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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추억 Apr 25. 2025

카지노 게임와 옛날이야기

딸아이 얼굴을 안 본 지 오래되었다. 영상통화야 하루에 수십 번도 하고 있다지마는 실물을 봐야 보는 것이니...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괴로운 것은 내 아픈 몸이
아니다.
아빠가 바지를 다 빨아버려서 뭐 입고 학교 가냐고 아침에 딸아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가 세탁기 돌리고 바로 잤단다. 피곤해서 세탁기가 다 돌아가기 전에 잠들었을 터. 남편도 오죽 힘들까. 새벽 출근에 밤늦게 집안일까지, 고단함이 그 몸을 짓눌렀을 거다.

"어디 어디 열어봐. 그거 입고 가~."

달래고 얼러서 내 목소리로만 등교를 시킨다. 내가 장애를 가진 사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꼭 이럴 때다. 팔다리 멀쩡한 내가 딸아이와 떨어진 다른 공간에서 내 몸을 전혀 쓸 수 없을 때 말이다. 목소리로만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 속 시원히 내 손으로 옷을 꺼내 주고 싶고 지각을 면하려면 서둘러야 한다고 엉덩이를 툭툭 건드리고도 싶다. 학교가 코앞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몸은 분명 가만있는데 목소리로만 모든 것을 해내야 할 때 그 어떤 노동보다 힘이 부친다. 신경이 곤두서서 뇌혈관이 지끈거리는 느낌이다.

아빠가 하는 요리가 이상하단다. 김치찌개에 계란을 넣었다고 한다. 매일 똑같은 것만 먹는다고 투정하는 아이, 대한민국에서 배고프다고 수화기 너머로 우는 아이를 마주하면서 이게 실화인가 싶었다. (오늘 방과 후, 배달로 엽떡을 시켜 주니 신나게 먹방을 찍었다.)

엄마 없는 티가 나는 아홉 살 아이로 인해 몸 아픈 걸 잊는다. 마음이 더 아파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인데 내 몸이 이러니 가정이 위기다. 집구석은 안 봐도 뻔하다. 남편이 치워도 치워도 3차 세계대전일 거다.

밤마다 휴대폰으로 통화하면서 딸에게 카지노 게임를 들려준다. 아이가 잠들어 쌔근쌔근 숨소리가 나면 내가 전화를 끊는다. 사실 기운이 없어 노래가 힘들다. 2인병실을 혼자 써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작은 소리라
하여도 한밤중에 방음이 될까 싶어 눈치를 본다.

카지노 게임 메들리가 있다. 자장자장 우리 아가에서 시작해서 섬집아기,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등등 최근 추가된 카지노 게임 메들리의 마지막 트랙이 있는데 가사가 헤어져 있는 우리 모녀와 찰떡이다.



바람이 머무는 날엔
엄마 목소리 귀에 울려
헤어져 있어도, 시간이 흘러도
어제처럼 한결같이

어둠이 깊어질 때면
엄마 얼굴을 그려보네
거울 앞에 서서 미소지(으)면
바라보는 모습
어쩜 이리 닮았는지

함께 부르던 노래 축복되고
같이 걸었던 그 길
선물 같은 추억되었네
바람 속에 들리는
그대 웃음소리 그리워

<바람이 머무는 날-조수미​


조수미는 세계적인 소프라노이고 나는 세계적인 아무튼 나다. 최대한 맑게 불러본다.
카지노 게임를 들려주면서 속으로 얼른 자라~하는 주문도 함께 넣는다. 쉽게 잠들지 못하는 딸아이에게 통화 중 녹음기능을 통해 노래를 보냈다. 반복해서 들으라고. 하지만 내가 딸아이 얼굴을 실제 봐야 보는 것이라 했던 것처럼 딸아이도 엄마의 실시간 목소리를 원한다. 그나저나 핸드폰이 내 공명소리를 녹음 못하는 기술적인 한계가 있음을 처음 알았다.

엄마가 잠도 쏟아지고 기운이 없어 노래를 더는 못하겠다고 하니 딸아이는 그럼 카지노 게임를 해 달라고 한다.
그렇게 또 급조해서 만들어 본다. 카지노 게임 하나를. 카지노 게임를 팔베개 삼아 어여 자거라.

"카지노 게임 카지노 게임에 아주 먼 카지노 게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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