승자가 된 옆동네 가토 기요마사의 구마모토성에 흡수되었습니다. 하지만 가토도 그의 사후 실시된 1632년 막부의 개역 작업 시 그가 히데요시의 사람으로 최종 판명되어 그의 가문은 영지를 몰수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은 위의 호소카와 가문에게 넘어갔습니다. 그 가문의 적손이 바로 1993년 연립 내각을 구성해 1955년 창당 후 38년간 독주해오던 자민당 체제를 무너트린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입니다. 그는 그 가문의 18대 당주입니다.
고니시 유키나가에게는 조선에서 입양한 것으로 알려진 오타 줄리아의 이야기도 부록처럼 따라다닙니다. 고니시의 영향으로 독실한 신자가 된 그녀는 일본 내에서 많은 선행을 펼친 것으로 알려집니다. 게다가 빼어난 미모와 약재술로 그녀는 이에야스의 시녀로 그의 곁에 있기도 했습니다. 그에게 반기를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인 고니시의 가속임에도, 그가 탄압하는 기리시탄임에도 그의 곁에 두고 있던 것입니다. 그녀가 약재술에 능했던 것은 본래 고니시의 집안의 가업이 제약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오타 줄리아의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 영화되기도 했습니다. 1973년 제작된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로 어린 시절 어디선가 들어본 제목의 영화입니다. 검색해 보니 꽤나 진보적인 영화였던 것 같습니다. 일본의 전국시대와 에도 막부를 소재로 한 것도 그렇고, 그 시대에 쉽지 않은 일본 로케를 단행한 것도 그렇고, 이에야스 역을 맡은 허장강씨가 에로틱한 연기를 한 것도 그렇습니다. 안 봐도 비디오라고 그는 오타 줄리아를 범하는 나쁜 연기를 했을 것입니다. 고니시 역은 김진규씨가 맡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임진왜란 시 일본에서 조선으로 넘어온 신부 이야기입니다. 예수회의 세스페데스 신부입니다. 그는 일본에선 1585년 오사카의 수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593년 오늘날 창원시 진해구의 웅천성으로 입국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카가 호출했고 와서는 그를 따르며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군종 신부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가 조선 체류 시 다른 활동을 한 것은 정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교구청에 보낸 4통의 편지를 남겼습니다만 그것은 사적이고 단편적인 유물일 것입니다.
이것을 논하는 것은 그의 이름을 딴 세스페데스 공원이 그가 상륙했던 곳에 2015년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창원시는 카톨릭 교구의 입장과는 별개로 그 사제가 태어난 고향과 협업하여 그를 기념하는 공원을 조성한 것입니다. 만약 카톨릭 교구에서 검증을 통해 당시 그가 조선인을 상대로 포교를 했거나 선행을 베푼 사실이 인정된다면 우리나라 카톨릭의 역사는 임진왜란 때까지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벨테브레, 하멜보다 먼저 조선에 온 서양인으로도 대접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1년 반 정도 조선에 체류했다고 하니까요. 한일 양국에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긴 아우구스티누스 고니시 유키나가입니다.
https://youtu.be/dD5EOOxVlYc?si=YDhQxI3T5KX0wvt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