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그림자
장을 치른 직후였다.
짐은 챙겨야 했기에 그들은 언덕 아래로 내려가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순이의 집은 이미 낯선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순이와 춘식은 몹시 당황했고 가슴이 미어졌다.
윤석의 흔적은 말끔히 지워져 있었고 함께 살아온 살림살이도 하나 남김없이치워져 있었다.
“여긴 왜 온 게요?!! 어서 나가시오. 약속대로 이제 이곳은 온전히 우리의 집이오”
"하지만 짐은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짐? 짐이라 하셨소? 잊었나 본데 김사장이 내게 진 빚은 이 집값 이상이오. 그래서 이 집 안의어떤 물건도 당신들에게 줄 수가 없습니다. 어서 나가 주시오."
누군가의 싸늘한 말끝이 순이의 등을 밀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더는 이 집에 있을 수 없다는 현실이 벼락처럼 내려앉았다.
순이는 마당에 남겨진 채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서 있었다.
그때였다.
"순이야!"
어디선가 달려왔다.
헐레벌떡 뛰어온 이는 다름 아닌 친정어머니, 현수였다.
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듯 딸을 꼭 껴안았다.
순이 역시 엄마 품에 고개를 묻고는 소리 없이 어깨를 떨었다.
"짐은... 짐은..."
현수가 조심스레 물었으나 순이는 고개만 천천히 저었다.
챙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여섯 살 된 아들 춘식이의 손만 꼭 붙잡고 있었다.
"됐다. 우리 집으로 가자. 더 이상 이들에게 뭘 기대할 순 없다."
현수는 순이와 춘식의 손을 꼭 잡았다.
세 사람은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왔다.
바람이 불어와 마른 나뭇잎이 소리를 내며 굴렀고 노을은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에 묻혔다.
그렇게 그들은 새 삶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현수는 순이와 춘식이를 데리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언 땅 위를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동안, 순이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춘식이의 작은 손만을 꼭 잡고 있을 뿐이었다.
현수의 집은 허름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동네에서는 꽤 사는 집이었다. 튼튼한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마당에 잘 가꿔진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고, 돌계단을 따라 들어간 안채는 기와지붕 아래 기품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말기인 그 시절에 그들은 그 많던 재산을 모두 다 일본에 빼앗기고 겨우 이 집만 남은 터였다.
문이 열리자, 순이의 동생들이 달려 나왔다.
그들은 말없이 순이와 춘식이를 안아 주었다.
저녁 햇살이 긴 그림자를 만들고 세상은 여전히 거칠고 매서웠지만그 집 안에서 만큼은 포근한 숨결이 살아 있었다.
그 숨결 위로, 다시 시작되는 삶이 피어나고 있었다.
순이는 공장도 집도 수박밭도 모두 빼앗겼고 순이와 윤석이 애써 마련해 놓았던 땅들도 모두 넘어갔다.
심지어 현수의 선산까지도 다 저들 손에 넘어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잃었지만 가족의 사랑과 어머니의 집만큼은 아직 건재하였다.
친정집인 이 집은 그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마지막 품이기도 했다.
하지만 순이와 춘식은 그 큰집 안에서도 기운 없이 서 있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기에 말이 필요 없었다. 순이는 첫날밤, 방 안 구석에서 웅크려 앉은 채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며칠 동안, 집 안은 숨죽인 듯 조용했다.
그리고 순이는 마치 숨조차 쉬지 않는 사람처럼 몇 날 며칠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긴 잠에서 깨어난 순이는 온종일 울었다.
그녀는 울다 지치면 또 잠이 들고 깨어나면 또다시 울었다.
그렇게 순이는 크게 앓고 또 앓았다.
현수는 매번 말없이 따뜻한 밥을 차려냈고 영이와 철이는 순이와 춘식이를 보살폈다.
어느 날 영이는 순이의 옆에 앉아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고는 순이의 손을 잡았다.
"언니! 일어나 볼까? 밥 먹고 자야지... 우리 춘식이가 언니가 밥을 안 먹으니까 걱정을 많이 한데이~ 힘들어도 한 술 뜨자. 춘식이 생각해서라도 조금 먹자. 언니, 응?"
순이는 글썽거리더니 또 울기 시작했다.
"언니~ 내도 언니맴 다 안다. 그래도 인자 일어나자. 춘식인 이제 언니 니밖에 없다."
순이는 영이를 쳐다보다가 춘식이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봐라, 아도 아프다. 저 어린것의 하늘이 무너졌다. 집도 없어지고 얼마나 충격이 크겠노."
순이는 흐르던 눈물울 닦으며 일어나 앉았다.
철이는 말없이 춘식이 옆을 지키고 있었다.
순이는 눈치를 보고 있는 춘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춘식이는 어미 품에 안겨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아가 말을 안 한다. 집에 와가 여즉 한마디도 안 하드라. 우이하노...."
밥상을 내려놓으면서 이들을 보고 있던 현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춘식아~ 와? 목이 아프나?"
놀란 순이가 춘식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춘식은 대답대신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야가 언제부터 그럽니까?"
"집에 와가 말을 한마디도 안했닥 카이.."
하나뿐인 순이의 아들 춘식이 연이은 충격에 말을 잃었다.
춘식이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고 이젠 아버지마저 잃은 이 작은 아이는말마저 잃었다.
순이는 춘식을 끌어안고 또다시 눈물을 흘리지만 춘식은 여전히 무표정한 표정으로 순이 품에 안겨 있었다.
순이의 억장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정신이 바싹 들었다.
그날 이후 순이는 매일 춘식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철이도 자주 춘식이와 연을 날리고 또 글도 가르쳐 주었다. 영이는 춘식이와 그림을 함께 그리고 수를 가르쳐 주었다. 그들의 따뜻한 배려 속에, 순이는 조금씩 힘을 얻었고 춘식도 입을 열기 시작했고,어느 순간 활짝 웃으며 뛰어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영이는 조심스럽게 물레를 꺼냈다.
"언니, 우리 이거 다시 해볼까? 전에 언니가 만든 저고리, 내가 아직도 기억해."
순이는 처음엔 고개를 저었지만, 영이의 눈을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잊고 있던 감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며칠 후, 안채 뒷마당에서 바람결에 실려오는 물레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순이는 손에 익숙한 감촉을 되살리며 천을 짰고 영이는 그걸 받아 재단했다. 가끔은 시장에서 사 온 나물을 다듬어 말리기도 하고 동네 사람들의 옷을 고쳐주기도 했다.
"언니야, 예전보다 더 잘 짜는 것 같다. 손이 기억하는가 봐."
영이의 말에 순이는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순이는 다시 천을 짜고 바느질을 시작했다.영이와 함께 물레를 돌리고 손끝에 혼을 실어 옷을 지었다.
시장에서 일거리를 받아다 수선도 하고 산과 들에 나가 나물도 땄다.
온종일 일에 매달려 있다가 어스름이 내리면 가족 곁으로 돌아오는 삶이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렇게 순이는 기운이 돌아왔다.
춘식이도 이젠 웃음을 되찾았다.
영이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장난을 치고 철이의 무릎 위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아이의 눈빛에 다시 빛이 스며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순이는 조용히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엔 윤석이 남긴 찢긴 문서 조각들이 들어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스치는 그 문서 위에 적힌 낯선 이름들, 도장이 찍힌 조각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순이는 한 가지는 알 수가 있었다.
분명 윤석은 죽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녀의 손이 그 문서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어두운 밤, 새로운 시작이 그 손끝에서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다음날 밤, 순이는 남편 윤석이 쓰러져 있던 그날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찢긴 문서를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날 챙겨 온, 찢어진 문서들과 붉게 얼룩진 종이들이 담긴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순이는 그것을 꺼내어 조심스레 펴고 살펴보고 보고 또 보았다.그리고 잠시 후 순이는 그것들을 한 조각 한 조각 이어 맞춰가며필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드디어 그 조각이 모두 맞춰졌고 마지막 한 글자를 또박또박 써 내려가고 나서야 펜을 놓았다.순이는 이제야 내용이 선명히 보였다.
정리해 보니, 두 장의 문서였다. 하나는 명단록이고 다른 하나는 공장 명의이전 관련 서류였다.
'이건.... 명단록과 공장 문서다. 공장의 일부를 독립군의 활동을 위해 그분들에게 넘기려 했던 거구나!!! 그렇다면.... '
명단에는 낯익은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그중 몇은 시장에서 보던 노파, 동네 양복점 주인도 있었다. '의광회' 문서 한구석에 찍힌 도장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은... 그분들에게 공장을 넘기려 했던 거구나..."
순이는 이 일을 계기로 윤석의 죽음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숨겨왔던 신념과 용기에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그림자 하나.
'윤석 씨가 남긴 문서에 적어둔 인물들의 이름, 낯설지 않은 몇몇 사람들....
그들은 어쩌면 지금도 그 길 위를 걷고 있을는지도 몰라. 그렇다면... 만일 그들의 활동을 일본에서 먼저 눈치챘다면....그들의 정체를일본 쪽에서 눈치채고 움직였다면..... 그런데 그 명단의 끝에는 윤석 씨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순이는 며칠째 생각에 잠겼다. 몇 날 며칠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윤석 씨는 상처가 없었어. 하지만 손에는 피가 흥건했고 손톱 밑은 붉은 무언가가 채워져 있었어. 뭐지? 뭐지? 도대체 그 손의 피는 뭐지? 손톱밑에 피 묻은 이물질들은 뭐였지? 그의 눈은 왜 그리 붉게 충혈되어 있었던 거지? 도대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뭐지? 뭐지?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뭐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윤석의 시신은 깨끗했다. 칼자국 하나 없이, 그저 손에 피가 흥건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손톱 밑에는 검붉은 찌꺼기가 끼어 있었다.'
'왜 손에 피가 있었지? 누굴 쥐고 버틴 걸까? 그 눈은 왜 그렇게 충혈되어 있었던 거야...'
순이는 자신이 뭔가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되뇌었다. 이 죽음은 단순한 자살도, 사고도 아니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찢긴 문서가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반전적인 추론을 하며 고민을 하였다.
“하지만…”
순이는 종이에 묻은 얼룩을 다시 쓸어보며 중얼거렸다.
“상처 하나 없었는데… 왜 손에 피가… 그렇게 많이 묻어 있었던 거야?”
너무나 많은 양의 피,마치 무언가를 움켜쥐기라도 한 듯이손톱 밑에 끼인붉은 이물질과 그의 붉은 눈이 마음에 걸렸다.
‘눈도… 빨갰어. 충혈된 게 아니라, 터진 건가 아니 아니야.’
'그건 죽음의 순간에도 무언가를 보았다는 증거인 건가?그 어떤 공포, 혹은 진실을 본 것이었을까?'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순이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조각난 진실을 그녀는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놓친 게 있어… 뭔가가 있어.
그 피는… 그 문서는… 도대체 그들은 무얼 그렇게까지 숨기려 했던 거야.
일본 순사들은 왜 그리 급히 그이를 데려가려 했던 거지?'
순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금 그녀가 가진 건 단서였고 그 단서 위에 드리운 것은 진실을 숨기려는 누군가의 ‘의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