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
좋다는 김금향의 한 마디가, 어떤 기분을 향해야 할지 모르는 내 마음에, 길잡이가 돼버렸다. 볕 좋은 날, 줄에 널린 채 흠씬 두들겨 맞은 이불처럼, 나는 묵은 먼지를 풀풀 날리며 후련한 기분을 느꼈다.
“잠깐만, 누나… 이게 좋다고…? 진짜로? 강승교 애제자 필터 끼워서 들은 거면, 나 정말 실망해?”
“좋은데?”
유금미까지 좋다고 맞장구를 쳐주자, 동훈 형이 쳐대는 고춧가루는 쓰라리지도 않았다.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정말 데뷔의 문고리를 돌리는...
“근데… 이걸 카지노 게임 불러? 설마 나야?”
“아, 그렇네?”
“거봐, 누나들. 얘가 이렇게 생각이 없다니까? 카지노 게임, 유금미 1인 기획사에서 트로트 곡 써오라면 당연히 유금미가 부를 곡으로 써와야 하는 거 카지노 게임야? 서울 출신 유금미가 어떻게 사투리 곡을…”
“카지노 게임. 사투리가 문제가 카지노 게임라, 내용이 문제지.”
“예…? 내용… 어, 어떤 게 문제가 될까요? 고… 고쳐볼게요.”
“아니. 내용 좋아! 너무 마음에 들어! 근데 내가 이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공감할까? 나 80평대 타운하우스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거 해마다 방송 타. 이제 모르는 사람도 없을걸?”
“그렇지. 유금미가 진짜 힘든 일이 있다고 해도, 카지노 게임들 공감하기 힘들 거야. 돈 잘 벌고, 유명한데, 그 정도 힘든 일도 감수 못 해? 그런다고.”
“거 봐! 명명아. 너는 진짜, 쓰고 싶은 것만 쓰는 그 태도…! 그 건방진 태도를 못 고치니까 안 되는 거야. 상식적으로 생각을 했으면 이렇게 써오겠냐고. 데뷔가 간절하다는 놈이 이런 노래를 몇이나 부를 수 있다고 써와.”
역시 생각이 너무 짧았다. 동훈 형 말대로, 내가 정말 간절했다면, 동훈 형에게 시도 때도 없이 곡을 보내 기어이 좋은 곡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카지노 게임, 작곡가 지망생 커뮤니티에 내 곡 좀 평가해 달라고 읍소했을 것이다.
평가받고 나면, 이 판에선 가망 없다는 선고를 받을까 두려워서, 그게 그렇게 두려워서, 나는 굴속에서 새하얀 얼굴로 괴사하고 있었다. 어느 하나 그을린 구석 없이, 맷집도 없이. 그러면서 작곡을 하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도움을 요청했다. 그저 다른 세상의 나라는 이유로. 이 노래를 카지노 게임 부를 것인가, 그 기본적인 질문조차 잊어버린 채.
“아… 저… 죄송합니다. 제가… 대상을 생각하고 써와야 했는데… 제가… 저…”
“언니, 그 카지노 게임 누구지? 저번에 고추 축제에서 내가 노래 잘한다고 했던 남자 한 명 있었잖아.”
“아, 용명이?”
“맞다. 이름이 김용명이라 했지? 그 카지노 게임, 이 노래 잘 맞을 것 같지 않아? 한 12년 무명이라며. 목소리 힘도 좋고. 그 카지노 게임 곡 같은데, 이거?”
“김용명? 진짜 처음 듣는 이름이네.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 같은데 나온 적은 있어?”
“나가기야 꾸준히 나갔지. 대부분 예선 탈락 해서 아예 방송에 안 나간 적이 더 많을걸?”
“실력이 없나 보네.”
“아냐. 노래 잘해.”
“근데 예선을 탈락해?”
“잘 하긴 하는데… 애매해. 나이도 애매하고, 얼굴도 애매하고… 참나, 사연도 애매하네.”
“콘셉트도 애매하지… 목소리에 힘도 있고, 잘 부르긴 해. 못 부르는 실력 아냐. 그 정도 부르는 애들이 차고 넘치는 게 문제지.”
“아니, 금향아. 말 나온 김에 전화 넣어봐. 곡 보내주고, 마음에 든다고 하면 우리 회사에서 곡 내주겠다고.”
이건 또 무슨 전개일까? 또 한 번 인생이 급류를 탄 느낌이다. 용기 내, 겨우 한 발짝 뗐을 뿐인데, 그 발 뗌이, 겨우 한 걸음 나아간 행동이, 이리저리 길을 내며 나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