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바보는 그 후 어떻게 되었나
어느덧 3학년 2학기 가을을 보내고 있었다. 친구들은 벌써부터 임용고시를 준비하느라 학원을 다니고 스터디를 했다. 나도 슬슬 마음이 바빠졌다. 친구를 따라 노량진에 있는 학원을 둘러보았다. 모든 강의가 두 달에 걸쳐 완성되는 강의였고, 교육학과 영어교육학 두 과목을 수강하려면 60만 원이 필요했다. 그 돈을 충당할 재간이 없었다. 병원에서 야간 경비를 하며 받는 돈은 약간의 생활비와 등록금으로 소진되어 여유가 전혀 없었다.
학원을 포기하고 독학으로 해야 하나 고민이 깊어지던 어느 날 30대 후반의 환자가 나를 불렀다. 척추 디스크로 장기 입원했던 환자였는데 쾌차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퇴원하려 한다고, 그래서 육체노동으로 살기는 글렀으니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려 한다고 했다. 나를 찾아온 목적은 영어 과외를 받고 싶다는 거였다. 나는 거절당할 요량으로 월 20만 원을 불렀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내 제의를 수락했고 당장 다음날부터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영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 나는 과외를 해 본 경험이 전무했다. 그의 목적은 시험 합격이었고, 나의 목적은 학원비 조달이었다. 어떻게든 석 달은 채워야 했다. 그는 오랜 입원으로 수입이 전혀 없었고, 아내가 혼자 벌어 생활하는 것 같았다. 월 20만 원은 내게도 그에게도 거금이었다. 병원이 문을 닫으면 원무과는 과외방이 되었다. 나름 열심히 가르쳤지만 그의 학습력은 생각보다 떨어졌다. 석 달 째를 마감하던 그해 말 그는 과외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나의 부족한 가르침이 너무 미안했다. 그는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고, 나는 학원비를 얻었다. 안 그래도 등이 아픈 그를 등쳐먹었다.
아침 9시부터 시작하는 학원을 다니려면 새벽부터 집을 나서야 했다.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학원이 문을 여는 새벽 5시 반부터 앞자리가 채워진다고 했다. 병원을 그만두어야 했다. 12월까지만 일을 하겠다고 원장에게 말했다. 돌아갈 곳은 없었다. 지난해에 살던 학교 앞 독서실은 폐업했고, 방값은 비쌌다. 12월 마지막 날 어디선가 빌린 리어카에 짐을 싣고 무작정 병원을 나섰다.
몸도 춥고 마음은 더 추웠다. 눈발도 날렸던 것 같다. 몇 발짝 걷지 않았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산업재해로 척추를 다쳐 입원 중이던 50대 후반의 환자였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분이었다. 자신의 집 옥탑에 작은 방이 하나 있으니 그리로 가자고 한사코 내손을 끌었다. 방세는 필요 없으니 전기세 요량으로 월 만 원만 내라고 했다. 너무 감사했다. 하지만 월 만 원은 터무니없는 돈이니 그럴 수는 무료 카지노 게임, 난 월 이만 원을 내겠다고 했고, 그는 그러라고 했다. 옥탑방은 생각보다 크고 준수했다. 화장실과 세면장이 없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보일러도 있었다. 물론 기름값이 없어 사용은 못 했다. 그 방에서 졸업할 때까지 말도 안 되는 월 이만 원을 내며 1년 여를 살았다. 내가 등쳐먹은 두 번째 척추 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