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에세이
카지노 게임는 소년이었다
새로운 세상에 눈이 떠지던
사춘기의 벅차고 당황스럽던
그 순간들
내 안에서 꾸물꾸물 올라오는
남성의 기운어찌할 바 몰라
죄의식에 움츠러들고
버스에서 우연히 마주친
여학생의 샴푸향에
종일 풋풋한 만남을상상하던
그 카지노 게임은 어느새
카지노 게임가 된다
소년을 카지노 게임로 만든 것은
무자비한 세월
먹여 살려야 하는 식구들
눈치를 봐야 하는 상사
경쟁사회가 만들어 낸 열등감
차오르지 않는 통장 잔고가
무섭다
점심 한 끼 때우려
국밥 한 그릇마주 앉아도
약속한 듯 구부정하게
밥그릇에 얼굴묻는다
나의 지친 일상을
자랑할 바 아니기에
자신도 모르게
최대한 웅크린다
허리라도 곧게 펴려면
오전 업무가 처리됐어야 하고
월세와 아파트 중도금도
걱정 없이 납입했어야 하고
내년엔 승진이기대되어야 한다
스쳐가는 아주머니의 화장품 내는
후각을 놀래키고
순간 잊혔던 소녀와
그녀가 뿌린 샴푸향을
떠올린다
잠시 꿈을 꾼다
예쁜 소녀는 아내가 되고
멋진 차에 애들과 짐을 싣고
여행을 떠난다
대기업중견간부인 그는
멋진 바에 앉아
수십억 계약을 마무리하고
위스키를 부딪히며
여유 있는 웃음짓는다
바바리를 날리며
적들을 물리치는 주윤발처럼
쿨한 누아르 영화의 주인공도된다
수 초간의 상상이
가슴을 잠깐 설레게 하지만
국밥 그릇의 바닥 긁는 소리와 함께
카지노 게임의 꿈은 막을 내린다
삐걱거리는 의자를 밀어내고
종종걸음으로 계산대를 향한다
피곤함과 살아내야 하는 하루가
그 카지노 게임을 잊게 하고 잊어버린다
그렇게 소년이었던 카지노 게임는
살아간다
나는 출퇴근 길이 멀다. 1시간 반에서 2시간까지 걸리는 출퇴근길이기에, 종종 휴게소에 들른다. 지방 고속도로 휴게소여서 그런지 가족들이나 여행객보다는 업무로 운전을 해야 하는 중년 남성들이 대부분인 곳이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4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남자들이 식사를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 모두가 똑같은 자세로 식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대부분 혼자이고, 허리를 굽히고, 밥그릇과 옆의 스마트폰에만 집중한다. 마치 배식을 받은 교도소의 수감자들이 소리 없이, 저항 없이 주어진 밥을 먹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들이 살아내야 할 삶의 무게가 그 한 장면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 지금은 허름한 작업복 차림이 대부분이지만, 그들 중 어떤 이는 업무가 끝나면 다른 모습으로 멋진 인생을 누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액면 상의 모습은 나라를 이끄는 산업 역군인 동시에, 업무에 지친 카지노 게임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이 자기의 삶을 위해서 인생을 즐기고 계획하고 있을 거라는 느낌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남자로서, 아버지로서, 직장인으로서의 의무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들의 건강과 세월을 아낌없이 사용하고 있는 듯했다.
그들이 조용히 혼자만의 식사시간을 가지고 있을 때,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상상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장면이 생계로 지친 카지노 게임들이 허기진 배를 채우는 장면으로 끝나는 게 싫었다. 그들 안에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는 카지노 게임의 추억과 꿈을 잠시라도 상상하기를 바랐다. 나도 망중한의 순간이 오면, 어릴 때 뛰 놀던 동네 뒤 배추밭과, 아이들과 눈싸움하던 골목과, 수줍게 눈 마주치던 여학생이 불현듯 떠오르기도 한다. 내 안에 카지노 게임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있다. 그들에게도 분명히 작은 기억의 단상들이 아무 생각 없이 혼자 밥 먹고 있을 때 떠오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그 기계적이고 비정서적인 식사의 장면이,삶에 코뚜레 씌워진 불쌍한 카지노 게임들의 한 장면으로 해석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년 남자는 나이를 먹을수록 예민해지고, 까다로워지고, 정서적이 된다. 호르몬이 가져다주는 또 다른 장르이다. 사춘기에 겪었던 호르몬의 폭력성도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그 호르몬이 떠나가면서 주는 우울함도 사실 만만치 않다. 그 걸 누구에게도 호소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카지노 게임이기에..다행히 술친구가 있으면 서로에게 주정이라는 과정을 통해 상대방이 듣든 말든 나는 내 하소연을 끝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카지노 게임의 자기 연민은 그들의 삶을 조금씩 잠식하기도 한다. 이 시대의 카지노 게임들이 그들의 성취와 무관하게 더 여유 있게 편안히 밥 먹는 시간을 즐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