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고, 그름, 정상, 비정상은 누가 정하는가
자기 전 약 20-30분 정도는 지브리 ost를 잔잔하게 틀어놓고 독서를 한다. 평화로운 음악과 함께 하루를 글과 함께 마무리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지금까지는 대게 철학책을 읽었다. 한 줄 한 줄 무겁지만, 무거워서 많이 곱씹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사유할 수 있었다. 독서 시간이 짧은 것도 있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무거운 탓에 많은 쪽수는 읽지 못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적은 쪽수 많은 생각이라는 효율을 낼 수는 있었지만.
난 사실 책 편식쟁이다. 자기계발서를 가장 멀리하고, 철학을 가장 가까이 두는 편식쟁이. 소설과 에세이는 매력적이라면, 읽는 정도.
철학은 가까이하면, 생각이 많아져 좋지만 이는 곧 기분 좋은 피로함으로 이어진다. 특히 이번 철학여정은 원문을 질리게 곱씹어, 잠시 다른 길에 들어서기로 했다. (물론 철학책도 빌리긴 했지만.) 그렇게 빌리게 된 책이 한강 작가님의 ’카지노 게임‘다
내용은 잘 모른다.
내가 아는 거라곤 그저 노벨상을 받으신 작가님이라는 거. 그리고 예전에 아는 후배가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는데, 우스갯소리로 나는 ‘육식주의자‘야라고 말하며, 평생 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실.
항상 대출 불가였던 책이 대출이 가능해서였을까 많은 생각에 지친 나를 소설이 이끈 것이었을까.
자연스레 내 손은 ’ 카지노 게임’를 향해 있었다
그렇게 오늘도 역시 책을 펼쳤다. 평소처럼 평화로운 음악을 틀었고, 평소와 다르게 소설 ‘카지노 게임’를 열었다. 이름만 들어선 조금 평화로운듯한 느낌이 든다. 육식이라 하면, 육식공룡, 살생, 피와 같이 조금은 날이 선 단어들이 생각나지만, 채식이라 하면, 자연, 건강함과 같은 부드러운 단어들이 생각난다.
그래서였을까 난 책도 그럴 줄 알았다.
재밌었다. 철학책보다는 비교가 안되게 책장이 빠르게 넘어갔다. 제목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평화롭지 않고, 불편하고, 불쾌한 느낌이 강했다.
온화한 단어와 평화롭게 건강한 카지노 게임을 만드는 그림이 그려질 줄 알았는데, 거친 단어들과 카지노 게임은 그저 의도를 주기 위한 도구로 보였다.
<1부: 카지노 게임
첫 시선— 『카지노 게임』—은 남주인공으로 시작하는데, 이상하게 남주인공에게 공감이 가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무엇이 평범한 걸까. 정상과 비정상이 무엇일까.
무엇보다 여주인공의 기이한 행동에 그저 화를 낼뿐 궁금해하지 않았다. 이 부분이 조금은 답답했다.
언어를 거부한 그녀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침묵은 때로 강력한 감정이 되기도, 자기 방어의 수단이 된다. 그렇지만, 말하지 않으면, 그 감정은 본인만 안다.
그래서 질문을 하지 않는 남주가 답답하여 남주인공 시선의 이야기고, 그의 생각이 들어있는 초반이었지만, 이상하게 나는 오히려, 말이 없는 그녀 쪽에 더 마음이 갔다. 그녀의 이야기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음에도.
<2부: 몽고반점
『몽고반점』을 읽는 내내, 표현 하나하나가 날카롭게 피부에 닿았다. 역겨움, 불쾌함, 그리고 눈을 찌푸리게 만드는 묘사들—처음엔 조금 지나치다 싶었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불편함조차도 작가님의 의도였다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 감추고 있는 어두운 세계를 억지로라도 직시하게 된 것이 아닐까.
특히 흥미로웠던 건 시점의 전환이었다. 시점이 바뀔수록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 흔들렸고, 누가 더 ‘이상한 사람’인지조차 모호해졌다. 어쩌면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사회엔 진리도, 기준도, 절대적인 정의도 없다고. 모든 규범은 상황에 따라, 시선에 따라 바뀔 수 있다고.
니체와 한강작가가 조금 겹쳐 보였다. 이 세상에 진리는 없다는 걸 철학으로 풀었느냐 소설로 풀었느냐.
독자에게 불편함을 불친절한 설명과 비유, 반어, 역설 등으로 표현한 니체와 사회의 어두운 면을 직설, 침묵, 잔인한 묘사, 시점의 전환 등 직접적으로 나타내며 독자를 불편하게 한 한강 작가.
한강 작가도 니체에게 영향을 받았을까.
가끔은 책을 읽다가, 참기 힘든 역겨움에 저도 모르게 상상을 억누르며 눈을 질끈 감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표현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작가가 노벨상을 받았다는 사실에, 분명 무슨 뜻이 있을 거라고 나도 모르게 전제했다.
물론, 이 생각조차도 나의 편견이었다.
이름 모를 작가의 글이었다면, 나는 아마 그 숨은 의도를 찾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쾌한 표현들은 그냥 “이 작가 원래 이런 사상을 가졌나 보다”라고 치부해 버렸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진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도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소설은 강렬했고,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재미’보다,
끝까지 읽고 작가의 의도를 알아채고 싶다는 욕심으로 이어졌다
2부, 나는 잠시 형부에게 마음이 갔다. 그의 시선에는 나름대로 이해하려는 태도가 있었고, 그 점이 조금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물론 곧 드러나는 그의 이면은 더러웠고, 읽기 힘들 정도로 역겨운 장면들이 이어졌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카지노 게임의 내면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인물이 바로 그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결국 씻을 수 없는 선을 넘었고, 그는 사회 안에서 ‘쓰레기’로밖에 불릴 수 없게 되었다.
<3부: 나무불꽃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3부 『나무불꽃』은 직접적인 가해자의 시점이 아니었기에 눈살을 찌푸리던 순간들을 조금은 내려놓고 읽을 수 있었다. 카지노 게임의 언니는 조금씩 그녀의 마음을 이해해가기 시작했고, 나는 그 장면에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카지노 게임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감정을 느꼈다. 언니는 끝내 ‘순응’을 택했고, 카지노 게임는 ‘자유’를 택했다. 물론 그 자유가 죽음과 가까운 것이었다 해도, 그녀는 그것조차 자기 의지로 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단순한 생명 경시로만 읽혀야 할까?
문득 생각했다. 처음 카지노 게임는 그저 ‘고기’를 거부했다. 꿈 때문이었다. 고기를 거부하자 주변 사람들은 고기를 억지로 먹이려 들었고, 오히려 그 억압이 카지노 게임를 더 극단적으로 밀어붙였을지도 모른다. 이후에는 ‘음식’ 자체를 거부했고, 그제야 사람들은 그녀를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봤다. 나는 이 흐름이 먹는 행위를 통해 나타난 저항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먹지 않음으로써, 타인의 시선과 억압에 저항하고 있었다.
또한 이 소설을 통해 인간의 본능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때로는 추악할 수 있는지를 새삼스레 느꼈다.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 손에 닿지 않는 것에 대한 집착—우리는 그것을 종종 사랑이나 열정이라 착각하지만, 실은 무책임한 자기만족에 불과한 경우도 많다.
작 중에서 카지노 게임의 남편은 그녀의 언니를 탐하고, 형부는 카지노 게임를 탐한다. 이들은 모두 도덕적 경계를 넘었고, 결국 인간이란 존재의 모순을 보여줬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진정 더러운 인간과 덜 더러운 인간의 차이는,
그 욕망을 ‘행동’으로 옮겼느냐,
아니면 끝내 ‘거리두기’를 했느냐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인혜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끝까지 카지노 게임의 삶을 지켜보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해하려 애썼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눈으로, 카지노 게임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선 속에서—인혜 또한 카지노 게임를 동경했다는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따라가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부수지도 않았고, 그 벽을 넘지도 않았다.
그것이 곧, 그녀가 ‘덜 더럽다’는 증거는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사회와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방식—
그 경계 위에서 비틀거리며 균형을 잡아낸 또 다른 ‘생존’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결국, 진정 ‘더럽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느낀다.
카지노 게임는 ‘말’ 대신 ‘몸’으로 외쳤고,
인혜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 ‘마음’으로만 응시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 자신을 발견했다.
『카지노 게임』의 1부와 2부는 주인공 ‘영혜’를 관찰하고 해석하고 통제하려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채워진다. 남편은 그녀의 몸을 통제하고, 형부는 그녀의 욕망을 착취한다. 그 시선은 폭력적이고, 독자에게조차 강한 불쾌감과 정서적 피로감을 남긴다.
하지만 3부에서 시점이 ‘언니 인혜’로 바뀌는 순간, 독자는 처음으로 카지노 게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말 없는 다정함’을 경험하게 된다. 인혜 역시 처음엔 방관자였지만, 카지노 게임의 고통을 마주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것은 단순히 인혜의 변화만이 아니라, 작가가 독자에게 허락한 유일한 숨구멍처럼 느껴진다.
지독히 불쾌했던 이야기 속에서도,
작가는 이해라는 가능성을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다.
3부는 끝끝내 말하지 않는 카지노 게임와, 끝내 닿을 수 없지만 가까이 머물려는 인혜의 침묵이 교차하는 장이다.
그 침묵 속에서,
독자는 조금 덜 고통스럽게, 조금 더 애틋하게 이 이야기를 마저 읽어나갈 수 있다.
그래서 3부는 작품 전체에서 유일하게
이해, 슬픔, 그리고 아주 조심스러운 위로에 가까워진 장이다.
『카지노 게임』의 영혜가 진짜 ‘환자’인지, 아니면 사회가 정한 정상성의 기준 밖에 있다는 이유로 ‘환자 취급’을 받는 건지—
그 모호한 경계에서 오는 긴장과 불편함, 작가가 딱 그걸 의도한 것 같았다.
카지노 게임는 본인이 병이라는 ‘병식’조차 없는 사람처럼 묘사되지만,
사실은 그 병식이라는 것도 사회가 만들어낸 틀일 수 있다.
“너 이러면 안 돼.” “왜?” “그냥, 그게 정상 아니니까.”
이게 대체 누구 기준일까.
물론 가족 입장에선 “이 사람 굶고 있으니 약 먹여야 해”라고 하게 되는 것도 너무 현실적이다.
‘도와줘야 한다’는 윤리적 의무감과,
‘정상으로 돌려야 한다’는 억압이 겹쳐 있는 지점.
이게 정말 무서운 지점인데,
진짜 조현병 환자와 구분이 안 되는 정도로 행동이 일치하는 카지노 게임에게, 우리는 어떤 잣대를 들이대야 할까.
정상은 누가 결정하는가,
도움은 언제부터 억압이 되는가,
치료는 진짜 그 사람을 위한 것인가.
그렇게 저만의 카지노 게임를 곱씹고 덮어봤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