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완은 23년간 진행하던 라디오를 마무리했다. “끝 곡은 이걸로 해야지 했어요. 이 곡이 몇 분이나 되는지나 알고 올 걸. 이별은 준비 없이 하는 거구나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어요. 끝 곡 띄워드리면서, 이게 어디서 마칠지 모르겠네요.” 구태여 말하자면 흐느껴 울기 시작한 것은 라디오가 비로소 끝나고 광고로 넘어갔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연주를 멈추지 않은 것에 감히 예상하기를 관객이 떠나고 난 뒤, 무대와 이별하는 마음일 것이다.
이걸 SNS(@_o.r.c.a)에 업로드 했을 땐 나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모르겠다. 이미 1년 전의 일 일뿐만 아니라, 이 곡이 무슨 곡인지도 몰랐을 뿐더러 단순히 한 사나이의 우는 모습이 너무도 가슴 아파서-였을 것이라 예상한다. 1년이 지난 지금,—이 곡 제목과 가사를 알아버린—오늘만큼은 적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어떤 사랑에 대해 고민했다. 엊그제의 일이었는데, 사랑이란 행동에 대하여-였고, 그것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나, 너, 우리. ’나’는 사랑을 주는 법, ‘너’는 사랑을 받는 법, ‘우리’는 뭐라 형용할 수 없지만 앞서 말한 ‘나’와 ‘너’의 더하기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에 초월하는 힘이 있다고 믿는 나는 모순적이게도 사랑을 하지 않을 태세로 오늘에 있다. 사랑할 처지가 안 된다고,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고, 그러니 사랑할 수 없다고. 초월하는 사랑을 해본 적이 있으므로 ‘나’까진 안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너’는 아직 모르겠다. ‘너’는 스스로와도 관련이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보편적인 연애를 비하하거나 경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시대의 연애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가벼워 보이기도 하다. 내가 쓸모없이 신중하고 무겁게 여기는 것이라고 보여질 수도 있다. 한 편으론 그것에 반감도 있었다.
그래서 왜 나는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냐면 사랑을 경험해봤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도 있다. 초월의 사랑을 누려본 것. 깊고 진한 정상에 다다라 본 것. 그곳과 헤어지고 멀고 다른 정상을 하염없이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무릎은 전과 다르다. 경제적 여유, 사회적 지위, 심리적 상태가 시대상에 비해 보잘 것 없다. 고갤 돌려 몇몇 오름을 본다. 세 가시가 박힌 무릎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나는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은 틀린 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앞서 말한 모순이 여기에 있다. 초월하는 사랑만이 사랑이 아님을 안다. 플라톤이 향연에서 말한 사랑만이 사랑은 아니다. 무지개의 경계를 나눌 수 없듯이, 찻물의 뜨겁고 차가움을 나눌 수 없듯이 사랑은 그렇다. 읽는 당신이 하는 사랑 또한 당신에게 사랑임을, 내가 하는 사랑과 다르지 않음을 받아들이려 한다. 단지 나는 ‘나’로서 사랑에 충실할 것을 안다. 그러다보면 ‘너’도 알 수 있겠지, ‘우리’를 할 수 있겠지라며 사랑을 잰다. 가시가 박힌 채 무릎에 힘이 깃든다.
한때 나는 사랑을 사랑하자고 떠들고 다녔다. 그 문장을 다시 쥔다. 언젠가 어떤 정상에 다다르고, 다시 내려올 것을 안다. 나는 최선의 사랑을 할 것을 안다. ‘나’가 사랑했을 아무개는 ‘너’를 알길 바란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 말은 꼭 하고 싶었다는 거다.
‘김창완 - 이 말을 카지노 게임 싶었어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