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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보 Apr 03. 2025

운전대 잡고 카지노 게임 사투

일문학과에 취직한 지 1년이 지날 쯤이었다.
낯설기만 한 강단, 서툰 자신의 중국어에도 조금은 적응이 된 듯하다. 잘해서 적응된 게 아니라, 그 서툼에, 어색함에 조금씩 둔감해지고 있던 것이다.

치료는 일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 꾸준히 받고 있었다. 팔은 많이 회복되었지만 아직 완치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런 와 중에 그만 사고를 치고 말았다. 덜컥 둘째를 임신한 것이다. 이런 표현이 둘째에게 참 죄송하지만 솔직한 심정이 그랬다.

아직 교수직이라는 일을 제대로 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무지 많았다. 첫째가 만 2살이 되어, 아들 하나 키우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아들 하나 잘 키우면서 워킹맘으로 살아도, 외국인으로서 충분히 바쁘고 충실한 삶을 살 수 있을 터였다.




첫째 때보다 입덧이 훨씬 더 심했다. 아마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이었을 것이다.

입덧과 일. 그저 하루하루를 버텼다.

입덧은 중국어로 "害喜"라고 하는데, 한자를 보면 '해할 해'와 '기쁠 희"자이다. '기뻐할 해害'이기에 그 누구도 심각하게 측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입덧이 극심해지면서 세상에 이렇게 많은 냄새가 존재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음식 냄새 때문에 식당이나 주방 근처에도 갈 수 없었고, 커피 냄새로 인해 그렇게 좋아하는 커피숍조차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매연 냄새 때문에 길거리에 나서면 메스꺼워 죽을 지경이었다. 교실에 들어가면 학생들에게서 풍기는 머리 냄새, 양치질을 하지 않은 입 냄새까지, 세상 모든 냄새에 내 오감이 하나하나 반응했다.


마치 내가 들어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방 밖을 나가기가 두려워졌다.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에 화장실에 가서 한바탕 토하고, 강의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화장실로 달려가 또 토해냈다.

문득문득 개운한 한국 음식이 뇌리를 맴돌 때도 있었지만, 여기에서 만들어 줄 사람도, 사다 줄 사람도 없었다. 설령 사 온다고 해도 먹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었다.




6개월까지 지독했던 입덧이 사라지자 이번엔 먹고 돌아서면 허기를 느꼈다. 갑자기 집에서 쓰던 밥그릇이 작게 느껴지더니, 그간 못 먹었던 양을 채우기라도 하는 듯 식욕이 치솟았다. 무시무시한 입덧과 식욕으로 10개월을 채우고,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순산했다.



출산 후 약 2개월 만에 학교로 복귀했다. 낮에는 같이 사시는 시어머니께서 아기를 돌봐주셨고, 밤에는 내가아기를 데리고 잤다. 아기가 잠들면강의를 준비해야 했다. 강의 내용에다 그 강의할 때 사용할 중국어도 준비해야 하고, 밤중에 일어나 모유, 분유를 먹이고 해서, 밤잠을 설치는날들이 계속되었다. 내 체력은 금세 바닥이 났다.

연구실에서 한 층 위, 아래에 있는 강의실에 걸어서 이동하는데, 그 한 층의 계단에서 다리가 후들거려, 계단의 난간대를 붙잡고 걷곤 했다.




50분에서 1시간 거리의 출퇴근 길,신호등도 없이 하염없이 달려야 하는 고속도로에서 나는 쏟아지는 졸음과 사투했다.

카지노 게임을 쫓기 위해 사탕을 입에 물기도 했지만, 입에 문 채 졸음이 몰려온다. 자신의 뺨을수차례 때리기도 했고, CD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큰 소리로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런 노력들이 종종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졸면서고속도로 차선을 넘어가기도 했다. 뒤에서 오는 차의 클랙션 소리에 화들짝 잠에서 깨곤 했다.





하루하루 쌓인 피로는 내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경계를 훌쩍 넘어서 있었다.

강의 없는 날 집에 있어도 낮잠 한번 푹 자기가 쉽지 않았다.

내 방은 3층, 시어머니 방과 거실은 2층이었는데, 설령 아기가 시어머니 곁에 있다고 해도, 울음소리가 들리면 내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해, 내 방에 있을 수 없고, 아기한테로 달려가곤 했다. 부족한 수면을 가끔 낮잠으로라도 해소해야 하는데 대가족 생활 속에서 넉넉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고가 나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아무래도 수호천사가 내 곁을 지켜준 거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을 한 번도 아닌 수차례씩이나 었는데 어찌 멀쩡할 수 있을까?

둘째에게 죄송하기 그지없지만, 사실 아이가 4살되기 전까지는 '내가 죽으려고 애를 둘씩이나 낳았나'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결혼이 늦어 40을 바라보는 나이에, 게다가 건강하지도 않은 몸으로 둘째 임신, 출산을 하고, 외국에서 언어장벽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일하면서 두 아들을 양육한다는 것.

앞으로 닥쳐올 일을 모르기에 감히 시도하고 도전할 수 있었다.

미래를 미리 내다볼 수 있었다면 이번 생의성장을 포기하는 쪽으로 선택하지 않았을까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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