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는 마음으로 정하는 것
뽀로로, 공룡, 자동차의 시대가 지나고, 우리 집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바로 변신 로봇의 시대.
헬로카봇을 시작으로 또봇, 메카드볼, 터닝메카드까지. 딸을 키울 때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둘째 아이의 로봇 사랑은 5살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생일마다, 특별한 날마다 받고 싶은 로봇이 어쩜 그리도 다양하게 등장하는지. 결국 우리 집에는 변신 로봇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아이는 수많은 로봇의 이름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변신 방식까지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으니, 웬만한 어른보다 낫다는 생각도 든다.
주말마다 한 시간의 유튜브 시청은 아이가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이다. 다른 아이들이 인기 있는 게임 영상을 본다거나 장난감 리뷰를 보는 것과 달리, 둘째 아이는 오직 변신 로봇 만화에만 집중한다.
어느 날 아이는 헬로카봇의 ‘우가바’에 푹 빠졌다. 중고라도 상관없으니 제발 우가바를 사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엄마에게 커피 한잔 사주는 조건으로, 네 용돈으로 사는 거야.” 그렇게 왕복 한 시간 거리를 달려 우가바를 구해왔다. 아이는 한동안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가바가 집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번에는 '타키온'에 꽂힌 것이다. 타키온은 또봇에 나오는 변신 로봇. 타키온이라 하면 이미 집에 하나 있는데, 문제는 '변신하는 타키온'이 아니라는 거였다.
우리 집에 있던 타키온은 '타이탄 V'라는 3단 합체 로봇의 일부이다. 타키온이 자동차 형태에서 반으로 갈라져 로봇의 팔로 변신하는 방식. 아이가 원하는 건 단독으로 멋지게 변신하는 ‘완전체 타키온’이었다. 검색해 보니 단종된 모델이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판매처는 단 한 곳, 배송비 포함 99,000원. 당근 마켓에도 없었다. 그렇게 대단한 로봇인가?
“이건 절대 안 돼.” 단호하게 거절했다. 10만 원 가까이 되는 장난감은 아무리 아이가 좋아해도 선뜻 사주기 어려웠다. 아이는 한발 물러나는 듯했다. “그럼 미니 타키온이라도 괜찮아.” 7천 원짜리 미니 타키온을 로켓 배송으로 주문했다. 택배 상자가 도착하자 아이는 마치 보물 상자를 여는 듯한 설레는 얼굴로 박스를 열었다. 포장지를 뜯는 순간 아이의 두 눈이 반짝였고, 손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 반짝임은 5분도 채 가지 않았다. 아이의 얼굴이 점점 구겨지더니, 실망감 가득한 표정으로 내 앞에 왔다.
“타키온.... 사고 싶어.” 아이가 상상한 변신이 아니었나 보다. 변신이 되던데, 아무튼 이건 아니란다. 만화에서 본 화려한 변신도, 또키(열쇠)도 없는, 그야말로 ‘미니’ 타키온. 하루 종일 타키온만 기다렸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미니 타키온은 한순간에 찬밥 신세가 되었다. 아이의 눈빛에는 아쉬움과 허전함이 가득했고, 미니 타키온은 로봇 더미에 파묻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설이 지나고 아이는 세뱃돈을 얼마 받았나 몇 번이나 확인했다. 조용히 아빠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로봇을 검색해 달라고 했던 모양이다. 얼마 후, 아이는 나에게 다가왔다.
"엄마, 세뱃돈으로 무료 카지노 게임 살래."
천 원의 가치는 잘 몰라도, '19만 원보다 9만 9천 원이 작다'는 건 알았나 보다. 나는 헌금과 저금할 돈을 빼면 모자란다는 걸 설명하며 다시 한번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아이는 아빠를 설득(?)했고, 남편은 나를 설득했다.
“사보고 후회도 해봐야지.”
다년간의 로봇 구매 경험에 비춰볼 때, 이 정도 모델은 4~5만 원이면 충분한 가격이다. 그런데 99,000원이라니. 내 맥박과 혈중 산소 농도를 측정하고, 밤새 수면 상태를 분석해 점수까지 매겨주는 최첨단 갤럭시 핏 3가 89,000원인데?
"99,000원이면 다이소 변신 로봇 20개를 살 수 있는 돈이고, 미쯔를 100개 살 수 있는 돈이고, 풍선껌 200개를 살 수 있는 돈이야. 심지어 펜타스톰 X(5단 합체 로봇)도 그 가격이었어!"
눈동자는 굴러갔지만 머릿속은 굴러가지 않는 듯, 아이는 여전히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래도 나는 무료 카지노 게임이 필요해."
결국, 몇 가지 약속을 하고 구매 버튼을 눌렀다. 용돈이 없어 먹고 싶은 걸 못 사 먹어도 투정 부리지 않기,필요 없는 로봇 몇 개는 처분하기. (대체 판매자분은 무슨 현안이 있어서 이 제품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걸까. 존경스럽다.)
이틀 뒤, 드디어 무료 카지노 게임이 도착했다. 포장을 뜯으며 기쁨에 찬 아이의 얼굴을 보니 그동안의 고뇌가 조금은 덜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날 오후, 누나가 사탕을 사 먹는 모습을 보고 부러워하다가 혼날 뻔했다. 무료 카지노 게임은 손에 넣었지만, 인생의 선택이란 언제나 쉽지 않은 법이다.
99,000원.
키즈카페 두 번, 미술학원 한 달 원비, 우리가 가끔가는 음식점 한우 2인분, 애슐리 한 끼 외식.
이렇게 따져 보니 꼭 엄청 비싼 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내 갤럭시 핏 3 보다 비싼 무료 카지노 게임님.
부디 장수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