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여자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가 자신의 옆자리를 오랜 시간 지키고 있었다는 걸 눈치챘다. 잘 잤어요 언니?
여자는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사람처럼 개운함을 느꼈다. 동시에 일말의 해방감 같은 것도. 얼마나 잤니? 다섯 시간 정도요. 어때요. 몸이 한결 가볍죠? 그녀의 물음에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이 멈춘 곳에는 하얀 종이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그녀가 기록한 문장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소마틱 테라피의 일종이에요. 언니의 트라우마를 글로 적어 놓은 거죠. 말은 너무나 가벼워서 금방 날아가 버리지만 글은 지상에 남겨둘 수 있잖아요. 당장은 끔찍하겠지만 용기를 갖고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들여다보면 지금보다는 자유로워질 거예요. 여자는 말없이 종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시간이 지나면 치유될 줄 알았어. 여자의 말에 그녀가 덧붙였다. 시간은 치유하지 않아요. 다만 아픔과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죠.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지상에 남겨둔 자신의 언어들을 가방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평생을 여자의 내부에서 재생되었을 소리들. 허공에서 공허하게 메아리치던 소리들. 그 누구의 고막에서도 울림을 얻지 못하고 냉동되어 있던 소리들. 여자는 그 소리들을 작고 하얀 종이에 가두었다. 여자의 마음은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기력의 소모와 관계의 단절이 속한 방향에서 상처의 자각과 용기가 담긴 용서가 속한 쪽으로. 계절이 바뀔 때까지 여자의 아버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의사는 여자의 아버지가 여전히 깊은 잠을 취하고 있으니 조금 더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다. 여자의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에 교회운영을 맡아야 했다. 그녀는 교회신도들을 모두 끌어모아 여자의 아버지를 위해 기도회를 열었다. 아버지의 병원비는 교회 신도들의 헌금 덕분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 때문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위한 기도뿐이었다. 여자는 잠에 들기 전 기도했다. 아버지가 깨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 자신에게 형벌을 내려달라는 기도. 자신의 돈을 가로챈 흥신소 남자의 형벌을 기대하는 기도. 그리고 현실에서 더 이상 이따위 기도를 멈추게 해 달라는 기도. 동년배의 그녀가 여자에게 여행을 제안한 것은 어떤 축하의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은 그녀의 어머니가 말을 할 수 있게 되던 날이었다. 뇌출혈 수술을 한 뒤 증상이 많이 호전된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데리러 올 거예요. 동년배의 그녀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실은 아버지를 정말 오랜만에 뵙는 거예요. 그래서 걱정이에요. 아버지의 눈에 내 모습이 많이 달라졌을까 봐. 그녀는 그 말을 남긴 채 화장실로 향했다. 여자는 그녀의 어머니가 누워있는 병상에 혼자 앉게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식의 뒷모습을 무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에서 여자는 시차를 느꼈다. 마음과 마음만큼이나 가깝고 먼 시차. 그녀의 어머니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여자를 향했다. 그. 저기. 우리 애가. 아니. 우리 딸이. 그녀의 어머니는 말을 할 수는 있었지만 제대로 된 의사표현은 어려웠다. 그녀의 입가에서 같은 문장들이 같은 곳을 서성였다. 여자는 귀를 기울였지만 의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사라진 공간에서 딸이 남기고 간 여운을 길게 음미했다.
10.
펜션을 운영한다는 그녀의 아버지는 기묘할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여자가 그녀의 아버지의 표정에서 발견한 것은 자신이 숨긴 것을 들키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 같은 것이었다. 얼굴이 마비되어 일그러진 채 병상에 누워있는 자신의 아내를 보며 그녀의 아버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얼마뒤에 원무과에 다녀온 동년배의 그녀가 아버지와 마주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붉어진 눈시울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괜찮아. 이제. 아빤 다 이해할 수 있어. 다 받아들일 수 있어. 여자는 끝내 그 가족에게서 끈끈한 가족애를 찾아볼 수 없었다. 오래된 승합차에서는 여자가 어린 시절 교회에서 맡았던 냄새가 배어 나왔다. 여러 사람들의 입김으로 데워진 변질되어 상해버린 공기의 냄새. 아버지. 여기 이쁜 언니랑 같이 갈 거예요. 그녀의 아버지는 여자의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낯가림이라기보다는 애써 피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감정 표현이 서툰 사람이 미안함을 숨기려는 것처럼. 차량은 여자가 익숙한 도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언니. 여기 길 신기하죠? 지대가 높은 곳에 있는 나선형 터널이에요. 경사가 심한 곳은 오르기 힘드니까 나선형으로 우회해서 완만하게 만들어 놓은 거죠. 여자는 이 익숙한 도로를 다시 한번 지나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느 일요일 아침 여느 때와 같이 여자의 아버지는 열정적으로 설교를 하고 있었다. 오. 주여. 최후의 심판의 날에는 온 세상이 환란의 지옥으로 바뀌고 하나님은 이 타락한 세상을 불로써, 불벼락을 내리쳐서 심판하시고. 여자가 예배당 입구로 들어섰을 때 설교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오. 거룩하신 하나님. 죄 많은 어린양들을 굽어 살펴주시옵고. 거룩하. 한. 컥. 여자는 목사실에서 가져온 낡은 과도로 아버지의 옆구리를 찔렀다. 컥. 여자는 바닥에 쓰러지는 아버지의 목을 그었다. 예배당의 공기는 신도들의 비명소리로 뜨거워졌다. 여자는 살갗에 닿는 그 온도가 혐오스러웠다. 사탄이 나타났어. 사탄이. 악귀가 씌었어.악귀가. 신도들은 피로 얼룩진 여자의 얼굴을 보며 손가락질했다. 여자의 어머니와 몇몇의 신도들이 그녀의 머리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하고 있을 때 여자는 자신의 몸이 한쪽으로 쏠리는 걸 느꼈다. 여자는 고개를 돌렸다. 차창밖으로 긴 도로가 나선형으로 휘어진 게 보였다. 그 도로를 지나자 고지대로 올라섰는지 귀가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도로는 아직 공사 중이었는지 도로 가장자리에는 공사를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나선형 터널 3.8KM 시작. 산꼭대기에 위치한 정신병원에서 여자는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 번에 가기엔 높은 곳이니까. 조금 천천히 돌아가는 거야. 괜찮아. 목적지에만 도착할 수 있다면. 뭐든 괜찮아. 여자는 자신의 회개기도를 필사해서 어머니에게 편지로 전했다. 여자의 어머니는 여자의 퇴원을 승인했고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돈을 모으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간증인으로서 신도들은 여자의 예배 출석을 원했지만 여자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여자는 익숙한 도로를 접어들면서 실감했다. 지금껏 자신을 살게 한 원동력이 미움과 증오였음을. 결국 여자를 설득시킨 것은 오욕의 낙인이 찍힌 적의와 적개심이라는 것을. 여자가 회상 속에서 걸어 나오려고 할 때쯤 동년배의 그녀가 그녀의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아버지 여기 맞아요? 길을 잘못 든 거 같은데. 그녀의 아버지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핸들을 틀어 중앙선을 넘어갈 때 고개를 돌려 여자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승합차는 중앙선을 넘어 다른 승합차와 충돌하며 가드레일을 뚫고 삼 미터 아래 논길에 전복되었다. 여자의 의식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전복된 차량은 희뿌연 연기로 가득했다. 동년배의 그녀는 조수석에서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검은색 치마가 뒤집어진 채. 여자의 시선은 조수석 사이드 미러를 향했다. 거울에 비친 동년배 그녀의 사타구니 위로 불룩하게 튀어나온 무엇이 여자의 눈에 새겨졌다.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