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새벽의 고요함을 식사준비시간으로 썼다. 글 대신 밥 짓는 시간으로. 글쓰기와 요리는 한곳에 집중하여마음을 쏟는다는 점에서 서로 맞닿아 있다. 누군가 받아볼 따뜻한 밥상과 글상을 떠올리며 도착지를 향해 나아간다. 뱃속을 따뜻하게 데울 밥을 짓고 마음속을 따뜻하게 채울 글을 짓는다. 오늘 지은 밥이 사랑하는 가족이 하루를 보낼 연료가 되고 오늘 짓는 글이 내일 또 쓸 수 있는 소소한 근력이 된다.
햇볕 좋은 날엔 예쁜 유리병에 햇살을 고이 모아두었다흐린 날에 꺼내보고 싶다. 적당한온도, 감성, 충만함 삼박자가 고루 맞는 날엔 매일 듣던 라디오도 음악도 잠시 꺼둔다.행복한 순간이 달아날까 봐금방 흘러가버릴까 봐 조심조심 걷던 걸음도 멈춰 선다.베란다에 서서 온몸으로 햇볕을 받는다.지난 계절 젖어있던 카지노 쿠폰까지바짝 말려둔다.
낮에 햇볕을 부지런히 받아둔 덕분에 오랜만에 긴 잠을 잤다.침묵과 도톰한 어둠이 길어지는 겨울아침, 12월이 내민 서늘한 공기위에 포근한 담요를 두른다.익숙한 자리에 앉아 아침이 오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새벽을 개키고 아침을 꺼내는 소리,잠든 물건의 고른 숨소리, 가전기기의 간헐적인 뒤척임, 사랑하는 아이가 꿈속을 거니는 소리, 모든 움직임이 고요와 침묵 속에서 자란다.꿈을 꾸며 시작할 힘을 축적한다. 사각거리는 펜 소리가 눈 소리를 닮아간다는 건 겨울이 조금씩 깊어간다는 뜻. 첫눈이 예고된 하루, 밤새 기다린 설렘이 하얗게 내린다.
한 사람 때문이다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가
빈 가슴에 뿌리를 내린다
눈물이 되었다 웃음이 되었다
결국 노란 꽃송이로 피어낸다
보이지 않는 안갯속에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건
언제 어디서 사랑할지 모를
한 사람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피어날지 모를
꽃송이 때문이다
누군가의 심장에서 피어나
하나의 희망이 되고
사랑이 전부가 되는
한 사람때문이다
아픔이 있어야 새로움이 시작된다. 아파야 탄생하는 글. 몸이 아프고 나서야 나오는 글이 있다. 마음이 찢기고 부서져야 비로소 흘러나오는 글이 있다. 슬픔은 잔인하나 다시 쓸 수 있는 원동력, 삶의 원천이다. 활자로 새겨야 생생해질 운명. 흐릿한 삶을 도려내 백지 위에 옮긴다. 하얀 대지 위에선 누구도 하찮지 않다. 마음을 다해 쓸 의무와 읽힐 권리를 위해 쓴 시간은전혀 아깝지 않다.
글쓰기는 작고 나약한 인간이 잊히지 않으려, 뒷걸음치지 않으려 치는 발버둥, 상처 입은 자의 비명, 조용한자가 슬픔을 드러내는 방법, 어깨에 반쯤 흘러내린 셔츠, 아직도 웅크리고 있는 가슴속 아이를 드러내는 일이다. 아직 서툴고 두렵지만 오늘도 해낸다. 아파야 살아가는 운명에 맞서 걸어간다.
내게는 절망감에 맞서 싸울 자원이 있다는 사실, 내 시간을 잘 쓰고 내 영혼을 잘 돌볼 능력이 있다는 사실, 외로움이 우리에게 닥치더라도 우리는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으리라는 사실. 그날은 그렇게 흘러갔다. 고독한 일요일이었지만, 결국에 외로운 일요일은 아니었다.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