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이 카지노 게임이 이상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이 작품은 나에게 충분히 인상 깊었고, 이유를 모르겠는데 그냥 좋았다.
카지노 게임은 부부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카지노 게임에 있는 사물들과 거기에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게 신기했다. 예컨대 화면 중앙의 강아지가 부부 사이 신뢰를, 녹색 드레스가 풍요와 다산을, 탁자 위의 오렌지가 부와 번영을 뜻한다는 것 등이 그렇다. 두 사람이 신발을 벗고 있다는 점은, 이들이 ‘결혼’이라는 신성한 의식에 임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것. 셜록 홈스만큼이나 재미있었고 내가 마치 교양인이 된 것 같았다. 특히 내가 좋아했던 건 중앙에 있는 거울과 얀 반 에이크의 서명이다. 거울에 화가와 증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보이고 거울 위 회색 벽에 ‘얀 반 에이크가 여기에 있었다’고 새겨 넣음으로써 작가 자신의 존재를 과감하고 교묘하게 드러낸 것이 특히 좋았다.
나는 ‘인생은 결국 이어진다’ 라거나‘언젠가는 돌아온다’는 사상(?)비슷한 것을 좋아한다. 끝이 끝이 아니라는 생각, 과거/현재/미래가 언제 어떤 식으로든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 같은 게 내 카지노 게임 한가운데에 있는데 그러한 카지노 게임의 선호가 어렸을 때도 있었나 보다.
카지노 게임에 화가가 숨겨져 있다는 것, 화가가 이 둘을 보고 있는데 맞은편 거울에 화가와 증인의 상이 맺힘으로써 왠지 내가 화가의 뒤에 서 있는 느낌. 만약 이 거울이 없었더라면이 카지노 게임은 그저 1434년 어느 부부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끝났을 것 같다. 600년 전에 이렇게 생긴 두 사람이 있었구나, 엄청 잘 그렸네, 끝. 이게 내 감상의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거울이 있음으로써, (적어도 나에게는), 감상자인 내가 아르놀피니 부부만 보는 것이 아니라 부부, 화가, 증인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명이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마치 내 눈앞에화가의 뒷모습이 있는 듯한, 내가 화가의 뒤에 서 있는 것 같은 그래서 내가 저 부부와도 한 공간에 있는 듯한 상상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옛날 카지노 게임이 옛날 카지노 게임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현재의 나에게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그런 연결이 좋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초록색 드레스와 냉정해 보이는 아저씨, 그리고 거울. 그 세 가지만 남기고 이 카지노 게임은 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화가도 작품 제목도 완전히 잊고 살았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이 네 사람 어쩌면 다섯 사람을 다시 찾게 됐다. 시작은 이 작품도, 그림에 관한 관심도 아니었다. 작년에, 단지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는 이유로 유럽 여행을 계획하게 됐고, ‘유럽’하면 미술관이니까 가는 김에 “그때 그 그림”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화가도 제목도 모르니 더듬더듬 시작했다. 명화, 옛날 그림, 녹색 드레스. 그렇게 몇 번 검색하니 ‘얀 반 에이크’와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 나타났다. 나의 10대, 20대, 30대까지도 보내고서야 너의 이름을 알았다.
운명이거나 나의 괜한 의미 부여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마침 이 그림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소장품이더라. 나의 꿈의 나라이자 꿈의 도시인 그곳. 이것 또한 계기라고 생각하고런던으로 떠났고 이 작품을 실제로 보았다.크지도 작지도 않은,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둘 법한 크기의 유화 한 점. 27-8년 전에 책으로 보았던 그림을, 시간이 흘러, 어쩌면 그 시절의 내 부모에 더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야 다시 만났다. 그림만을 위해 런던까지 날아간 건 아니었지만, 이 그림을 보는 게 큰 이유 중 하나였는데 막상 접했을 때 엄청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허탈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 드디어 봤다’ 이 정도? 날짜도 기억나지 않는 나의 어린 날 스쳐 지나갔던 책 한 권. 그중 한 페이지가 꽤 긴 시간을 숨어 있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등장했고, 이름도 모르는 그 기억을 되찾아 보겠다고 ‘옛날 그림, 초록, 드레스’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어설프게 시작하여 결국은 이름을 알아내고 비행기 표를 끊으면서 내 꿈의 여행지를 찾아온 것.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은 게 그냥 신기했다. 그리고 돈이 되지도, 경력에 보탬이 되지도 않는 이런 일에 시간과 비용을 써도 인생이 나락 가는 거 아니고, 큰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 또, 런던 항공권 끊는 게 뭐라고 이걸 ‘꿈’ 운운하며 못해보고 살았을까 하는 후회 같은 것. 내셔널 갤러리에서 이 작품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고 지금까지 내 삶의 방식을 한번 바꿔보고 싶어졌다.
이번에 글을 준비하면서 주방에 걸린 이 작품 레플리카를 찬찬히 다시 보았다. 구글에서 이 카지노 게임을 다시 검색하기도 했다. 어제·오늘 이 부부를 보면서 나는, 이 카지노 게임이 왠지 나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그 길이 글을 쓰는 일이 될지, 도슨트가 되는 것일지, 미술사를 공부하는 일이 될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셋이 아닌 다른 길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게 지금 당장일 것인지 아니면 먼 훗날이 될지도 알 수 없다. 단지, 내 인생 어느 시점에, 지금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될 때에, 그때도 왠지 이 작품을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유는 없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 뿐.도서관 열람실에서 너를 처음 알게 된 뒤 곧장 너를 잊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런던에서도 만났고 오늘도 다시 만났으니까. 왠지 또 한 번 ‘계기’가 될 것 같은 이 느낌을 강하게 기억해 두었다가 또다시 만나야 할 때 이 작품을 반갑게 맞아주겠다. 나의 과거와 현재를 아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너를, 나의 미래에 다시 카지노 게임야겠다.
커버이미지: 내가 직접 찍은 런던 브리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