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추리소설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장인어른. 올가는 반드시, 반드시 제 모든 걸 걸고 지켜줄 겁니다. 지켜봐주십시오, 장인어른.”
차르 시대의 겨울궁전(Зимнийдворец)이 보이는 ‘궁전 다리’에서, 네바 강의 흐르는 물을 향해 경례했다.
내 아내 올가 이바노브나 마카로바 중위가 간호장교로 임관했던 해에 장인어른은 돌아가셨고 화장되어 이곳에 뿌려졌다.
순양함 아브로라를 타고 이 강을 거슬러 올라와 10월 혁명을 주도했던 군인들 중 한 분이셨던 아버님의 뜻을 따른 장례였다.
그리고 지금 내가 레닌그라드의 방공포대에 배속된 지 이틀 만에 독일군 전투기를 격추하여 높으신 분들의 치하를 받은 날로부터 20일이 지났다.
높으신 분들의 치하를 들었을 때 나는 곧 모스크바로, 올가 곁으로 돌아가게 되리라 믿었다.
늘 그랬듯이 상황은 내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았다.
1938년에 일본 육군이 발표한 ‘조선인 특별지원병제도’인가를 보고 기술이라도 배워보자는 생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내게 준 보직은 소총수, 아니 총알받이였다.
이듬해에는 일본군이 몽골과 만주국의 국경지대인 노몬한에서 소련군과 싸웠고, 나는 거기서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럼으로써 내 고향인 부산으로, 어머니에게로 돌아갈 길은 영영 사라졌다. 그 대신 소련군 간호장교인 올가를 만났다.
그런데 그녀와 사는 행복 또한 아주 잠시였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면서 전쟁이 터졌고,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수도이기도 했던 올가의 고향 레닌그라드는 포위당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내 신분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이렇게 올가에게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화가 치밀어 올라 레닌그라드 시의 지역군 사령부로 곧장 귀대하지 않고 일부러 먼 길을 택해 돌아다녔다. 거기서 내게 주어질 일도 딱히 없으니까.
동장군(冬將軍)도 얼어 죽을 날씨 덕인지 즈나멘스키 광장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기관단총을 든 병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흙을 일궈 감자와 양배추를 재배해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던 공원도 지금은 적막했다.
종종 독일군이 쏴대는 포탄이 터지는 소리는 내가 지금 이승에 있음을 깨우쳐줬다.
조선 땅에서 평생 농사꾼으로 살아온 외할아버지의 영향 탓인지, 나는 멀쩡한 땅이 공원으로 낭비되는 게 못마땅했다.
하지만 올가는 공원이야말로 도시 거주 프롤레타리아가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공공의 정원 같은 공간이라며 늘 야단하곤 했다.
쥐를 잡아 거름으로 써가며 화분에 양배추를 재배하는 그녀가 말이다.
‘그럴 때 당신은 꼭 누나 같아.’
나이도 계급도 다 나보다 위였지만 항상 나에게 뭔가를 가르칠 때만 그런 내색을 하는 그녀를 떠올리면서, 그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면서 피식 웃었다.
집을 나와 떠돌던 내게 기술을 가르친 고바야시 사장의 자동차 정비소가 망하고, 미안해하던 사장이 군대 시절에 알고 지낸 황군(皇軍) 장교 나으리 덕에 조선인 지원병 모집에 합격하고, 관동군에 배속되자마자 노몬한 전쟁에 투입되고, 총도 몇 번 못 쏴본 것 같은 데 정신을 차려보니 허허벌판에서 소련군의 포로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올가를 만나고….
빵 가게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이 눈에 들어오니 상념이 달아났다.
얼굴에서 기름기가 빠져 북어대가리처럼 된 사람들이 비누조각처럼 작은 빵을 받아들고, 혹시나 남에게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며 총총히 흩어졌다.
레닌그라드 시를 향한 독일군의 포위망 중 유일하게 뚫린 라도가 호수가 꽁꽁 얼어붙고 그 위로 트럭이 지나가면서, 식량과 연료가 나를 비롯한 ‘지원병’들과 함께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희망을 되찾았지만, 생활이 확 나아지지는 않자 금세 실망하는 눈치를 보였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시나브로 지켜보거나 귀를 쫑긋하고 있는 NKVD가 두려우니 드러낼 수 없었다.
“부사관 동지. 혹시 좋은 소식이 있나요?”
한 손으로는 빵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손녀의 손을 꼭 쥔 노인이 대뜸 물었다. 금발의 손녀도 갈색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봤다.
속이 쓰렸지만,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대답했다.
“예, 조만간 더 많은 빵과 석탄이 들어올 겁니다. 스탈린 동지께서는 위대하신 분이니까요. 조만간 저 빌어먹을 파시스트들을 다 박살내어 예전처럼 살게 해주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동지.”
노인은 손녀와 함께 걸음을 재촉하면서 사라졌다.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한숨이 나왔다.
포위망을 뚫고 더 많은 물자를 들여올 수단은 윗사람들이 강구해야 한다.
하지만 시민들은 하급 공산당원이자 하사에 불과한 내게 너무 많은 걸 물었다.
그리고 기대에 찬 표정을 하고 다가와서, 이렇듯 실망한 채 돌아섰다.
그래, ‘식민지 출신 프롤레타리아 총알받이’였던지라 포로인데도 정치적 쓸모를 인정받아 당원으로 벼락출세한 나 따위가 뭘 안다고….
어느 골목 안쪽에서 세 사내들이 소곤거리며 뭔가를 거래하는 게 보였다.
또 누군가가 집안의 가보를, 혁명과 폭정의 와중에도 소중히 지켜온 보석이 박힌 황금 십자가를 약간의 잡곡과 온갖 수상한 물질을 섞어 만든 ‘빵’ 따위와 바꾸는 거겠지.
군복 차림의 내가 보고 있음을 눈치챈 그들은 거래하던 물건을 외투 속에 감추고 뿔뿔이 흩어졌다.
‘흥, 얼마나 대단해서….’
하지만 시간이 적잖이 지체되었다는 걸 깨달았더니 더 길게 생각할 수 없었다.
어서 돌아가야 했다.
테렌티 시티코프 소령이 할 말이 있다지 않았던가.
이름이 똑같은 친척인 정치위원 나으리 덕분에 출세했다는 소문이 있던 그 양반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