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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den Apr 15. 2025

카지노 게임

내안에는 더이상 자라지 않는 스물여덟의 내가.

2010년 여름의 끝자락, 더위를 보내는 폭우가 원없이 쏟아지던 날 결혼했다. 이런 날 누가 와줄까 싶게 한 치 앞도 보기 힘들 정도로 비가 쉴틈없이 퍼붓던 그 날, 결혼식장에서 사회를 봐주시던 남편의 친구가 돌연 우리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사전에 상의되지 않은 급작스러운 이벤트였던 터라 대답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채 쭈뼛대며 마이크를 넘겨 받았다.


“부모님들과 하객을 향해서 하고 싶은 말씀 한마디씩 해주세요.”


“………”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던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혼을 준비하며 느꼈던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 했다.


지금까지‘나’ 로만 살았습니다. 피곤하면 자고, 쉬고 싶으면 쉬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었습니다. 나 하나만 생각하면 되었는데결혼을 준비하면서는 ‘나’ 가 아니라 00씨의 아내, 우리 부모님의 딸, 시부모님의 며느리여야 했습니다. 그건 저에게 의무감과 책임감이 생긴다는 의미였고, 혼자만 생각하면 되었던 일상에서 가족도 생각하는 일상으로 나아가는 일이었습니다. 00씨를 좋아하는 일이라면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결혼준비는 몹시 쉬울 줄 알았지만 아니었습니다. 준비만으로도 이렇게 어려운 결혼, 앞으로 많이 겸손해지면서 배우고 깨달아가는 인생을 살겠습니다.”



천둥과 같은 함성, 우뢰와 같은 환호. 까지는 아니어도 많은 분들이 박수를 쳐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엄마는 친구분들로부터 딸을 참 잘 키웠더라는 얘기를 많이 전해들었다며 자랑스러워 하셨다. 아빠는 드디어 내가 철이 든 것 같다고 안도하셨을 것 같다. 그러나 저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결혼도 전부터 갈등과 반목, 사과와 화해를 반복하면서 벌써부터 지쳤던 나의 하소연에 가까웠고, 그걸 한껏, 있는 힘껏 미사여구로 포장한 것에 불과했다. 앞으로도 나만 생각하면서 살고 싶었다. 그러나 결혼과 동시에 나만 생각한다는 건 애초부터 없었던 판타지처럼 전생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글을 쓴 지가 오래 되었다. 휴직을 하고는 내 삶의 낙을 찾는 일에 몰두하고자 했었고, 좋아하는 일들을 찾고 그것들로 일상을 채웠다. 그 일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들 중 하나가 글쓰기였다. 무엇이 될 지 모르는 글감이라는 씨앗이 점점 자라나는 과정과 열매를 보는 일이 즐거웠다. 심기는 어려웠지만, 일단 심고 뿌리를 내린 씨앗은 겉잡을 수 없이 정처도 모른 채 내달렸다. 마무리를 예상하지 않고 그저 펜닿는 대로, 생각이 인도하는대로 썼다. 그걸 당사자이자 관찰자가 되어 지켜보는 건 마치 나를 주인공으로 삼아 촬영하는 영화를 보는 일같아서 흥미로웠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멈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했는데 그게 바로 3월 신학기 시즌이었다.


나에게는 두 아이가,

여섯살 터울인 두 딸이,

한국의 교육과정에서 단 한 번도 같은 학교에서 만날 일이 없는 두 자녀가,

초등학교 1학년과 중학교 1학년에 동시에 입학하게 된 2세 두 놈이 있다.


그냥 신학기여도 사실 눈코뜰 새 없을 시기에, 아이들은 입학을 했고, 한 명을 입학시켜도 분주하고 혼란스러울진대, 둘을 각기 다른학교에 보내고 적응시켜야 했다. 그건 동시에 진행되는 두 번의 입학식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였고, 3월 한달 동안 적어도 두 번 이상의 공개수업과 학부모총회, 아이들의 상담과 그리고 반모임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뿐일까. 교육열높은 우리동네에서는 요일별 학원스케줄과 아이시간표의 개략적인 틀을 완성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두 개의 일을 동시에 진행하지 못하는 내 머리는 예열이 늦었고 과부하에 걸린 채로 버벅댔다. 첫째의 스케줄을 기억하면 둘째의 하교를 깜빡했고, 둘째의 학원을 챙길라치면, 하루종일 배고파하는 첫째의 간식을 까먹는 식이었다. 제대로 해내고나 그랬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나는 둘의 뒤치다꺼리는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흉내만 내다가 그만 몸살에 걸렸다.


어떤 ‘카지노 게임’을 한다는 건 그렇게 내가 후순위로 밀리는 것, 다른 사람이 내 우선순위가 되는 것, 그래서 내가 점점 지워지는 것이었다.서서히나이가 들어가면서 알겠다. 왜 어른들이 어깨가 무겁다고 하는지, 책임만 남은 인생이라 버겁다고 얘기하는지 말이다. 결혼을 하고 16여년이 흘렀, 시간이 갈수록 나에게는 역할이 하나씩 추가되었다. 우리 엄마아빠의 딸에서, 두 아이의 부모로, 남편의 배우자에서, 시부모님의 며느리까지. 그러니까 ‘카지노 게임’ 을 하나씩 늘려가는 일이 결혼생활이었고 내가 꾸려나가는 가정경영이었다. 공부만 잘하면 칭찬을 듣고 일만 잘해도 치켜 세워주던 시절의 나는 없어졌고, 나보다 자식을, 나아닌 남편을, 나말고 부모를 먼저 생각하는 게 현명한 내 역할이 되었다. 그게 또한 어른이 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가만히 떠올려 보면, 나는 지금도 스물 여덟의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것보다 더 어리진 않은 것 같고 이십대 후반 즈음의 사고방식으로 지금도 살고 있다. 두 번이나 출산을 했지만 여전히 영화의 잔인고 무서운 장면은 보지를 못해 귀와 눈을 가린채 웅크린다. 아이들의 찢어진 상처를 처치하는 일을 겁이나서 여전히 주저한다. 내 앞가림은 스스로 해야 부모님에게 짐이 되지 않는다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끔 깎아지른 산맥같이 든든하고 높게만 보이는 아빠의 그늘에서 목놓아 엉엉 울고 싶다. 엄마를 붙잡고 발을 동동 구르며 밑도끝도 없이 때를 쓰고만 싶다. 아이들에게는 인간관계에 대한 여러가지 조언을 잔소리처럼 늘어놓지만, 아직도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인지 정답을 알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어떤 인생이 좋은 인생인지, 괜찮은 삶인지살수록 더 모르겠다. 이것저것 다 거슬리고, 연속되는 사소한 불운들로 심사가 뒤틀린 날에는 다 때려치우고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럴때면 나는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면서 허허벌판에 혼자 덩그러니 내던져진 느낌이 들다. 그러면 학교에 필을 안가지고 갔다며 울면서 집에 뛰쳐왔던 3월 초어느 날의 둘처럼 나도 무섭고 막막하고 겁이 난다.


스물 여덟의 마음에서 한 치도 더 자라지 않았지만, 실은 마흔 넷이나 된 내가 치러낸 신학기가 이제 한 달여를 지났고 아이들도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 적응을 하는 중이다. 달뜨고 들뜨던 새학기의 어색함과 설렘이 이제 그저 평범한 하루로 내려앉은 요즘, '카지노 게임'을 생각하며글을 쓴다. 늘 바라던대로 기도한다.


“오늘 하루만 무사히.”


이렇게 나는 <폭싹 속았수다 속 대사처럼 몸은 늙어가는데 마음만은 늙지 않은 채로, 나는 스물여덟인데 ‘어머님’, ‘아줌마’ 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결국에는 ‘할머니’ , ‘어르신’ 으로 불리게 될 날을 향하여 여러가지 카지노 게임들을 해내면서 하루 하루 살게될 것이다. 어디에 닿을지 모르는 채로. 높고 위엄있던 나의 엄마아빠, 한없이 든든하고 험준하던 그 산맥은 앞으로 야트막한 동산이 되어갈 것이다. 그럼 그 땐 내가 우리엄마아빠의 산맥이 되어드려야 할텐데, 벌써부터 덜컥 겁이난다.



이렇게 어리고 겁많은 내가, 이다지도 부족하고 모자란 미생이, 엄마 카지노 게임을, 배우자 카지노 게임을, 딸 카지노 게임을 하려니 정말 환장할 카지노 게임이다. 그래서 그릇은 오지게 작고 겁은 오지게 많은 나는 오늘도 오늘 하루만 무사히 넘기게 해달라고 빌며,나에게 주어진 카지노 게임들을 꾸역꾸역 해내는 중이다. 그럼에도 나를 잃지는 않으려 애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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