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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열 Apr 04. 2025

카지노 게임 담긴 기억

쌉싸래한 맛 뒤로 스며드는 달콤함이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혀끝에 맺혔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던 밤, 낚시 모자를 쓴 카지노 게임이 물기를 털어내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심장이 일순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존재가 바의 공기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열 시가 조금 넘은 시각, 아직 다른 손님이 차지 않은 L자형 카운터와 테이블 세 곳에 적막이 요동쳤다.


"어서 오세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셰이커를 닦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바를 시작한 지 어느새 1년, 이제는 제법 자연스러운 손놀림이었다.


카지노 게임은 천천히 바 스툴에 앉았다. 모자 아래로 보이는 얼굴엔 세월의 무게가 깊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가 젊은 사람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형형하게 빛났다. 그가 나를 바라보자, 명징한 시선이 나의 내면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눈길이 마주친 찰나, 모든 것이 들통난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입안에 메마른 긴장감이 감돌았다.


"젊은이, 오늘 같은 날엔 뭘 마시면 좋을까?" 카지노 게임의 목소리는 의외로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말투에 스며든 무게감이 불편한 감정을 더했다.


"비가 오니까 네그로니 어떨까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진을 따르며 손떨림을 감추려 애썼다. 탄커레이 향이 코끝을 스쳤다. 알코올이 얼음 카지노 게임 흐르는 소리가 빗소리와 어우러졌다. 캄파리와 스위트 베르무트를 같은 비율로 섞고, 오렌지 껍질을 올렸다. 시트러스와 허브 향이 어우러져 테이블에 은은하게 퍼졌다.

카지노 게임은 잔을 받아들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선명한 다홍색 액체에 비친 조명이 그의 주름진 얼굴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었다. "아들이 좋아했을 것 같은 칵테일이구만." 불쑥 던진 한마디에 나는 손을 멈췄다. 그의 목소리에 스며든 그리움이 공기를 무겁게 적셨다.


"아드님도 칵테일을…"

"알 수 없지." 카지노 게임이 잔을 코끝으로 가져갔다. 그의 손가락이 떨렸다.

"아들이 어떤 술을 좋아하는지조차 모르는 아비야."

나는 말없이 잔을 닦았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스스로에게 내리치는 채찍질 같았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그렇게 되고 말지." 카지노 게임의 말에서 '회사'라는 단어가 으스스하게 울렸다. "모든 걸 나중으로 미루다가, 기회를 영영 놓치게 되는 거야."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인생에 '나중'이란 없다. 오직 '지금'이 전부다.


"10년 전." 카지노 게임의 눈빛이 쓸쓸하게 식었다. "아들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어." 그의 손가락이 잔의 가장자리를 쓸었다. 그 움직임을 따라 잔 속의 액체가 일렁였다. "불에 탄 사무실." 카지노 게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범인. 그리고... 아들의 마지막 메시지. '아빠, 이제 우리 술 한 잔...'"


내 손에서 잔이 미끄러졌다. 그러나 떨어지기 직전, 그가 날렵하게 잔을 낚아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동작에, 나는 깜짝 놀라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카지노 게임은 내 앞에 잔을 살며시 내려놓고 다시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카지노 게임의 존재가 바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처음엔 다 뒤집어엎으려 했지." 카지노 게임이 쓴웃음을 지었다. "진심을 다했다면... 시간은 좀 걸렸겠지만 모두 무릎 꿇리고 진실을 밝혀낼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침을 삼켰다. 카지노 게임의 손끝에서 현실이 일그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잔의 테두리를 따라 손가락을 훑자 네그로니 표면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지노 게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문득 깨달았어. 내 아들은 그런 방식을 원하지 않을 거라는걸. 그래서 집착을 멈추고, 그저 고통을 받아들이기로 했네." 손가락이 멈췄고, 잔에 담긴 술은 다시 고요를 찾았다. 카지노 게임이 얼굴을 찌푸리자 눈가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젊은이는 왜 이런 일을 하나?" 갑자기 그가 물었다. "전에는 다른 일을 했을 것 같은데." 나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카지노 게임 앞에서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딱히 그럴 이유도 없었지만. "전엔 회사원이었습니다.”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위에서 시킨 일만 해야 하는 게 적성에 맞지 않더군요. 우연히 바텐더 클래스 광고를 보고, 흥미가 생겨 도전했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일이 재미있습니다. 1년 됐어요. 아, 제 실력은 업계 사람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경력이 짧아 혹시나 제 술에 대해 우려하실까 봐."


"그랬구나." 카지노 게임의 눈빛이 한순간 날카로워졌다가 이내 부드러워졌다. "아들도 자기 좋아하는 일을 찾아 꿈을 펼쳤다면..." 그의 말끝이 흐려졌다. 잔에 남은 칵테일이 그의 감정에 반응한 듯 검붉은 루비색으로 보였다. "젊은이, 잘 선택했어." 카지노 게임의 눈빛이 한결 따듯해졌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일... 우리 아들도 좋아했을 텐데."

나는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전 그저 칵테일을..."

"때론 한 잔의 술이 긴 대화보다 낫다네." 카지노 게임이 잔을 비웠다.

"마음을 녹이는 건 말이 아니라 전해지는 진심이니까." 카지노 게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바의 공기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이제 가봐야겠네. 한심한 녀석이 기다리고 있거든." 카지노 게임이 낚시 모자를 눌러썼다. 계산서를 내밀려 하자, 그는 지갑에서 이십만 원을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어르신, 너무 많습니다. 잠시만요, 얼른 거스름돈 드릴게요.”

"오늘은... 아들과 마신 걸로 하지."

“아니, 그래도 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한 번 더 거절하려 했으나, 결국 묵직한 그의 말이 나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가 문을 향해 돌아섰다. 발걸음마다 현실의 틈이 벌어지는 듯했다. "저..." 카지노 게임을 향해 말했다. "다음에도 꼭 오세요. 아드님이 좋아했을 칵테일을 또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카지노 게임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의 미소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기꺼이. 아들과 한잔하고 싶을 때마다 들르겠네." 문이 열리고 찬바람이 휘몰아쳤다.


카지노 게임의 뒷모습이 비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 희미한 기운이 맴돌다 흩어졌다. 나는 한동안 비에 젖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카지노 게임이 남긴 빈 잔에 마지막 한 모금이 남아있었다. 나는 잔을 들어 올려 불빛에 비췄다. 맑은 액체에 붉은 후광이 비쳤다. "건배." 나는 속삭였다. "아버님... 그리고 아드님." 나는 남은 술을 들이켰다. 쌉싸래한 맛 뒤로 스며드는 달콤함이,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혀끝에 맺혔다. 바깥의 비는 계속 내렸다. 하지만 어딘가 먼 곳에서, 동이 트려는 조짐이 보였다.




사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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