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가입 쿠폰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려주마. - 83
지난 이야기.
앞에서 우리는 유튜브에 열광하는 한국인들의 특성을 분석하면서, 그 콘텐츠와는 무관하게 다른 사람을 ‘저격’하는 이른바 비난과 공격의 특성이 유난히 도드라진다는 점을 확인하였습니다. 물론 잘 나가는 사람에 대한 질시로 인해 그 사람에 대해 비난하거나 심지어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소문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일은 유독 한국인에 한정된 이야기만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홍수같이 불어나버려 통제가 거의 불가능해져 버린 매체들에서부터 스마트폰의 시대가 대세가 되면서 댓글이라는 형식으로 익명성에 기대어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수위가 한국에서는 뭔가 더 강해져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함을 갖게 됩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댓글이나 익명성에 숨어 근거도 없는 카더라식의 비난을 통해 여론(?)을 선동하는 짓은 전 세계를 막론하고 전통적인 트렌드(?)처럼 되어버린 것도 사실입니다.(뜬금없이 광화문 태극기 집회에 트럼프 폭동의 캐치 프레이츠가 동원되고 성조기가 휘날리는 것과 비슷한 형태라고 할까요?)
이미 수년 전부터 벌어졌던 댓글 공격이라던가 아니면 말고 식의 카더라 폭로의 너튜브 저격 방송이나 심지어 문제가 되었던 레커 너튜버들의 방식은 한국인들이 얼마나 남의 비리를 들추려고 한다거나 남의 욕을 하고 그것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지에 대한 사회적 병리 현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바 있습니다.
역사적인 흐름을 살펴보자면, 1923년 일제 강점기 시기에 일본의 관동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곳에 살았던 카지노 가입 쿠폰이 혼란을 틈타 건물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며 우물에 독을 퍼뜨렸다는 소문이 났었습니다. 이에 당시 그곳의 치안을 맡고 있던 자경단과 군경이 그 소문을 믿고 카지노 가입 쿠폰을 대놓고 공격하여 수천 명 또는 그 이상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물론 그것은 일본 측에서 퍼트렸던 의도적 헛소문이었습니다.
한국인의 특성을 말하자고 하면서 왜 일제 식민지 시대의 일본정부의 거짓말을 퍼트리는 방식을 이야기하느냐고 의아하신가요? 비슷한 듯하지만 한국인의 방식이 이런 뻔한 방식과 어떤 차별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카지노 가입 쿠폰만의 특성을 제대로 설명해 내기 위해서입니다.
일본인과 카지노 가입 쿠폰을 비교하는 것은 아니지만, 차이가 현격히 나는 서양과 동양을 비교하는 것보다는 같은 동양권 내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비교해 보는 것이 명확한 특징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몇 가지 특징들을 정리해 보면, 한국인들은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성향이 강한 반면, 일본인들은 자신들은 앞장서기보다는 빠져 있어 대중의 안에서 녹아들어 가 있어 익명성에 묻혀 있는 것을 원하는 성향이 큽니다. 예컨대, 같은 비난성 댓글을 달더라도 한국인들의 비난성 댓글에는 구체성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걔랑 같이 중학교를 다녔던 사람인데....”라던가 “내가 군생활을 같이했던 동기라서 잘 아는데....”등등의 경우가 그러한 것이죠.
그래서 같은 선동된 군중심리라 하더라도 한국의 그것은 일본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작동합니다. 최근에 연이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연예인들의 모습들을 보더라도 음주운전을 하고 돈이 없다고 하면서 전관 변호사를 서너 명이나 사고 가난한 사람들을 코스프레하는 모습에 대해 비난의 화살이 꽂히기 시작하면 그것에 선동된 이들이 집요하게 공격성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한국인이 다른 이들을 비판함에 있어 일본인이 익명성에 그저 숨어버리는 것과는 다른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성향이 강해지는 성향과 믹스되면서 정의구현이라는 대의명분을 찾아 내밀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의를 부르짖고 검찰개혁을 부르짖던 서울대 교수 출신의 스타 정치인이 자신의 딸과 아들의 스펙을 부풀리고 돈 많은 이들과 같은 행태로 포장해서 자기 이익을 챙기기로 했다고 하는 도덕적 흠결이 생기는 순간, 비난의 화살은 대포로 바뀌어 그가 이전에 했던 모든 의미 있는 행동마저 쓰나미로 덮어버리게 됩니다.
실제로 최근 이슈가 되어 사법처리가 되었던 레커 너튜버들의 인기몰이 방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치 공중파의 사회고발성 프로그램처럼 사회정의 구현이 모토인 것처럼 빌런들을 저격하는 방식의 고발이 구체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놓고 저격하는 방송의 정당성을 구현해 주었고, 그것을 직접 할 수 없는 사람들의 동조를 얻게 되는 것이죠.
이는 카지노 가입 쿠폰의 또 다른 특성, 그러니까 사돈이 땅을 사면 내가 아프다 못해, 그 땅일 사돈도 소유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려야 한다는 묘한 분노와 맥을 함께 하게 됩니다. 나는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명품은 고사하고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경기도 외곽지역에 하루에도 두 시간이 넘는 출퇴근 시간을 허비하며 지옥철이나 광역버스에 콩나물처럼 실려서 사는데,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내 연봉보다 더 높은 금액을 한 달 생활비로 사용하면서 사는 것에 대한 묘한 질시를 느끼게 되는 구조인 셈이죠.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싸잡아서 비난하거나 그저 뒤에 숨어서 욕하는 것은 한국인의 특성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일본인의 스타일처럼 욕은 하지 않으면서 웃으며 집에 가서 저주 인형을 만들어 저주하는 더 무서운 구조는 더더욱 아닙니다. 한국인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기준, 즉 ‘정의구현’이라는 누구나가 공감할만한 대의명분이 서야 질시의 대상에게 비난의 포화를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대개 한국인들이 비난하는 대상은 돈 없는 사회적 약자에게는 향해있지 않습니다. 예컨대, 너튜브의 콘텐츠 중에서 번호판을 붙이고 다니지 않는 불법 오토바이나 장애인 주차구역에 버젓이 주차증을 위조하여 주차한 외제차들을 신고하고 그들에게 벌금과 범칙금을 부과하는 콘텐츠를 보면서 대리 만족을 느끼고 그들을 비난하는 구조인 것이죠.
그래서 카더라 뉴스에 선동을 당하더라도 한국인들은 언제나 격렬하게 선을 넘고 일본인들은 결코 선을 넘지 않습니다. 한국인들이 남의 영역을 결코 남의 영역이라 생각하지 않고 지나친 오지랖이라고 생각할만한 부분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 일본인들이 결코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에 민감한 것과 굉장히 큰 차이를 보이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입니다.
연예인들이 누구와 결혼했고, 왜 이혼했고, 어떤 재벌을 만났고, 누구를 배신했고 등등의 이야기에 대해 일본인들이 철저하게 그들만의 이야기로 선을 긋는 반면, 카지노 가입 쿠폰은 어느 사이엔가 자신이 그 이야기 안에 들어가서 흥분해서 욕을 하고 그것을 지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한국인들의 특성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증거주의를 상당히 강조하는 면을 보입니다. 아무리 카더라라고 하더라도 한국인들은 그것은 검증하고 나서는 편입니다. 교통사고나 폭행사고의 경우 블랙박스나 CCTV 영상을 근거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기 전에는 무조건적으로 선동에 넘어가거나 그 의견을 드러내는 것을 조심스럽게 접근합니다. 아무리 증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피해자의 일방적인 진술보다는 증인을, 그리고 증인보다는 증거를 확인하려고 드는 객관성을 담보하는 성향을 보입니다.
카지노 가입 쿠폰이 자신이 잘 모르는 객관적으로 증거를 답보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남의 영역에 대한 관심과 오지랖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유발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나와 비교하고 그 비교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무슨 옷을 입고 다니든 내가 오늘 입고 싶은 옷을 편하게 입으려는 서양인들의 의식 속에서 보자면 터무니없을 수밖에 없죠. 하지만, 카지노 가입 쿠폰이 자동차 색상을 고르는 것에서 특정 무채색에 상당히 많은 선호를 보이는 것도 이와 같은 심리에서 발현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자면, 한국에서 다양성을 쉽게 발견하게 어려운 원인도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이러한 심리는 사람들이 선동하며 공격의 기준으로 삼는 도덕적인 기준이라던가 사회정의에 부합하는가에 대한 것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서울대 법대 교수이자 검찰개혁을 부르짖던 사람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그렇게 부르짖었던 도덕적인 기준이나 사회정의를 어기고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공격대상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를 공격하기 위해 선택한 메시지 공격이 아닌 메신저에 대한 공격이 한국 사회에서는 유효한 것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러한 선동은 한국인의 성향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이들이 인터넷에서 사건을 공론화할 때 많이 사용하는 수법이기도 합니다. ‘버스가 정류장에서 내리려던 사람을 내려주지 않고 그대로 통과하면서 서 있던 사람이 다쳤다.’라는 사건을 어떻게 인터넷에 유포하는가에 따라 버스기사는 천하의 죽일 놈이 될 수도 있는 것이죠.
한편, 증거주의에 입각한 한국인들은 그 일방적인 선동에 대한 반박과 증거와 증인이 나오게 되면 바로 태세를 전환하여 처음 사람들을 선동하여 멀쩡하고 착실한 버스 기사를 죽일 놈으로 몬 사안을 아무렇지도 않게 잊고 덮어버립니다.
이것을 한국인의 냄비기질이라고 비난하는 왜곡된 의견들도 있지만, 실제로 이것은 확 끓어올랐다가 식어버리는 행태가 아니라, 자신들이 선량한 희생양을 잘못 공격한 것에 대한 인정이자 그 부분에 대한 반성의 일환으로 더 이상 그 선동에 동조하여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일단락을 짓는 한국인만의 가장 빠른 쿨한 결론 내리기의 일환인 셈인 거죠.
다음 편은 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