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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눈빛연어 Apr 16. 2025

카지노 게임 마음은 늘 카지노 게임 저 너머로 쓸려 간다

미셀 드 몽테뉴

작년에 민음사 북클럽 활동을 야심 차게 해 보겠다고 북클럽에 유료 가입을 하고 잔뜩 배달받은 책들이 서재 한 칸에 쥐 죽은 듯이 꽂혀 있다. 이번 주는 나의 생일을 비롯해 이런저런 결산(?) 들이 한꺼번에 이뤄지고 있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가, 문득"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떠올렸다.



민음사 북클럽에 발만 담갔다가 빠져나온 나(왜 그랬니? ㅠ.ㅠ)를 되돌아보며 불쑥 한 권의 책을 꺼냈다. 바로미셀 드 몽테뉴의 <카지노 게임 마음은 늘 카지노 게임 저 너머로 쓸려 간다였다.제목부터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몇 달간 전자책 쓰기와 연말연시 가족 행사를 비롯해 바쁘게 보낸 후, 2월 말 정산을 하려니 뭔가 어수선하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런 카지노 게임의 방황(?)을 잠재워 줄 수 있는 게 뭐 없을까? 서재방을 뒤지다가 '카지노 게임 마음은 늘 카지노 게임 저 너머로 쓸려 간다'는 제목을 보는 순간 손이 쓱~움직인 거다.


일단, 미셀 드 몽테뉴가 어떤 분이었는지 알아야겠지? 그의 책 <수상록을 읽었음에도 한 권의 책만으로 작가의 면면을 알기는 극히 힘들다. 그는 어떤 인물이었나?


미셀 드 몽테뉴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 최고의 교양인, 사상가, 철학자, 때로는 정치인으로 부각되기도 함. 그러나 곧 덧붙여 말해야 할 것은그는 당대 인문학자들과 달리라틴어가 아닌 속어(프랑스어)로 글을 썼고, 나아가 장바닥의 생생한 말로만 쓰고 싶다고 한 교양인이요, 어려운 개념도 체계도 교화적 목적도 없이.


누구나 부딪히는 실존적 문제들에 대한 인간적이고 온당한 답, 주어진 삶을 풍요롭고 만족스럽게 사는 길을 찾고자 하는보통 사람의 “자기 탐구”로 사상가, 철학자가 된 최초의 사람이다.


<카지노 게임 마음은 늘 카지노 게임 저 너머로 쓸려 간다의 총 스무 가지의 에세이 중에서 나는 '카지노 게임 마음은 늘 카지노 게임 저 너머로 쓸려 간다'를 집중해서 읽었다. 첫 페이지에는 이런 글이 있다.


"닥쳐올 일에 대해 카지노 게임는 전혀 힘을 쓸 수 없고, 심지어지난 일에 대해서보다 더 속수무책이니, 사람들이 늘 미래의 일에만 급급한 것을 나무라며,현재의 복을 붙들어 그것에 만족하라고 가르치는 이들은 인간의 과오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몽테뉴 <수상록을 처음 펼쳤을 때 '그래서 몽테뉴 선생님 So What?'을 외치며 머리를 쥐어뜯으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굳이 또다시 이 지리멸렬*한 문장을 붙드는 이유는?


요즘 책을 읽고 세상이 굴러가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카지노 게임 중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사상가 몽테뉴는 치우치지 않는 자유로운 식견을 가진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위의 얘기를 언급하면서 그는 바로“미래를 근심하는 영혼은 불행으로 짓눌린다”고 일단, 세네카의 입을 빌린다. 미래에 대한 세네카의 생각을 나름 존중한다는 의미겠지.



동시에 플라톤의 위대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인“네 일을 하고, 너를 알라”는 문장을 들이댄다.


"자기 일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첫 번째로 알아야 할 것이자기가 누구이고,자기에게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아는 사람은 자신과 무관한 일을 자기 일로 삼지 않고,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가꾼다. 헛된 일이나 쓸모없는 생각과 계획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도 만족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지혜는 지금 있는 것에 만족하며 자신을 불만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 키케로


이 문장을 읽는 순간,「플라톤」을 제대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부터 번쩍 든다. 그리고, 뒤이어 에피쿠로스는 현자에게는 미래에 대한 예견이나 염려가 없다는 얘기를 한다. 헌대, 이 말은 왠지 미래에 대한 염려가 없으면 좋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요즘의 욜로(YOLO)와 살짝 맥락이 비슷한 의도를 담고 있다.



에피쿠로스는 철학의 목적이 쾌락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을 쾌락과 고통, 행복과 불행 두 가지로 단순화시켰다. 에피쿠로스는 쾌락과 행복은 선한 것이며, 고통과 불행은 악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멀리하고 쾌락을 가까이하면 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몽테뉴는 미래에 대한 염려가 긍정적으로 생각될 수는 없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카지노 게임 마음은 늘 카지노 게임 저 너머로 쓸려 간다는 모두 어떤 논리가 쭉 이어져가면서 이어지는 건 없다.


한 문단이 질문에 대한 검증 절차를 밟는 느낌이 강하고, 또 달리 해석하기 위해 던지는 질문으로 전혀 예상 불가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중간을 읽다 보면 몽테뉴는 왕들의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면서 미래에 대한 염려가 왕의 능력이나 선함, 정치적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검토한다. 급기야 '죽음이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한참 한다. 철학, 사상가들의 사유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참 깊고 넓게 생각의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구나...!라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몽테뉴는 일단 솔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일화를 살펴보기로 한다. 고대 아테네의 입법가이자 현인으로 추앙받은 솔론은 외유 중 뤼디아 왕국의 크로이소스 왕을 만나 카지노 게임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카지노 게임크로이소스와 솔론, 헨드리크 반 스테인비크 2세(Hendrick Van Steenwyck Ⅱ)


크로이소스 왕은 기원전 560년부터 뤼디아 왕국의 마지막 왕인데 그의 막대한 부를 이룬 왕이기도 했다. 그는 '당신이 가장 카지노 게임하다'는 답을 솔론으로부터 듣고 싶었다. 하지만, 솔론은 '인간은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므로 카지노 게임하게 삶을 마감할 때 비로소 카지노 게임여부가 판별된다'는 말을 듣고 불쾌해한다. 이후 뤼디아 왕국은 빼앗기고 아들들은 모두 죽는 불행한 결말을 맺는다.


몽테뉴가 결국 이 예를 들어가며 인간은 죽을 때까지 카지노 게임여부를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은 아무도 카지노 게임하지 않다?? 는 결론에 이른다. 헉! 뭐지? 그러나, 그 결론의 이면에는 은근히 현실의 카지노 게임에 충실해도 된다는 말도 한다. (음.. 몽테뉴 글은 전문가의 해석을 곁들여 읽지 않으면, 오해의 소지가 매우 높다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죽음 후의 삶까지 행복과 연관시키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여러 사례들을 살펴보고 몽테뉴는 세네카와 키케로의 말로 영혼 없는 육신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 시대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전달해 준다.


죽은 뒤 네가 어디 있을지 알고 싶은가?

장차 태어날 영혼들이 사는 그곳이다.

세네카



그가 저를 받아 줄 무덤을,

삶의 무게를 벗어 버린 그의 육신이 불행을

피해 쉴 안식처를 갖지 못하게 하라.

앤니우스, 키케로의 인용


몽테뉴는 위 인용글에 덧붙여 자신이 던지고자 했던 질문 아닌 질문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하긴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처럼 많은 것들은 죽어서도 여전히 삶과 불가사의한 관계를 유지해 간다. 포도주는 수확 당시 포도나무가 어떤 계절적인 변화를 겪었느냐에 따라 지하 창고에서 다르게 익어 간다. 사람들 말에 따르면, 멧돼지 고기는 소금 저장통에서도 살코기가 변하는 법칙에 따라 그 맛과 상태가 달라진다고 한다."




우리 저 너머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몽테뉴에 따르면 어렴풋이 '미래'와 '죽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늘 그곳에 쓸려가 버리고 지금의 행복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에게 '너의 카지노 게임을 지금, 이곳에 놓고 사시오'라는 메시지로 해석되었다. 욜로가 아니라, 현재에 온전히 거하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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