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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림월 Mar 31. 2025

카지노 게임 사이트 잃어버린 여인 #3

7.

이제 그날을 이야기해야지. 그날도 어김없이 너의 집에서는 너의 비명과 소음들이 들려왔어. 그러다 갑자기 흐르는 시간 위로 고요가 묵직하게 내려앉았지.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중력을 거슬러 무거운 적요를 깨트린 건 다름 아닌 우리 집 초인종 소리였어. 그 소리는 어두운허공에 발길질을 하는 것처럼 폭력적으로울렸어. 나는 까치발을 들고 조심스럽게 현관문으로 다가가서 외시경을 들여다보았어. 밤바람에 흔들거리는 얇은 잠옷을 입은너는 기도하듯이 두 손을 모으고 있었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네 손에는 피가 묻어 있던 것 같아. 너의 입술에서는 알 수 없는 언어들이 새어 나왔지만 그것들은 어찌나 가볍던지 순간순간 부는 밤바람에 먼지처럼 날아가버렸어. 아니. 아마 나는 네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언어들은 애써 외면한 건지도 몰라. 네가 벼랑 끝에 서 있는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보고 싶었으니까. 너의 눈에서는 불안과 공포를 머금은 검은색 눈물이 쏟아졌지. 하지만 나는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았어. 얼마뒤에 사이렌 소리가 아파트 단지 전체에 울려 퍼졌고 초록색 불빛과 빨간색 불빛과 파란색 불빛들이 거대한 반딧불처럼 어둠 속을 날아다녔어. 너의 집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어. 나는 그제야 현관문을 열고 아파트 복도로 나왔지. 구조대원 몇몇이 들것에 너의 남자를 싣고 아파트를 내려갔고 너는 경찰들의 손에 이끌려 아파트를 벗어났지. 나를 스쳐가는 너의 눈빛에서 원망과 증오의 빛이 떠올랐어. 너에게는 악몽 같은 밤. 나에겐 너의 불행의 절정을 알리는 전야제. 그 밤이 지나고 아파트 단지에는 너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 남편의 폭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배우자를 칼로 찌른 아내는 선고유예를 받았고 그 남편은 아직 병원에서 치료 중이라는 진실은 사람들 발 밑에서 무참히 짓밟혔지. 사람들은 아무래도 진실보다는 진실이라고 바라는 것을 믿으니까 말이야.다행히 네가 휘두른 칼에는 죽음이 서려있지 않았나 봐. 네 앞에서 그것을 다행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며칠 만에 본 너의 얼굴에는 나른한 환멸로 가득했어. 너의 눈은 이제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어떠한 의욕도 희망도 심지어 절망마저도 모두 네 곁을 떠나버린 것 같았지. 너의 불행으로 배를 가득 채운 나는 점점 더 비대해졌고 얼굴에서는 번들거리는 기름이 흘러내렸어. 그리고 너에 대한 소문은 네 발 달린 짐승처럼 아파트 단지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어.


8.

세탁소 아저씨는 너를 창녀라고 불렀어. 언젠가 세탁을 맡기러 왔을 때 속옷이 훤히 비치는 하얀색 얇은 원피스를 입고 왔다면서 자신을 유혹하려고 일부러 그런 옷을 입고 온 거라고 말했어. 과일 가게 아줌마는 네가 단지 안에 암내를 풍기며 돌아다니면서 남자들을 홀리 다음 사기를 쳤다는 말을 했어. 그리고 부동산 아저씨는 자신이 즐겨가는 노래방에서 도우미로 앉는 걸 봤다고 말했지. 경비아저씨는 어느 날 나를 붙잡고 네가 엄청난 도박빚에 시달리다가 분에 못 이겨서 남편을 칼로 찔렀다고 말했어. 나는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중요하지 않았어. 다만 그 소문이 너를 어디로 몰아세울지가 너무나 궁금했던 것뿐이야. 경찰들은 나를 찾아와서 평소에 옆집에서 이상한 기척을 못 느꼈냐고 물었지만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만 되풀이했지.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도 진실이든 거짓이든 중요하지 않았던 거야. 오직 내 입은 너의 불행을 삼킬 준비만 했으니까. 그리고 너를 마지막으로 본 그날. 너는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 영혼이 모두 소멸된 것 같은 동공으로 나를 바라보며 자신을 그려달라고 말했어. 그것이 너의 마지막 부탁이 될 거라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일까. 나는 너를 거실에 앉혀놓고 너를 그리기 시작했어.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 도저히 너의 눈동자를 그려 넣을 수가 없는 거야. 눈은 마음의 창. 너의 눈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아서였는지도 몰라. 너의 눈을 아무리 쳐다봐도 너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어. 나는 유현한 시선으로 너의 눈을 한동안 바라보았던 것 같아. 너의 눈동자를 못 그려 넣는 건 묵계가 반영된 결과였을까. 결국 나는 완성하지 못한 그림을 네 손에 쥐어주었어. 넌 그림을 보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나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어. 넌 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 네 입에선 뼈저린 문장들이 흘러나왔어.이건 내가 아니잖아. 이건 내가 아니잖아. 이건 내가 아니야. 언니. 제발 언니 마음속에 있는 나를 그려주세요. 제발요. 그런 너를 보고 나는 함부로 입을 뗄 수가 없었어. 함부로 입을 뗐다가는 한꺼번에 밀어닥칠 감정과 범람하는 말의 홍수에 휩쓸려 익사당할 것 같았으니까. 너는 구겨진 그림을 한 손에 쥐고 그림자처럼 일어서서 연기처럼 빠져나갔어.


9.

모딜리아니에게는 잔느라는 연인이 있었어. 방탕하게 지내던 모딜리아니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자 그녀도 이틀 만에 아파트에서 뛰어내렸지. 뱃속에 팔 개월 된 그의 아이를 품은 채로. 모딜리아니는 잔느를 그릴 때조차도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어. 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지.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그때 그리겠소.

네가 나에게 뱉었던 마지막 말. 제발 언니 마음속에 있는 나를 그려주세요. 너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내가 너의 불행을 먹으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너의 불행이 나를 구제할 거라는 허황된믿음이 내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의 눈을 끝내 못 그려 넣은 이유는 너의 불행을 바라는 나의 교활한 마음을 들켜버릴까 봐였어. 눈을 그리지 않는다면 너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모든 진실을 감출 수 있을 거라는 어리석은 기대가 결국 파탄의 길목으로 너를 들어서게 만든 건지도 몰라. 그리고 너는 어느 순간 그 길의 소실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거야. 검붉은 태양이 그림자를 삼켜버리고 황혼으로 물든 어둠이 찾아왔을 때 너는 바람에 하늘거리는 얇은 원피스를 입고서 아파트 복도 난간에 홀로 서있었지. 장을 보려고 집을 나서던 나는 비로소 너의 그 모습을 마주치고 만 거야. 내가 그토록 바라던 너의 모습을. 너는 사랑과 집착의 경계에서 정상과 광기의 경계에서 곡예를 하듯이 위태로워 보였어. 너는 소멸의 시점을 알고 있다는 듯 모든 결핍을 껴안은 표정으로 나를 무연히 바라보고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음 지었어. 그리고 허공에 몸을 날렸지. 너는 바람을 타고 날아서 한 장의 휴지조각처럼 천천히 지상으로 추락했어. 쿵. 소리가 나는 순간 나는 난간으로 다가가서 바닥에 누워있는 너의 뒷모습을 내려다보았지. 어둠이 드리워진 초록색 잔디밭에는 하얀 휴지 조각이 너덜너덜 버려져있었고 휴지조각은 서서히 검게 물들어갔어. 임신 3개월이었던 너는 네 뱃속에 있는 아이와 함께 황량하고 적막한 곳으로 떠나버린 거야.


10.

네가 사라지고 나서 아파트 단지에는 너의 대한 악의적인 소문이 득세했어. 사람들은 나에게 달려와 너를 향한 불순한 혐의를 두고 저의를 탐색했지. 아파트는그들이 몰고 다니는 혐오스러운 소문들로 도배되었어. 나는 그들의 바람대로 오욕의 한복판에 서서 네가 원래 저속한 인간이었다는 그들의 의견에 동의했지. 나는 일부러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경멸로 가득한 언어들로 너를 더럽혔어. 그런 나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역성을 하다가 너의 소문이 시들해지자 나를 못 본척하기 시작했어. 비대하고 냄새나는 내 육체가 단지 안을 돌아다닐 때마다 사람들은 나를 피해 다녔어. 너의 불행이 나를 구원할 거라는 숱한 확신은 이제 눈부신 재가 되어 허공을 떠돌았어. 세상에 아무런 반향도 일으키지 못한 누군가의 멸망. 그것은 나의 멸망일까. 너의 멸망일까. 그 어색한 침몰 속에서 나는 길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방황하기 시작했어. 나를 덮진 허무 안에서 방향 감각을 상실해 갔어. 나는 이제 더 이상 배부를 수 없었고 달콤함을 맛볼 수 없었어. 나는 숨을 쉬기 힘들었어. 부재의 부피는 심연처럼 깊었고 상실의 밀도는 어떠한 균열도없이 단단했지. 내 주위에는 이름 모를 고독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어. 그것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 고립과 두려움 속에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소금처럼 하얗게 빛나는고독이었어. 나에게는 너무 쓰라린고독. 그것은 공허하기만 했던 내 생애에서 선명하게 응축된 유일한 결정結晶이었어. 한동안 아무것도 마시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은 나는 떨리는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어둠 속에서고독 안에서 너의 눈을 그려보았지. 하지만 도저히 너의 눈을 그릴 수 없었어. 당연한 거야. 무게와 질감, 온도와 색깔은 만질 수도 볼 수 조차 없어졌으니까. 우리가 처음 만난 오월의 너를 잊을 수 있을까. 난간 위에 서 있던 너의 눈을 잊을 수 있을까. 그것은 잊히는 기억이 아니라 헝클어지는 기억 속에서 존재하겠지. 내 손이 닿지 않는 아주 깊숙한 곳에서 말이야. 곡기를 끊은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네가 누워있던 잔디밭으로 나갔어. 나는 소리 없이 네가 검게 물들였던 그곳에 엎드렸지. 네가 흘렸던 따스한 피와 식어가는 체온을 읽고 싶었어. 하지만 그 자리에는 바닥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냉기와 비릿한 풀냄새 그리고 어둠 속에 내려앉은 정적뿐이었어. 혹시 시간이 많이 흐르면 그때가 되면 너의 눈을 그릴 수 있을까. 무언가가 완성되는 순간은 그것을 완전히 잃고, 잃었다는 사실마저 완전히 잊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그 언저리를 헛짚는 순간이니까. 오늘도 나는 그 자리에 누워서 잃어버린 너의 눈동자를 읽어보려고 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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