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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Dec 25. 2024

카지노 게임 추천 대왕 (1)

그리스인 이야기 제3권 중 제2부

이 편은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로 유명한 역사작가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그리스인 이야기》제3권중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와 그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활약한 기원전 359년경부터 기원전 323년경까지의 약 36년 동안에 관한 이야기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1937년생이니 2024년 기준으로 87세인데 2023년에 문화훈장도 수상하고 아직도 이탈리아와 일본을 오가면서 정정하게 인터뷰나 대외 활동을 하는 것 같다. 가끔 논란이 되는 극우 발언을 하는게 좀 문제이긴 하지만;;;

카지노 게임 추천[시오노 나나미 2023년 11월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그리스의 패권


그리스는 기원전 480년의 제2차 페르시아와의 전쟁카지노 게임 추천 승리한 이후, 기원전 431년에서 404년까지 펠레폰네소스 전쟁, 기원전 386년 코린토스 전쟁, 기원전 371년 레우크트라 전투등을 치르면서 아테네 = 스파르타 = 테베 순으로 주도권을 가져갔지만 도시국가의 한계로 전체적인 국력은 점점 쇠퇴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원전 362년그리스의 전체 도시국가가, 테베가 중심이 된 보이오티아 동맹아테네, 스파르타, 만티네이아 연합군, 둘로 나뉘어 싸웠지만 사실상 승자도 패자도 없었던 ‘만티네이아전투’(Battle of Mantinea)이후 이제 그리스에는 패권을 가진 국가가‘아무도 없었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을 쓴 투키디데스의 뒤를 이어 크세노폰(Xenophon)『그리스 역사(Hellenica)』를 썼는데 이 전투를 끝으로 더 이상 쓸게 없다는듯 붓을 내려놓았다(만티네이아 전투카지노 게임 추천 크세노폰의 아들 그륄로스가 전투카지노 게임 추천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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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세노폰과 그리스 역사 출처 구글 이미지]

그렇지만 만티네이아 전투가 끝나고 3년 뒤 그리스의 북쪽에 있는 변방의 마케도니아에서 23세의 필리포스 3세가 왕이 되었고, 다시 그로부터 3년 뒤에 알렉산드로스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다. 이제 다시 그리스 세계가 이번에는 그리스 본토를 넘어 동방 세계까지 웅비할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아버지, 필리포스 (2세)
(재위 기원전 359년~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3세 출처 구글 이미지]

신들이 등을 돌린 땅


그리스의 북부와 중남부를 가르는 경계에 있는 올림포스산은, 3,000미터에 육박하는 높이로 그리스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정상 근처는 운무가 자욱한 날이 많다. 고대 그리스인은 올림포스산에 자신을 지켜주는 신들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신들은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올림포스산은 인간적인 남신들과 여신들이 제우스를 중심으로 모일 때 활용하는 거주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올림포스산 위에서도 신들이 북풍이 불어오는 북쪽이 아니라 따스한 남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다. 따라서 남쪽에는 그리스의 유력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테베, 코린토스, 스파르타뿐만 아니라 항상 신탁을 하러 오는 사람들로 붐비는 델포이가 있었고, 4년에 한 번 그리스 전역에서 운동선수들이 모여드는 올림피아도 있었다.

[올림포스산 출처 구글 이미지]


마케도니아는 올림포스산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신들이 등을 돌리고 있는 뒤쪽이었다. 마케도니아는 민족적으로는 그리스인이었고 다른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신들을 신앙했다. 사투리가 심하다고는 하지만 말하고 쓰는 언어도 그리스어였다. 그럼에도 올림피아에서 거행되는 고대올림픽, 즉 그리스인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한 올림픽에 300년 동안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

[고대 그리스 올림피아 상상도 출처 구글 이미지]
[고대 그리스 올림픽 종목들 출처 구글 이미지]

민주정치와 과두정치의 중 하나를 채택하고 있는 그리스의 도시국가가 보기에 왕정을 유지해온 마케도니아는 정치, 군사,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오랫동안 후진국 취급을 받아왔다. 게다가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황제 크세르크세스가 침공해왔을 때도, 그의 최후통첩에 단호하게 거부한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은 마케도니아에 참가해달라고 요청도 하지 않았다. 마케도니아는 곧바로 페르시아 황제의 요구에 굴복하고 속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2차 페르시아전쟁은 기원전 480년의 살라미스해전, 다음 해의 플라타이아전투에서 그리스가 대승을 거두었고, 그 후 마케도니아는 고대올림픽에 처음으로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유로는 승리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자신감 때문인지 적에게 붙은 마케도니아에 관대했다는 점을 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120년 동안에도 여전히 마케도니아에 대해서는 거의 무시에 가까운 상태가 지속되었다. 고대올림픽에서 우승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리스 세계에서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가 차례로 패권을 차지하는 시대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오랫동안 올림포스 신들이 등을 돌리고 있던 마케도니아에서 필리포스라는 젊은이가 20세를 맞이했다.


껍질을 벗은 마케도니아


필리포스는 기원전 382년 아민타스 왕의 3남으로 수도 펠라(pella)카지노 게임 추천 태어났다. 12년 뒤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오른 사람은 장남 카지노 게임 추천였다. 참고로 마케도니아의 왕가는 필리포스나 알렉산드로스, 페르디카스라는 전통적인 이름이 반복해서 나오는데, 우리가 다루고 있는 필리포스는 정식으로는 ‘필리포스 2세’가 된다. 그의 아들이며 훗날 대왕 칭호를 받는 카지노 게임 추천는 ‘카지노 게임 추천 3세’가 정식 명칭이다.


장남 카지노 게임 추천는 왕이 된 지 불과 2년 뒤에 친족에게 살해되고 만다. 집안 소동이 가라앉은 다음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오른 이는 둘째 페르디카스였다. 둘째가 통치하던 시기에 동생인 필리포스는 테베에 인질로 보내졌다.당시 테베는 기원전 371년에 벌어진 레우크트라전투를 통해 하드 파워, 즉 군사력에 의해 패권을 향유하고 있는 스파르타를 굴복시키고, 역사적으로는 ‘테베의 패권 시대’라고 부르는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테베카지노 게임 추천 필리포스는 10대 후반을 보냈다. 필리포스는 테베카지노 게임 추천 철저하게 병력을 활용하는 방법을 충분히 배우고, 테베의 유명한 장군인 에파미논다스(Epaminondas), 펠로피다스(Pelopidas)와도 교류를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테베는 자원도 부족하고 인구도 부족했기 때문에 결국 기원전 369년 ‘만티네이아’ 전투카지노 게임 추천 에파미논다스가 전사하면서 ‘테베의 패권 시대’는 불과 9년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에파미논다스와 펠로피다스 출처 구글 이미지]

필리포스가 테베의 인질 생활을 마치고 마케도니아로 돌아간 4년 뒤, 왕이 되었던 페르디카스가 일리리아(Illyria)족과 벌인 전투 중에 전사했다. 일단 왕위는 그 아들에게 계승하기로 했지만 아직 미성년이었다. 22세가 된 필리포스는 조카인 왕의 후견인이 되었다. 그런데 어린 왕의 후견인은 혼자가 아니었다. 필리포스는 나머지 4명의 라이벌을 물리치고기원전 359년 초반에 공식적으로 어린 왕의 유일한 후견인이 되었다.


마케도니아에서 왕을 선출하는 제도가 변하면서 이제는 혈통이 절대 조건이 아니었다. 왕은 유력한 장군들에 의해 선거로 결정되었다. 이 마케도니아의 강자들은 혈통이나 능력 모든 면에서 필리포스야말로 자신들의 왕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필리포스는 기원전 359년 23세의 나이로 마케도니아의 왕이 되었다.


새롭게 태어나는 마케도니아 군대


팔랑크스 대형


필리포스는 왕위를 손에 넣자 곧바로 군사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은 당시 그리스에서도 매우 획기적이었다. 도시국가 시대 그리스에서는 아테네나 스파르타, 테베 모두 중무장 보병을 ‘호플리테스(Hoplites)’라고 불렀다. 젊은 왕의 개혁 이후에는 마케도니아의 중무장 보병을 ‘팔랑크스(Phalanx)’라고 불렀다. 달리 ‘밀집 장창 대형’이라고도 부른다.


필리포스는 먼저 ‘팔랑크스’의 요원이 될 수 있는 사람을 농민층까지 확대했다. 숫자가 한정된 ‘정예’가 아니라 숫자가 충분한 ‘베테랑’을 양성하려고 했다. 사료가 없기 때문에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필리포스는 모병 대상을 “체력이 강하고 민첩하며 장기적으로 훈련시킬 수 있는 20대로 한정”한 것으로 보인다.


필리포스가 ‘유학’했던 시기에, 테베는 기원전 371년에 벌어진 레우크트라(Leuktra)전투에서 에파미논다스의 지휘 아래, 강건하기는 하지만 움직임이 느린 스파르타의 중무장 보병 700명을 민첩한 테베의 300명이 격파한 적이 있는데(시차를 두기 위해 ‘사선대형‘을 활용한 전투로 유명, 아래 그림 b, c참조), 필리포스는 테베의 이런 면을 흉내낸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스파르타의 ‘호플리테스’의 강인함에도 주목했다.

[레우크트라 전투 출처 구글 이미지]

장비의 개선


필리포스는 스파르타의 중무장 보병이 지닌 내구성을 한층 높이려고 했다. 이를 통해 스파르타 용사의 특징인 적의 공격을 견딘 다음 발휘하는 공격력을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도 갖추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 먼저 투구, 흉갑, 갑주, 방패, 칼은 가볍게 만들었다. 또한 기존 활의 파괴력을 훨씬 높힌 개인 휴대용 ‘가스트라페테스(Gastraphetes)’와 대형 화살 발사기인 ‘옥시벨레스(Oxibeles)’등을 갖추었다.

[가스트라페데스와 옥시벨레스 출처 구글 이미지]

그리고 창은 그리스 도시국가 중 길기로 유명한 스파르타의 창보다 2배쯤 길게 바꾸었다. 스파르타의 중무장 보병이 지닌 창의 길이는 3.5미터였는데 마케도니아의 창은 그보다 긴 6.5미터였다.그리고 너무 길어 다루기 어려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장창을 둘로 나누고 금속으로 만든 통으로 조립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 장창은 ‘사리사(sarisa)’라는 이름이 붙었고, ‘팔랑크스’와 더불어 마케도니아의 중무장 보병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필리포스가 생각해낸 또 하나의 방법은 그리스 도시국가의 중무장 보병의 전통이기도 한 밀집대형을 더욱 대형화하는 것이었다. 전략 단위의 대대는 가로로 260명, 세로로 16열이었다고 한다. 즉 1개 대대가 4,160명의 병사로 편성되었다는 뜻이다. 앞에서부터 5열까지의 병사들은 왼팔에 든 방패로 가슴을 방어하는 동시에 오른손을 더한 양손으로 ‘사리사’를 평행하게 가로로 들었다. 6열 이후의 병사들은 창을 든 각도를 조금씩 위로 올렸다.


전투가 벌어지면 장창 ‘사리사’가 ‘숲’을 이루는 여러 개의 ‘팔랑크스’가 적에게 어떻게 비쳤을까? 거대한 고슴도치와 마주한 것처럼 공포를 느끼지 않았을까? 필리포스는 각각의 병사들에게 정예병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팔랑크스라는 형태로 집단을 이루었을 때 정예화될 것을 요구했다.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 출처 구글 이미지]

공성용 장비 개발


또한 이 시기에 새로운 공성용 장비들도 등장하였다. 동물 내장이나 말꼬리 등의 뒤틀림을 활용한 투석기(catapult)인 ‘오나거’(Onager, 쏠 때마다 들썩거린다고 해서 아시아 당나귀인 ‘오나거’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와 이동이 가능한 대형 공성탑인 ‘헬레폴리스’(Helepolis)가 개발되었다. 헬레폴리스 내에는 옥시벨레스가 장착되었고 외부는 목재에 가죽을 덧대어 불에 타는 것을 방지했다고 한다.

[마케도니아의 공성용 장비들, 투석기 오나거, 공성탑 헬레폴리스 출처 구글 이미지]

선두 지휘관 파르메니온


필리포스에 의한 개혁은 대체로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개혁을 결정한 당사자의 의지가 흔들림 없이 지속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개혁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선두에 서서 협력할 결의와 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 있어야 한다. 젊은 마케도니아의 왕에게는 파르메니온(Parmenion)이 있었다.


파르메니온은 마케도니아의 귀족 출신으로 기원전 400년 전후에 태어났다. 그렇다면 필리포스보다 18세 연장자라는 말이 된다. 필리포스가 2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파르메니온은 41세였다.이 사람이 어떤 방법으로 농민 출신 젊은이들을 베테랑 중무장 보병으로 키웠는지 알려주는 역사적인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파르메니온 상상도와 폴란드 작가 캐롤 번쉬의 ‘파르메니온’ 출처 구글 이미지]

들판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팔랑크스’는 여러 개가 된다. 기병이나 경무장 보병까지 가세한 전체 군대의 지휘를 맡은 것은 필리포스지만, 숫자만 보면 파르메니온이 지휘하는 병사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 즉 팔랑크스의 1개 대대마다 지령이 정확하게 도달하지 않을 위험이 있었다.


각 ‘팔랑크스’의 가장 앞 열에서도 제일 오른쪽에 배치된 병사의 중요성을 알아차리고 그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 병사는 오케스트라에 비유하면 지휘자, 축구에 비유하면 주장의 역할을 맡는다. 파르메니온이 내린 지령을 받는 것도 이 병사였다.


필리포스에 의한 개혁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중간관리직까지 파르메니온이 내린 명령이 정확하고 재빠르게 전달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마케도니아의 중무장 군단은 혼전이 벌어졌을 때도 혼란을 상당히 피할 수 있다. 이 또한 군대가 강해진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필리포스는 명령을 파르메니온을 통해 각 팔랑크스의 주장에게 전달해 전체 군대를 철저하게 하나로 만들었다.


경무장 보병과 기병


마케도니아 군대에는 ‘팔랑크스’ 외에 경무장 보병도 있었다. 궁수와 투석병에 더해 ‘사리사’보다 짧은 창으로 싸우는 병사들이 있었다. 필리포스는 그들을 주요 전력인 ‘팔랑크스’의 보조 병사로만 활용했다. 이 병사들을 멋지게 활용한 사람은 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였다. 알렉산드로스는 기병도 달리 활용했다.


고대인은 등자를 몰랐다. 그래서 기병은 말 위에서 발을 고정시킬 수 없었다. 기병은 그 상태에서 적의 창에 찔리거나 적이 던진 창에 맞아야 했다. 두 발을 꽉 붙인 채로 공격력을 발휘하려면 어릴 때부터 말을 타서 익숙해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올림푸스 산 바로 남쪽에 있는 테살리아 지방에는 말이 많았고 당연히 숙달된 기병도 많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철저하게 활용했다. 필리포스는 도시국가 시대의 그리스를 상당한 수준으로 뛰어넘었지만, 아들과 비교했을 때는 그리스를 초월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인접 국가에 대한 대책


왕위에 취임하고 3년이 지나갔다. 그사이 ‘팔랑크스’는 착실하게 성장했다. 실험을 거듭하며 개량할 수 있는 기회도 충분했다. 거대한 고슴도치를 거느린 파르메니온은 종종 마케도니아와 국경을 인접하고 있는 일리리아(Illyria)족의 퇴치에 나섰다.

[출처 구글 이미지]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오른 지 4년째 되던 기원전 356년은 26세의 필리포스에게 기쁜 소식이 끊이지 않는 해였다. 가장 먼저 도착한 소식은 일리리아족을 제압하기 위해 떠난 파르메니온에게서 온 것이었다.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이었다.


다음으로 왕비 올림피아스(Olympias)가 남자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그해 17세인 올림피아스는 필리포스의 세 번째 아내였지만 중요도를 따지면 이전의 여자들과는 전혀 달랐다. 마케도니아의 서쪽과 인접한 곳에 위치한 에피로스(Epirus)의 공주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략결혼을 했다. 태어난 남자 아이의 이름은 마케도니아 왕가의 전통적인 이름이기도 한 알렉산드로스로 붙였다.

[올림피아스가 새겨진 메달 출처 구글 이미지]

그다음으로 받은 소식에 필리포스는 미친 듯이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올림피아에서 열리는 고대올림픽에서 마케도니아 출신 선수가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는 소식이었다. 그것도 투창이나 원반던지기에서 우승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 모든 관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하는 가운데 치러지는 전차 경주에서 우승했다. 그동안 마케도니아인의 머리에 월계관이 올려진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향상된 경제


필리포스가 왕이 된 초기에 북쪽 침공에 집중해 마케도니아의 영토가 크게 확대되었다. 젊은 왕은 획득한 땅과 기존의 마케도니아 왕국의 영지를 합쳐 구획을 정리한 다음 농민에게 나눠준 듯하다. 게다가 관개공사까지 해주었기 때문에 마케도니아의 자작농이 단숨에 급증하고 자신의 농지를 갖게 된 자작농들의 농업 생산성도 크게 증가했을 것이다.


젊은 마케도니아의 왕은 상업적인 정책도 잊지 않았다. 경제 부흥을 이루는 데 중요한 점은 양질의 통화를 확보하는 것이다. 화폐의 질뿐 아니라 남신인 아폴론의 옆얼굴을 모사한 것으로 보이는 주조 기술에서도 당시 경제 대국이던 카르타고의 통화에 뒤지지 않는다. 동지중해 지역에서 사용된 국제통화는 페르시아의 다리코스와 아테네의 드라크마였다. 필리포스가 지배하는 마케도니아는 국내외에서 모두 유통되는 국제통화 시장에 단번에 진출했다.


이와 함께 거점 도시들을 만드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자기의 이름을 붙인 ‘필리포폴리스(오늘날의 플로브디프)’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신도시로 건설된 곳은 판가이온(Pangaion) 산악 지대의 동쪽에 위치한, 트라키아 지방의 광산지대였다. 판가이온 서쪽에는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네 영토였던 암피폴로리스가 있었다. 필리포스는 과거 아테네 부유층의 해외 자산이 집중되어 있던 트리키아의 광산까지 손에 넣으려 한 것이다.

[불가리아 플로브디프의 로마 시대 유적 출처 구글 이미지]

이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아테네와 이익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 무렵의 아테네는 ‘데모크라티아’의 국가라는 점카지노 게임 추천는 다를 바 없었지만, 이미 테미스토클레스나 페리클레스가 살던 시대의 아테네는 아니었다. 아테네도 광산의 이권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필리포스가 암피폴리스를 돌려주겠다고 먹이를 제시한 외교전에 농락당하고 말았다.

올림푸스 남쪽으로


마침내 마케도니아의 왕에게 올림포스 남쪽, 즉 그리스의 중남부로 진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그리스 도시국가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역사적으로는 ‘신성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이름과 달리 신성함은 조금도 없는 매우 저급한 문제 때문에 발생한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신성’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은 모든 그리스인이 성지로 삼고 있는 델포이의 땅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델포이의 주민 가운데 신탁을 하러 오는 사람이나 대여 금고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이 흘리고 가는 돈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 사람들은 ‘성역’으로 여겨지는 델포이 주변 땅에서 경작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신성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이런 경작 행위가 아폴론 신전을 더럽히는 불경한 행위라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 쪽은 테베였다. 델포이가 있는 포키이아 지방 전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고소를 당한 포키이아 쪽도 그리스인이었기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물론 벌금을 지불할 마음도 전혀 없었다. 그래서 델포이 신탁을 제일 좋아하는 스파르타에 테베에 대항하기 위한 지원군 파견을 요청했다. 테베가 만티네아전투에서 패권 국가의 지위에서 밀려난 기원전 362년부터 시작해 기원전 353년까지 9년 동안 ‘신성전쟁’은 옥신각신 작은 충돌을 거듭하면서도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지리멸렬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제2기가 시작된 기원전 352년, 30세가 된 필리포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올림포스산의 남쪽에 펼쳐진 테살리아 지방으로 군대를 진군시켰다.30세의 마케도니아 왕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을 누가 손에 넣을지에 관심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남쪽으로 진출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를 위해 ‘신성전쟁’을 이용했을 뿐이다.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의 도시국가 가운데 누구도 본격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사이에 필리포스는 테살리아 지방을 사실상 손에 넣었다. 그리고 막 손에 넣은 테살리아 지방을 믿을 수 있는 아군으로 만들 필요도 있었다. 테살리아 지방은 좋은 말이 많은 곳으로 뛰어난 기병을 많이 배출한 땅이었다.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 군대에 속해 있는 기병 300명을 10배 정도 늘리고 싶어 했다.


‘우국지사’ 데모스테네스


이 시기 젊은 마케도니아 왕에게 번번이 우롱당하고 있던 아테네인에게 이래서는 안 된다고 호소하는 인물이 나타났다. 후세에 ‘폭군에 항거해 과감하게 몸을 일으킨 자유의 기수’라는 칭찬을 받은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였다. 그로부터 ‘폭군’이라고 불린 필리포스보다 나이는 두 살 연상이므로 동시대 인물이었다. ‘폭군’을 규탄하는 ‘자유의 기수’의 혀끝은 예리하고 에너지가 넘쳤으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데모스테네스 흉상 출처 구글 이미지]

젊은 데모스테네스의 생각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페리클레스 시대로 돌아가자는 말이 된다. 페리클레스 시대로 회귀하자고 주장하는 데모스테네스는 모순적이게도 필요한 재원을 페리클레스가 시작한 아테네의 사회복지 정책을 개정하면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아테네 시민들의 마음이 떠나고 말았다.


‘테오리콘(theorikon)’이라는 민주국가 아테네의 사회복지 정책은 매일 노동을 해서 가족을 부양하는 제4계급, 즉 로마 시대의 ‘프롤레타리아’가 생계 걱정 없이 군인이 되고 아무 걱정 없이 공무원이 되어 일할 수 있도록 만드는 정책으로 페리클레스가 생각해서 정책화하고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선동가 ‘클레온’이 인기 영합 차원에서 상시 복지정책으로 확대한 것이다.


이제 ‘테오리콘’ 제도는 아테네의 하층민이 손을 대면 안 되는 ‘성역’과도 같은 것이 되었다. 긴급하게 군선을 만들 필요가 있거나 신선한 물을 확보하기 위한 공사를 해야 한다 해도 ‘테오리콘’에 손대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시민집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제4계급이 목소리를 높였다. ‘테오리콘’에 손을 대기보다 제3계급 이상의 자산가들로부터 돈을 걷으라고 소리쳤다.


열변을 토해냈지만 우국지사 데모스테네스의 제안은 하나도 실현되지 못했다. 매년 10명씩 선출하는 스트라테고스에 한 번도 뽑히지 못했다. 데모스테네스는 동포의 차가운 반응에 절망했는지 시민집회를 무대로 하는 정치가보다는 널리 시민에게 호소할 수 있는 언론인으로 진로를 변경했다. 『필리피카(Philippika)』를 써서 공표하는 언론인이 되었다.

[연설카지노 게임 추천 비난을 받고 퇴장하는 데모스테네스와 '필리피카' 출처 구글 이미지]

데모스테네스는 기원전 340년에 발표한 네번 째이자 마지막 『필리피카』에서 아테네가 오리엔트의 대국인 페르시아와 손 잡고 마케도니아의 확장 노선을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아테네 내부에서도 호응을 얻지 못했는데, 고령이지만 아테네에서 누구보다 존경받고 있던 이소크라테스(Isocrates)와 정반대되는 생각이었다. 86세인 이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의 장래를 위해 마케도니아와 손잡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데모스테네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이후 기원전 322년, 6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자살이었다. 그해 아테네가 마케도니아 왕국에 편입됨으로써 독립한 도시국가로서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폭군과 그의 아들이 방치했기 때문에 아테네는 연명할 수 있었지만 알렉산드로스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장군들은 더 이상 힘빠진 아테네를 방치하지 않았다.



마케도니아와 아테네의 강화조약


30대에 접어든 마케도니아의 왕은 그리스 내부의 다툼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 사이 과거 아테네의 세력권 안에 있던 트라키아 지방을 착실하게 공략하고 있었다. 아테네 역시 데모스테네스의 질타가 없어도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트라키아 지방의 광산에 얽혀 있는 이권이 아니라 흑해에서 수입하는 주요 식량인 밀의 안전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신성전쟁은 질질 끌리면서 소강상태였고 아테네와 마케도니아 사이의 군사적이고 외교적인 전쟁도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아테네는 식량 확보라는 중요한 일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강화를 위한 교섭단을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로 보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데모스테네스였다. ‘우국지사’도 외교에서는 별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테네의 유력자들이 총동원된 교섭단은 30대 중반의 필리포스에게 계속 당하기만 했다. 한번은 마케도니아 수도인 펠라까지 갔지만 왕을 만나기 위해 50일이나 기다린 적도 있었다. 트라키아 지방을 제압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도 교섭단 가운데 누구보다 인내심이 강한 필로크라테스의 노력 덕분에 기원전 346년에 마케도니아와 아테네 사이의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이 강화조약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테네가 이 조약을 통해 얻은 것은 마케도니아 쪽에 포로가 되었던 아테네 시민의 귀국이었다. 트라키아 지방 광산의 채굴권도 아테네인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소유권은 마케도니아의 왕에게 있었다. 또한 식량 보급로의 안전도 보장 받았다. 대신 아테네는 그토록 되찾기를 바란 암피폴리스를 잃었다.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귀국한 교섭단은 시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시민들은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을 피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마케도니아의 남하


한편 필리포스는 단순한 30대 남자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테르모필레를 향해 다시 마케도니아 군대를 남하시켰다.테베의 요청이 있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테네인은 이제 막 성립된 조약에 마케도니아의 남하 금지 조항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을 고통스럽게 곱씹을 뿐이었다. 하지만 필리포스는 테베 쪽에 가담하기보다는 중개자의 입장에 서는 편을 선택했다. 포키이아 쪽도 전쟁에 넌더리를 내던 참이었다. 마케도니아의 개입은 양쪽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리스의 중소 도시국가에 대해서는 성지 델포이를 지키겠다는 의지 표명을 통해 호감을 사는 전략으로 임했다. 그것을 믿은 그리스인은 필리포스를 델포이에서 열리는 경기 대회의 주최자로 추천했다. 그리스의 4대 경기 대회 중 주신 제우스에게 바쳐진 올림피아에서 열리는 경기 대회가 가장 유명했고, 그다음이 델포이에서 개최되는 아폴론 신에게 바쳐진 경기 대회였다. 경기 대회를 주관하는 것은 매우 명예로운 임무로 여겨졌다.


또한 필리포스에 의한 외교전이 효과를 발휘해서, 아니 그보다 델포이를 둘러싼 다툼을 쌍방 모두 지속할 마음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하겠지만, 아무튼 ‘신성전쟁’이 마침내 종결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테베나 포키이아 모두 델포이 신전의 운영을 마케도니아 왕에게 일임하기로 하고 서로 손을 잡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필리포스는 그리스인의 첫 번째 성지로 꼽히는 델포이 신전의 수호자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과 아테나 신전 출처 구글 이미지]
[델포이의 신탁과 무녀 피티아 그림과 상상도 출처 구글 이미지]

나우팍투스 점령


그런데 지금까지 매우 신중한 행보를 보인 필리포스였지만 아테네가 에게해뿐만 아니라 지중해 서쪽에도 시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듯했다. 코린토스만의 입구에 위치한 나우팍투스에 군대를 보내 그곳을 점령한 것이다. 그러자 아테네는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나우팍투스(후대의 레판토)는 아테네에서 지중해 서쪽으로 나가는 중간 기지로 오랫동안 중요한 역할을 한 해양 도시였다. 자국의 교역로, 즉 시장이 걸린 일이었다.

[나우팍투스 출처 구글 이미지]

이런 사정 등으로 반反마케도니아 정서가 강해진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델포이에서 필리포스가 주최하는 경기 대회를 보이콧하기로 했다. 전쟁을 하던 중에도 무기를 내려놓고 적개심을 잊은 채 몰두한 그리스의 경기 대회가 정치적인 이유로 보이콧된 첫 번째 사례였다. 기원전 4세기 중반, 당시 아테네에서는 보이콧하는 것만으로 시민들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먼저 마케도니아와의 강화조약을 담당한 필로크라테스가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고발을 당해 재판장에 끌려나온 필로크라테스는 사형을 면하기 위해 타국으로 망명하는 쪽을 선택했다.그렇다고 아테네 스스로 군사력을 강화해 마케도니아와 정면 대결할 마음도 없었다. 결국 테베와 손을 잡고 대결하기로 했다. 대규모 군대를 편성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스 중앙부에 전운이 감도는 사이 2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스의 지배자로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오른 지 22년째가 된 필리포스는 처음으로 본격적인 전투에 나섰다. 상대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무너뜨린 테베가 중심이 된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이었다. 하지만 마케도니아 군대에도 유리한 점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 용병이 많은 도시국가의 연합군과 달리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국민 군대라 해도 좋을 정도로 일체감이 강했다. 둘째, 경험이 전혀 없었기에 상대에 대한 과거의 성공 경험에 속박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카이로네이아 전투


어쨌든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 사이에 있었던 카이로네이아(Chaeronea)전투는 여러 선진국과 불과 20년 전까지 후진국으로 간주되었던 신흥국 사이의 정면 대결이었다. 기원전 338년 여름, 북쪽에서 남하한 마케도니아 군대와 남쪽에서 북상한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은 델포이에서 동쪽으로 30킬로미터에 위치한 카이로네이아평원에서 마주쳤다.

[카이로네이아 전투 경로 출처 위키피디아]

도시국가 연합군의 우익은 1만 2,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참전한 테베 군대가 차지했다. 지휘관은 테베인 테아게네스(Theagenes)였다. 9,000명이 참전한 아테네는 좌익을 맡았다. 중앙은 코린토스를 비롯해 중소 도시국가에서 온 9,000명에 이르는 병사들이 맡았다. 용병 5,000명은 둘로 나뉘어 우익과 좌익의 후방에 배치되었다.


양군의 배치


마케도니아 군대는 우익·중앙·좌익이라는 그리스 군대의 전통적인 포진을 답습하지 않았다. 3만 명에 이르는 ‘팔랑크스’와 경무장 보병을 포함한 군대를 둘로 나누어 오른쪽은 근위부대에 에워싸여 있는 필리포스 왕이 지휘를 맡고 왼쪽은 파르메니온이 지휘하는 형태였다. 마케도니아 군대의 가장 왼쪽에는 2,000명의 기병이 배치되었다.


전투 직전의 포진을 보면 필리포스가 아들에게 좌익을 일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카이로네이아전투 1). 실제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명령이 있을 때까지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 상태였다. 당연한 일이다. 카이로네이아전투는 알렉산드로스가 처음으로 참여한 전투였고, 당시 알렉산드로스는 병역 연령인 20세에 이르지 못한 18세의 미성년자였다.

카이로네이아의 평원은 도시국가 연합 쪽에 유리한 지세였다. 왼쪽에 있는 낮은 언덕과 오른쪽에 구불구불하게 흘러가는 강 사이에 사방 3킬로미터 정도의 평원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테베 군대의 가장 오른쪽에는 33년 전 ‘레우크트라전투’에서 스파르타를 패권 국가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이후 불패를 자랑하는 ‘신성 부대(Sacred Band)’300명이 준비하고 있었다.


북쪽카지노 게임 추천 남하해왔기 때문에 불리한 곳에 진을 칠 수밖에 없었지만 44세의 필리포스는 그에 대한 대책을 세웠다. 마침내 전쟁이 시작되었다(카이로네이아전투 2). 필리포스가 자신이 지휘하는 우익에게 내린 명령은 고슴도치 형태를 무너뜨리지 않은 채 그대로 후퇴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적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조금씩 물러나는 후퇴였다.

후퇴하는 ‘팔랑크스’를 본 아테네 군대의 지휘관은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이 기세로 적을 마케도니아까지 쫓아내자!” 그러나 아테네 군대의 누구 하나 자기들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이때 필리포스가 멈추라는 명령을 내렸다. 뒷걸음질에서 해방된 ‘팔랑크스’와 아테네 군대는 접근전에 돌입했다. ‘사리사’의 위력이 발휘될 차례였다(카이로네이아전투 3).


이렇게 도시국가 연합군의 좌익과 마케도니아 쪽의 우익, 아니 우익이라기보다는 오른쪽이라고 해야 할 군대와 격전이 시작되었다. 그때 ‘팔랑크스’의 뒷걸음질에 자극을 받았는지 도시국가 연합군의 중앙에 있던 군대까지 격전에 가담했다. 연구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단계에서 양쪽 모두 아군의 승리를 믿고 있었다고. 그리스 연합군의 우익에 포진한 테베 군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육안으로 보기에, 양쪽 군대의 거리가 1킬로미터 이내로 줄어들기 전에는 어디가 적의 우익이고 어디서부터가 적의 중앙인지 절대로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필리포스의 후퇴 작전과 그 기세를 탄 아테네 군대의 전진에 의해 그것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가장 왼쪽에 물러나 있던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기병대와 그들을 상대하는 테베 군대와의 간격이 좁혀질 때 그 구분이 분명해졌다.


18세의 카지노 게임 추천는 이 ‘때’를 놓치지 않았다(카이로네이아전투 4). 돌파구가 어디에 있는지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명령이 없었다. 아마 알렉산드로스는 승리를 앞두고 아버지의 말을 잊었을 것이다. ‘따르라’고 외칠 필요도 없었다. 선두에 서서 말을 달리는 알렉산드로스의 뒤로 마케도니아의 기병들이 따라갔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18세의 알렉산드로스와 그를 따르는 마케도니아 기병은 테베 군대의 배후에 도달한 다음에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테베 군대의 가장 오른쪽에 포진한 ‘신성 부대’를 향해 돌격했다. 30년 동안 불패의 용맹함을 발휘한 테베의 엘리트 부대는 바로 그때 전멸했다. 역사서에는 300명 전원이 가슴에 창을 맞고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성부대를 전멸시키는 카지노 게임 추천 출처 유튜브]

기원전 338년 8월 2일에 벌어진 ‘카이로네이아전투’는 마케도니아의 대승으로 끝났다.1만 2,000명이 참전한 테베 군대에서 살아남은 병사는 10분의 1에 불과했다. 9,000명이 참전한 아테네 군대는 1,0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고 2,000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 마케도니아 쪽의 사상자 수에 관한 사료는 없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벌을 내리는 방법


군대에서는 최고사령관의 엄명을 무시하고 돌격하면 엄벌에 처한다. 그렇지만 승기를 잡고 그것을 철저하게 활용해 승리를 거둔 사람이 알렉산드로스라는 사실을 마케도니아 군대의 일개 병사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44세의 아버지는 18세의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벌을 내렸다. 아테네 군대의 전사자들을 화장하고 재를 넣은 항아리를 갖고 아테네로 가서 왕이 명령했다고 말하고 아테네 정부에 건네주라는 것이었다.


18세의 아들은 그 자리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당시 아테네는 카이로네이아에서 승리한 마케도니아 군대가 당장이라도 공격해올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살벌한 분위기였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속을 혼자 아크로폴리스까지 걸어갔고 그곳에서 기다리던 정부 인사에게 항아리를 건네며 조의를 표한 다음 올 때처럼 차분한 걸음으로 돌아갔다. 적진에서 상대를 자극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굴하지도 않은 걸음이었고, 그런 모험이었다.


필리포스가 아들에게 아테네로 재를 가져가게 만든 목적은 아들에게 벌을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아테네를 아군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역할을 수행한 아들이 무사히 돌아온 직후, 마케도니아 고관 두 명과 함께 포로로 잡힌 아테네의 유력자를 보내주었다. 아테네와 강화조약을 맺기 위한 행위였다. 게다가 마케도니아 쪽에 포로가 된 2,000명 전원을 즉시 귀국시켜주겠다고 덧붙였다.


필리포스가 언제 공격해올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아테네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유리한 강화 제안을 덥석 물었다. 그리고 카이로네이아전투에서 패했다는 이유로 사령관을 사형에 처했다. 참고로 후세에 ‘우국지사’로 인정받은 데모스테네스는 46세였지만 카이로네이아전투에 참가했고, 패배 후 포로가 되지 않고 재빨리 도망쳐 아테네로 돌아와 있었다. 데모스테네스가 필리포스를 규탄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코린토스 협약


기원전 338년 가을, 마케도니아 왕이 소집한 범汎그리스 회의가 코린토스(Korinthos, 현 그리스 Corinth)에서 열렸다. 스파르타 외의 모든 도시국가가 코린토스에 대표를 보냈다. 마케도니아의 왕은 그리스의 중남부 전체를 마케도니아로 병합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각 도시국가의 독립을 완전히 인정하는 상태에서 ‘연방’, 영어로 하면 ‘confederation’의 결성을 제창했다.


1. 각 도시국가는 국력에 따라 연방에 의원을 보낼 권리를 갖는다.
2. 앞으로 그리스에서는 연방에 가맹하고 있는 도시국가 사이의 전투 행위를 전면 금지한다. 방위의 경우 동맹 관계인 연방 전체가 대응하고 각 도시국가는 국력에 따라 병력을 보낼 의무를 진다.
3. 연방은 가맹하고 있는 도시국가의 주민 가운데 외국의 용병이 되는 행위 등을 통해 연방에 적대하는 자는 그리스인 전체에 대한 배신자로 간주하고 국가에서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한다.
4. 연방은 가맹국의 모든 국경과 정치적인 독립을 존중한다.
5. 어떤 도시국가도 다른 도시국가에 공물이나 돈을 요구하거나 국내에 기지를 설치할 것을 요구할 수 없다. 다만, 그 땅이 연방 전체의 방위를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
6. 바다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다. 통상의 자유는 완벽하게 보장되어야 하고 해적은 모두의 적으로 대처한다.
7. 그리스 연방의 군대를 지휘하는 것은 마케도니아 왕인 필리포스 2세이며, 왕은 연방 회의를 소집할 권리도 갓는다.
8. 성지 델포이를 둘러싼 다툼과 같은 사례는 앞으로 연방의 최고재판소에서 해결하도록 한다.


그런데 많은 국가가 모여 성립된 동맹에는 전원이 납득할 수 있는 목표가 있어야 했다. 코린토스 회의 마지막에 필리포스가 그 ‘목표’를 읽었다. 페르시아제국에 대한 공격과 정복이 그것이다.에게해의 맞은편에 살고 있는 그리스인을 페르시아 황제의 지배 아래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150년 전 아테네인 테미스토클레스가 매달린 목표이기도 했다.

[코린토스 유적과 코린토스 운하 출처 구글 이미지]

이혼과 재혼


일단 전후 처리를 끝내고 수도 펠라로 귀국한 필리포스가 개선 이후 한 일은 오랜 아내인 올림피아스와의 이혼이었다. 이혼 후 곧바로 딸과 비슷한 나이인 클레오파트라와 재혼했다. 고관인 아탈로스의 조카였던 듯하다. 클레오파트라는 필리포스나 알렉산드로스처럼 마케도니아 상류층에서 많이 쓰인 이름이었다.


그런데 왕의 결혼을 축하하는 연회 자리카지노 게임 추천 새로운 왕비의 백부로 왕과 새로운 인연을 맺은 아탈로스가 포도주가 든 잔을 손에 쥐고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건배를 청하며 말했다.

“우리의 왕이 순혈의 마케도니아인 후세를 얻기를 기원하며 건배!”


그러자 이렇게 말한 아탈로스를 향해 알렉산드로스는 손에 쥐고 있던 포도주가 든 황금 잔을 힘껏 내던졌다. 알렉산드로스가 아버지의 고관이 내뱉은 무신경한 말에 분노한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는 마케도니아가 보기에 외국인 에피로스의 공주였다. 그 어머니의 피를 받고 태어난 알렉산드로스는 현대식으로 말하면 혼혈이었다. 순혈의 마케도니아 남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알렉산드로스의 행동에 필리포스도 분노했다. 얼마나 화를 냈는지 역사서에 나오지는 않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의 분노한 목소리를 등 뒤로 흘리며 태연하게 홀에서 나갔고 친구들도 뒤를 따랐다. 축하연이 열리는 홀에서만 나간 게 아니었다. 아예 왕궁에서 나갔다. 어머니의 나라인 에피로스로 가지 않고 야만족의 땅인 일리리아족의 땅으로 갔다.


암살


필리포스는 에피로스의 왕과 자기의 딸을 결혼시켜 이혼으로 끊어진 인척 관계를 재구축하려고 생각했다. 에피로스의 왕은 전처 올림피아스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아들 알렉산드로스에게는 외삼촌이었다. 그 왕에게 시집간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로스의 누이였다.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의 왕궁에서 거행된 결혼식과 그것을 축하하는 연회에는 어쩐 일인지 ‘가출’한 알렉산드로스도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다시 충돌했다. 무엇이 발단이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필리포스는 칼을 손에 들고 아들을 향해 가려고 했지만 그날 밤 상당히 마신 모양이다. 취한 몸이 두세 걸음만에 넘어지고 말았다. 아들은 손을 내밀지 않고 그대로 선 채로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유럽카지노 게임 추천 아시아로 가겠다고 말한 사람이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이런 꼴이라니.” 이렇게 내뱉고는 다시 동료들을 데리고 홀카지노 게임 추천 나갔다.


기원전 336년 7월, 그리스 전역의 지배자가 된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가 수도에 있는 극장으로 향했다. 평소처럼 근위대가 호위하고 있었지만 목적지가 극장이었기 때문에 경호 병사들도 평소보다 조금 떨어져 따라갔다. 혼자서 걷는 필리포스 앞에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칼을 손에 쥐고 그대로 달려들었다.


마케도니아 왕은 소리를 지를 새도 없이 살해되었다. 범인은 근위대의 일원인 파우사니아스라는 남자였다. 왕의 시해를 뒤에서 조종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관해서는 올림피아스 등 고대 내내 다양한 주장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고대 역사가 대부분이 추측한 내용이 진상에 가까울 것이다. 즉 파우사니아스의 개인적인 분노에 의한 범행이라는 주장 말이다.


파우사니우스에게는 아름답고 젊은 애인이 있었는데, 고관인 아틸로스가 쫒아다니다가 강간을 하고 버렸다. 버림받은 애인은 정신이 이상해졌고, 격분한 파우사니우스는 이를 필리포스에게 청원했으나, 필리포스는 자기 고관의 일이라 치부하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화를 내며 근위병을 쫓아냈다. 그러자 근위병의 분노는 아탈로스에서 필리포스로 향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46세였다. 그 뒤를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이었다.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마케도니아 왕국에서도 왕을 결정할 때는 가신들, 대체로 유력한 장군이지만 이들이 전원 참석한 가운데 투표로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왕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왕위에 오르는 건 아니다. 알렉산드로스도 전원 선거를 통해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올랐다. 갓 20세의 젊은 왕의 등장이었다.


아들, 카지노 게임 추천 (3세)
(재위 기원전 336년~기원전 323년)


생애 최고의 책


후세에 ‘대왕’이라는 존칭이 붙은 카지노 게임 추천는 기원전 356년 7월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카지노 게임 추천 태어났다.아버지는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였다. 어머니는 이웃 나라인 에피로스의 공주로 필리포스에게 시집온 올림피아스였다.


올림피아스는 내륙에 있는 마케도니아와 달리 바다와 면한 나라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그리스화가 진행된, 적어도 그녀 스스로는 그렇게 믿고 있던 에피로스의 공주였다. 당시 그리스 여자로서는 드물게 ‘배움’이 있었다. 아직 어린 아들에게 『일리아스』를 읽어주었고 아들이 스스로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이 책을 선물했다.


호메로스의 작품인 장편서사시 『일리아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생애 최고의 책’이 되었다. 소년은 이 서사시의 최고 영웅 아킬레우스를 동경했다. 그는 순수하고 정직하며 공정하게 일을 해결하기 좋아했고 장수를 누리기보다는 단명하더라도 빛나는 삶을 살겠다고 호언장담한 『일리아스』의 주인공이었다.


생애 최고의 친구


어린 시절 카지노 게임 추천에게는 놀이 상대가 하나 있었다. 헤파이스티온(Hephaistion)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이었다. 왕가와 비슷할 정도로 유서가 깊은 마케도니아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모계 혈통에 아테네인의 피가 섞여 있었다.


머리 색깔은 알렉산드로스가 검은 고수머리, 헤파이스티온은 갈색 고수머리였다. 키는 헤파이스티온이 조금 컸지만 나이나 몸집이 비슷했고 복장도 두 사람 모두 소년용 짧은 옷을 입었다.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늘 함께했기 때문에 수도에 사는 주민들은 두 사람을 보고 쌍둥이 같다고 말했다.

[카지노 게임 추천와 헤파이스티온 출처 구글 이미지]

물론 두 사람 모두 『일리아스』를 읽었다. 카지노 게임 추천는 책을 덮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킬레우스이고, 너는 파트로클로스*.” * 아킬레우스의 절친이자 부관

헤파이스티온은 알렉산드로스의 아이 같은 논리의 모순을 굳이 지적하지 않고 웃어넘길 줄 아는 상냥함을 갖고 있었다. 이 어릴 적 친구는 훗날 알렉산드로스의 ‘생애 최고의 친구’가 된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아킬레우스 출처 구글 이미지]

목숨을 맡긴 말


바로 그 무렵, 막 12세가 되려고 할 때 알렉산드로스는 또 다른 ‘생애 최고의 친구’를 만나게 된다. 코린토스의 상인이 테살리아 지방에서 난 말 한 필을 마케도니아 왕에게 팔러 왔다. 가격은 13탈란톤이었다. 군선인 삼단 갤리선을 13척이나 진수시킬 수 있는 정도의 값어치였다.


누군가 붙인 ‘부케팔로스(Bucephalus, 소의 머리)’라는 이름이 보여주듯이 머리 부분은 소와 같고 체격은 다른 말에 비해 훨씬 커서 위압감이 대단해 누군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날려버릴 듯했다. 눈빛도 사납고 용맹했으며 인간 따위와는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고 굳게 결심한 듯 보였다.


필리포스의 여러 장군들이 이 말에 타려고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러자 필리포스는 코린토스에서 온 상인에게 사지 않겠다고 말하려 했다. 이때 가만히 구경하고 있던 카지노 게임 추천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에게 말을 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필리포스는, “네가 말을 타면 말을 사서 너에게 주마. 그러나 실패로 끝나면 구입 비용은 네가 지불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카지노 게임 추천는 한참 동안 주변에서 서성이며 조금식 거리를 좁혀가다가, 갑자기 훌쩍 말 위에 올랐다. 부케팔로스는 전력을 다해 몸을 흔들어 소년을 떨어뜨리려고 했다. 고삐가 없어 소년은 말의 갈기를 꽉 붙잡았다. 말과 소년 사이에서 오늘날 미국에서 하는 로데오 경기와 같은 격투가 계속되었는데 한참 후 태도를 바꾼 쪽은 말이었다.

[카지노 게임 추천와 부케팔로스 출처 구글 이미지]

이후 부케팔로스는 소년의 애마가 되었다. 카지노 게임 추천 외에 누구도 그 말을 타지 못했다. 이탈리아어로 ‘Cavallo da Battaglia’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전쟁터에 데리고 가는 말’이 되는데, 중요할 때 목숨을 맡기는 말을 의미한다. 카이로네이아, 그라니코스, 이소스, 가우가멜라, 그리고 인도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까지 알렉산드로스가 승리한 모든 전투에서 그가 목숨을 맡긴 말은 부케팔로스였다.


알렉산드로스가 기병을 활용한 방법은 마름모꼴을 한 기마 군단의 선두에 서서 적을 향해 돌진하는 전법이었다. 체격이 클 뿐 아니라 발도 빠른 부케팔로스는 이 전법에 이상적인 말이었다. 실제로 부케팔로스와 일체가 된 알렉산드로스가 거느린 마케도니아의 기마 군단은 모든 전투에서 승리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스파르타 교육


카지노 게임 추천가 13세가 되었을 때 필리포스는 카지노 게임 추천의 체력 강화와 기술 향상을 맡은 교사를 선택했는데, 이름은 레오니다스였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레오니다스라는 이름은 스파르타 남자만 사용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가 선택한 레오니다스의 지도를 받으며 13세에서 15세까지 만 3년 동안 최고의 ‘스파르타 교육’을 받았다.


아침 일찍 아직 어두컴컴할 때 일어나야 했다. 아침을 먹거나 얼굴을 씻을 여유도 없이 곧바로 중무장 보병의 군장을 몸에 걸쳐야 했다. 무구를 비롯한 모든 것을 합치면 40킬로그램이 넘었다. 스파르타인 교사는 마케도니아의 왕자에게 일반적인 그리스 병사와 동일한 장비를 갖추고 장거리 행군을 하게 했다.


레오니다스가 지도하는 ‘스파르타 교육’에는 동문수학한 친구라 불러도 좋을 젊은이들도 참여했다. 모두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고위 고관의 자식으로 왕의 오른팔인 파르메니온의 아들 필로타스(Philotas)와 마케도니아의 오래된 가문 출신인 크라테로스(Crateros)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스파르타 교육’을 받은 동료들은 훗날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로 진격할 때 군대를 거느리는 장군이 되었다.


[출처 구글 이미지]

스승, 아리스토텔레스


아버지 필리포스가 위대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아들에게 ‘스파르타 교육’만 시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두뇌의 강화와 향상을 위해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초빙했다. 이 무렵 아리스토텔레스는 막 40대에 접어들었다.


태생은 마케도니아였지만 젊을 때 아테네로 유학해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에서 20년 이상 공부한 사람이었기에 아테네인이라고 해도 좋다. 40대 전반, 즉 장년의 전성기에 접어든 철학자가 13세부터 16세가 될 때까지 알렉산드로스에게, 그리고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함께하던 헤파이스티온을 포함한 동료들에게 교양을 가르치는 교사가 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카지노 게임 추천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단순한 우등생으로 끝나고 만다. 카지노 게임 추천는 달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인은 동등한 친구로 대해도 좋지만 그리스인이 아닌 사람(즉 야만족)은 동물이나 식물과 같다고 생각하고 대해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페르시아로 갔을 때 카지노 게임 추천는 특히 이 가르침과는 정반대라고 해도 좋은 태도를 취했다.


기원전 340년, 42세가 된 필리포스는 그리스 북쪽 일대에서 진행해온 압제의 그물을 비잔티온까지 확대하기 위해 군사 행동을 일으켰다. 필리포스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파르메니온이 지휘하는 팔랑크스와 출전했기 때문에 마케도니아 왕국의 주요 전력이 모두 나선 원정이었다. 자리를 비운 왕은 마케도니아의 통치를 16세의 아들에게 맡겼다. 알렉산드로스는 첫 공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필리포스 2세 사망 당시의 마케도니아 영토 출처 구글 이미지]

첫 출전


다음 해 17세가 된 아들에게 아버지는 처음으로 전쟁터를 경험시켰다. 북방의 그리스인과 사소한 분쟁이 있었을 때 파르메니온에게 부탁해 실제 전투를 현지에서 볼 수 있게 했다. 이 경험은 바로 1년 뒤에 꽃을 피웠다. 기원전 338년에 벌어진, 역사에서는 ‘카이로네이아전투’라고 부르는 전투가 막 18세를 맞이한 알렉산드로스의 ‘첫 출전’이었다. 이 전투는 그리스 역사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필리포스에게도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이 후계자는 선두에 서서 적을 향해 돌진하는 습성이 있었다. 세로로 긴 마름모꼴 진형의 선두에 서서 달리기 때문에 아무리 뛰어난 부케팔로스를 타고 있다 해도 적의 공격을 받기 쉬웠다. 카지노 게임 추천가 선두에 서는 것은 그의 신념을 토대로 한 행동이기 때문에 그만두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필리포스는 아들의 이런 습성을 교정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카지노 게임 추천 위대한 인물이었다. 일단 내버려두었지만 클레이토스(Kleitos)라는 이름을 가진 병사를 불러서 아들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클레이토스는 당시 37세였다. 알렉산드로스보다 19세 연장자였다. 북방 민족인 마케도니아인으로는 드물게 엷은 흑색 피부를 가진 사람으로 무인답게 무뚝뚝한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에 그의 별명은 ‘검은 클레이토스(Kleitos the black)’였다.


20세에 왕이 되다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돌연한 죽음은 마케도니아뿐만 아니라 그리스에도 불온한 파도가 되어 퍼져나갔다. 막 20세가 된 알렉산드로스에게는 후계자의 자격을 시험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마케도니아의 규칙에 따르면 부대를 지휘하는 장군들을 소집한 집회에서 추천을 받고 선출되어야 비로소 왕이 될 수 있었다. 이 집회는 최고재판소도 겸하고 있었다. 즉 왕이라 해도 이 집회에서 내린 판결이 없으면 부하를 사형에 처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가 죽고 곧바로 소집된 집회에서 부하들로부터 정식으로 왕으로 인정받았다. 곧바로 알렉산드로스의 지지를 분명하게 밝힌 파르메니온의 존재도 장병들의 지지만큼이나 묵직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아무튼 20세의 알렉산드로스는 최초의 관문을 통과했다. 덕분에 재빠르게 국내 상황을 안정시키고 권력의 공백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코린토스의 재서약


알렉산드로스는 그 뒤에도 속공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필리포스의 죽음과 함께 2년 전의 서약도 백지가 되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을 알아차린 알렉산드로스는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기병 군단만 거느리고 코린토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 대표들을 코린토스로 모이게 했다.


그곳에 모인 대표들에게 2년 전에 필리포스와 맺은 서약, 즉 마케도니아의 패권을 인정하는 서약에 대한 재인식을 요구했다. 이번에는 군사력을 등에 업고 강요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그랬지만 다음의 항목을 추가해 대표들이 결단할 수 있도록 등을 떠밀었다. 코린토스 회의에 참가한 그리스의 모든 도시국가의 자유와 독립을 패권 국가인 마케도니아가 완벽하게 인정한다는 항목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통치에 대한 기본방침은 마케도니아 패권 시대가 되었다고 해도 왕정을 찬양하거나 따를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다만 마케도니아의 패권 아래에서는 각 도시국가 사이의 전쟁을 인정하지 않고 만약 전쟁이 벌어지면 코린토스 회의에서 전원이 함께 해결한다는 내용은 2년 전의 필리포스와 맺은 서약대로 따르기로 했다.


이런 이유로 코린토스에 모인 각 도시국가의 대표들은 알렉산드로스가 내세운 요구가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존중한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이들은 마케도니아의 패권을 인정하고 그 마케도니아 왕이 지휘하는 페르시아 원정을 위한 원군을 파견하겠다고 맹세했다. 이렇게 20세의 알렉산드로스는 코린토스 회의의 서약에 대한 재인식이라는 두 번째 관문도 통과했다.


디오게네스


당시 코린토스에 체재할 때 알렉산드로스라는 이름 뒤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에피소드가 생겼다. 어디를 가도 함께하는 헤파이스티온과 알렉산드로스가 철학자인 디오게네스를 찾아간 일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철학자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코린토스의 시내 한구석에 있는 큰 나무통카지노 게임 추천 살고 있던 철학자에게 젊은 왕이 찾아가 말을 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뭐든 말씀해주시오.”

옷은 찢어지고 몸도 불결한 디오게네스는 나무통에서 알렉산드로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좀 비켜주겠나. 그곳에 서 있으면 해를 가리니까 말이야.”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 출처 구글 이미지]

디오게네스는 ‘견유파(犬儒派)’로 번역되는 일파의 철학자였다. 물질생활을 경멸하고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가치를 조소하는 것을 신조로 하는, 이른바 세상과 등을 진 철학자였다. 세상을 등진 철학자의 이 말에 알렉산드로스는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스스로 알렉산드로스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그가 그런 말을 했을지 의문이다.


켈트족 평정


코린토스에서 돌아온 젊은 왕에게 새로운 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필리포스의 죽음을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북방 야만족에 대한 대책이었다.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북쪽의 적은 막 대두하기 시작한 켈트족이었다. ‘켈트인’은 그리스인이 붙인 이름이며, 로마인은 이들을 ‘갈리아인’이라고 불렀다.


북쪽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발칸반도를 종단해 도나우강까지 가는 행군이었다. 알렉산드로스 시대의 ‘갈리아인’은 대단한 세력은 아니었지만 온난한 기후와 풍요로운 농산물에 대한 동경을 갖고 호시탐탐 남하를 노리는 북쪽에 사는 야만족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 시대 켈트족이 보기에 젊은 왕이 거느린 체계적인 마케도니아 군대가 너무나도 강한 상대였을 것이다. 북방 민족을 상대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알렉산드로스와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알렉산드로스는 켈트족과 일종의 불가침 협정을 맺고 귀국했다.


테베 진압


그사이에 그리스 전역에 가짜 정보가 퍼지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에 돌아와서야 그 소식을 들었다. 도나우강 주변에서 벌어진 켈트족과의 전투 중에 알렉산드로스가 전사했다는 정보였다. 이 정보를 믿었던 테베가 ‘타도 마케도니아’를 기치로 들고 봉기했다. 테베인은 3년 전에 있었던 ‘카이로네이아전투’에서 자국의 엘리트 군단인 ‘신성 부대’가 속공을 구사한 카지노 게임 추천에 의해 전멸하는 바람에 젊은 왕에게 깊은 원한이 맺혔다.


이 소식을 들은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다. 지난번 코린토스에 갈 때와 달리 이번에는 보병의 주력인 팔랑크스를 이끌고 남하했다. 그리고 테베를 포위하고 코린토스 회의에 참가했던 도시국가 전체를 향해 서약을 위반하고 전쟁을 일으킨 테베에 대한 조치를 결정하라고 요구했다. 아테네를 비롯한 도시국가 전체가 테베에 엄벌을 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젊은 왕은 이번에도 신속하게 행동했다. 테베는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주동자들은 처형당했으며, 주민들은 노예로 팔려나갔다. 그리스의 도시국가 가운데 중간 규모의 도시국가이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테베는 그리스 전체가 전율했던 참혹한 불행을 겪으며 사라졌다.


아무튼 1년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알렉산드로스는 좁고 험한 테르모필레의 고갯길을 두 번이나 왕복해야 했는데 그 노력은 응당한 보상을 받았다. 여전히 코린토스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스파르타를 제외하고 모든 그리스의 도시국가는 알렉산드로스의 발밑에서 얌전해졌다. 21세가 된 알렉산드로스에게 이제 아버지가 주장했던 페르시아 원정을 실행할 때가 찾아왔다.


동방 원정


먼저, 남겨두고 가는 마케도니아의 안전과 그리스 내부의 정치적 안정에 대한 배려를 우선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중요한 임무를 안티파트로스(Antipatros)에게 맡겼다. 안티파트로스는 필리포스 시대부터 고위 관료였다. 파르메니온이 군사 분야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오른팔이었다면, 안티파트로스는 외교 분야에서 오른팔이었던 사람이다.

[안티파트로스 출처 위키피디아]

안티파트로스에게는 또 하나 어려운 일을 맡긴 듯하다. 어머니 올림피아스와 잘 지내라는 부탁이었다.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는 기가 셀 뿐만 아니라 무슨 말이든 입 밖으로 내뱉는 여자였다. 게다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뒷일을 맡은 안티파트로스의 외교 수완이 가장 필요한 상대는 어쩌면 올림피아스였을지 모른다.


안티파트로스 입장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재정 문제였을 것이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국고에는 70탈란톤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부채는 1,300탈란톤이나 되었다. 46세에 살해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한 필리포스가 아들에게 13탈란톤짜리 말을 사주는 등 돈을 많이 빌렸기 때문이다. 원정에 참가한 육군을 유지하는 데 매년 200탈란톤이 들었고, 해군을 유지하는 데도 매년 100탈란톤이 필요했다.


이런 상태로는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더라도 모두가 원정을 미루라고 충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21세의 알렉산드로스는 순발력이 떨어진다는 등의 이유로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다음 해 봄에 출전하기로 결정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은 자금의 운용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큰 사업에 진출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역시 젊기 때문에 가능한 엄청난 모험이었다.


병력의 구성


전체 규모가 3만 5,000명에 이르는 군대의 최고사령관은 코린토스 회의에서 도시국가들의 승인을 얻어 21세의 어린 알렉산드로스가 맡았다. 그다음 자리는 아버지 세대로 나이가 60대 후반에 접어든 파르메니온이 있었다. 3만 명에 이르는 보병 전원의 지휘는 파르메니온이 맡고 알렉산드로스는 5,000명의 기병을 지휘했다.


보병


전체 3만 명인 보병 가운데 1만 2,000명이 이른바 ‘팔랑크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7미터에 가까운 사리사(장창)를 숲처럼 세우고 밀려오는 거대한 고슴도치 집단이었다. 그들은 전원 순수한 마케도니아인이었다. 최고사령관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바뀐 이후 거대한 고슴도치도 몇 개의 분대로 나뉘었다. 유연성과 기동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는 알렉산드로스의 머리에서 나왔다.


알렉사드로스는 원정에 데려간 1만 2,000명 가운데 9,000명을 6개의 분대로 나누었다. 1,500명으로 이루어진 일개 대대의 지휘는 각각 크라테로스를 비롯한 6명이 맡았다. 모두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레오니다스의 ‘스파르타 교육’을 받았던 동료들로 20대 젊은이였다.


히파스피스타이


카지노 게임 추천는 1만 2,000명에서 9,000명을 뺀 나머지 3,000명의 ‘팔랑크스 대원’으로 ‘히파스피스타이(hypaspistai)’라는 이름을 붙인 특수부대를 만들었다. ‘히파스피스타이’는 경무장 보병에 가까웠다. 주요 무기는 장창이 아니라 짧은 창이었다. 왼쪽에 든 방패도 소형이었다. 따라서 기동성이 뛰어나 쓰임새가 많았다. 중무장 보병과 함께 활용할 수도 있고 기병대와 함께 활용할 수도 있었다.

[마케도니아 히파스피스타이 출처 위키피디아]

이 3,000명은 상황 변화에 재빨리 대응할 수 있는 기능집단이었기 때문에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임기응변의 전법을 좋아하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매우 쓰임새가 많았을 것이다. 기병과 함께 활용하면서 처음부터 공격 요원으로 사용하는 쪽으로 바꾸었다. ‘히파스피스타이’는 알렉산드로스의 전략과 전술 개혁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카지노 게임 추천는 이 특수부대의 지휘를 파르메니온의 차남이며 자기보다 조금 연상인 니카노르(Nicanor)에게 맡겼다. 그도 ‘스파르타 교육’ 시대의 동료였다. 이 부대에는 긴급하게 이동 명령이 내려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설명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인물을 지휘관으로 삼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특수부대를 포함해 합계 1만 2,000명에 이르는 보병 전원은 알렉산드로스를 따라 동방 원정에 참가한 순수한 마케도니아 출신 병사들이었다.


코린토스 회의에서 결정된 원정의 목적이 ‘페르시아 지배 아래에 있는 그리스인의 해방’인 이상 동방 원정군에는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온 병사들도 참가했다. 그리스 각지에서 참가한 보병의 수는 마케도니아 병사와 동일하게 1만 2,000명이었다. 이들과 별도로 트라키아를 비롯한 그리스 북부에서 온 병사들도 동행했다. 또한 크레타섬에서 온 병사를 포함한 6,000명은 경무장 보병이었고 전투에서는 보조 전력으로만 활용할 수 있었다.


기병


다음으로 알렉산드로스가 직접 지휘하는 기병을 살펴보자. 전체 5,000명 가운데 2,000명이 마케도니아인 기병이었다. 이 2,000명은 대부분 마케도니아 왕국의 지배층 출신 젊은이로 ‘콤파니온’(Companion, 또는 ‘헤타이로이(Hetairoi)’라고도 불렀다)’이라고 불렸다. 요컨대 ‘왕의 동료들’이었다. 카지노 게임 추천는 이 2,000명의 지휘를 파르메니온의 장남이며 자기보다 네 살 연상인 필로타스에게 맡겼다.


알렉산드로스는 팔랑크스를 6개의 대대로 나눈 것처럼 ‘왕의 동료들’도 8개의 중대로 나누었다. 1개 중대의 구성원은 250명이었다. 기병의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나누어 편성된 것이다. 중대마다 지휘관이 임명되었다. 제1중대의 지휘관은 클레이토스였다. 알렉산드로스의 경호 역할을 맡은 부대가 클레이토스가 거느린 제1중대였고, 이들은 무모하다고 해도 좋을 젊은 왕의 옆에 바싹 붙어 있어야 했다.


적의 맹렬한 공격을 막은 다음 비로소 공세로 전환하는 팔랑크스와 달리 알렉산드로스가 생각한 기병의 역할은 적진에 쐐기를 박듯 파고들어 적을 갈라놓는 것이었다. 쐐기를 박듯이 돌격해야 하기 때문에 앞 끝이 뾰족한 마름모 형태가 효과를 발휘한다. 부케팔로스를 탄 알렉산드로스가 마름모의 선두에 서서 돌진하는 것이 마케도니아 군대의 특징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신뢰하는 기병에는 테살리아에서 참가한 1,800명도 있었다. 이 밖에 코린토스 회의 참가국이었던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와 트라키아 지방에서 온 기병이 모두 1,200명이었다. 이 모두를 합친 기병은 5,000명이었다. 기병 2,000명의 지휘는 파르메니온의 장남인 필로타스가 맡고, 전체 지휘는 알렉산드로스가 맡았다. 다시 말해, 아버지 세대인 파르메니온과 동행했지만 실제로 부대를 지휘한 사람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세대였다.


또한 카지노 게임 추천더 부대의 큰 특징은 3만 명의 보병과 5,000명의 기병이라는 보병과 기병의 비율이다. 도시국가 시대 그리스의 상식에서 벗어난 특징이었다. 그때까지 그리스에서는 기병이 많은 경우에도 보병과 기병의 비율이 10대 1을 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 이전까지 기병의 특징인 기동성에 주목한 그리스인은 아무도 없었다. 도시국가 시대에는 보병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하지만 기병은 부유층에게 부과된 병역이라고 생각했다.


해군


바다를 건너 그리스에서 페르시아로 향했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에서 해군을 빼놓을 수 없다. 해군은 육군을 유럽 쪽에서 아시아 쪽으로 옮기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아시아 쪽으로 건너간 이후에도 적지에서 고립무원이 되지 않게 하려고 본국인 마케도니아와의 연락과 보급을 확보하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마케도니아는 육군의 전력으로 강대국이 된 나라로 해군과 인연이 없었기 때문에 해군을 보유한 역사가 없다. 그래서 코린토스 회의에 참가한 나라의 해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160척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다른 누구보다 기대한 아테네에서는 삼단 갤리선 20척만 보내왔다. 아테네는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 원정에 비협조적이었지만 코린토스 회의에서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에 그나마 20척이라도 보낸 것이다.


필리포스를 ‘폭군’이라고 부르며 비난과 공격에 열을 올렸던 데모스테네스는 50세가 된 뒤에도 반反마케도니아의 태도를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단 ‘폭군’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바뀌었을 뿐이다. 데모스테네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침공에 절대 반대하였고 전투를 하자마자 페르시아 군대에 패배하면서 원정이 끝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런 아테네에 비해 스파르타의 비협조는 공공연했다. 코린토스 회의에 계속 출석을 거부했기에 이 원정에도 협력할 의무가 없었다. 또한 지난 70여 년 동안 스파르타와 페르시아는 밀착 관계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스파르타가 용병이라는 형태로 병력을 제공하고 그에 필요한 자금을 페르시아가 지불하는 형태였다. 그리스 본토에서는 30년 전에 가치를 상실한 ‘스파르타 브랜드’가 페르시아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비전투 요원들


21세의 카지노 게임 추천는 원정에 데려갈 군사 요원 외의 사람들을 선발할 때도 당시의 상식을 초월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그룹으로 나뉘었다.


제1그룹:영화 촬영 때 스크립터라고 부를 수 있는 기록자로 이루어진 무리.

제2그룹:통역 요원 무리. 페르시아어가 가능한 그리스인으로 구성된 그룹.

제3그룹:기술자 무리. 알렉산드로스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 데 열심인 지도자였다.

제4그룹:의사 무리. 의사들은 왕을 위한 어의가 아니라 야전병원과 같은 규모였다.


또한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에는 지리나 역사, 동식물을 비롯한 많은 분야의 전문가들이 동행했다. 모든 것에 관심을 가졌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철학자도 동행했다. 칼리스테네스(Callisthenes)라는 이름을 가진 철학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인 듯한데, 알렉산드로스는 백부의 인연으로 동행한 이 남자에게 자신 외에 고위 장군의 시중을 드는 소년들을 통솔하는 역할을 맡겼다.


비전투 요원은 현대식으로 말하면 ‘전문직’이었다. 이들은 마케도니아뿐만 아니라 그리스 전역에서 모여든 지원자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 젊은 왕의 동료 가운데 동방 원정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다. 이름은 카산드로스(Kassandros)였다. 그가 홀로 남은 것은 본국 마케도니아에 남아 뒷일을 맡은 아버지 안티파트로스를 돕는 조수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젊은 왕이 지휘하는 원정군은 파르메니온과 그의 경호를 맡은 클레이토스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젊은 세대로 채워졌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은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대장과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의 모험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행군 속도는 빨랐다. 그도 그럴 것이 선두에 선 알렉산드로스가 빨랐다. 덕분에 뒤를 따르는 병사들의 행군 속도도 빨라졌다. 기원전 334년 봄에 마케도니아의 수도를 출발해 도중에 그리스의 다른 지방에서 온 병사들과 합류한 다음 헬레스폰토스(Hellespontos)해협에 도착하는 데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시아로 내딛는 첫걸음


오늘날 다르다넬스해협이라고 불리는 이 해협은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분기선이다. 이 해협에서 가장 폭이 좁은 곳이 유럽 쪽의 세스토스와 아시아 쪽의 아비도스가 마주하고 있는 지점이다. 이곳은 해협의 폭이 5킬로미터 미만으로 좁을 뿐만 아니라 조류도 완만했다.

[다르다넬스 해협, 세스토스-아비도스 출처 구글 이미지]

군대 규모가 3만 5,000명이었기에 굳이 배다리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160척의 배 가운데 대형 선박을 이용해 상류에서 흐름을 완만하게 만들고 있는 사이 다른 배를 총동원한 ‘피스톤 운송(사람이나 물건을 계속 보내는 것)’으로 충분히 건너갈 수 있었다. 필리포스가 이미 세스토스와 아비도스 양쪽을 마케도니아의 영토로 편입해놓았기 때문에 아비도스에 방해하는 페르시아 군대는 없었다.


해협을 감시하는 역할은 파르메니온에게 맡기고 알렉산드로스는 친구들을 데리고 아비도스에서 내려 남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트로이의 옛 전쟁터로 관광을 떠났다. 소년 시절부터 열심히 읽었던 서사시 『일리아스』의 무대였다.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아킬레우스가 트로이를 상대로 싸운 전쟁터였다. 21세의 알렉산드로스가 거기까지 가서 트로이의 옛 전쟁터를 방문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렇다면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는 그사이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다리우스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있는 수도 수사에 머물러 있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정보를 통해 마케도니아 왕이 거느린 그리스 군대가 아시아로 들어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규모가 3만 5,000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듣고 별반 위기감을 느끼지 않은 듯하다.


3만 5,000명이라면 자기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다리우스는 이제 막 아시아로 들어온 카지노 게임 추천를 소아시아 각 지방에서 황제를 대신해 통치하고 있는 ‘사트라프(Satrap)’들에게 맡겼다. 충분히 안심할 만했다. ‘사트라프’라고 불리는 지방장관을 그리스인 용병이 군사적으로 지원하고 있었고, 그 용병을 통솔하고 있는 자는 멤논(Memnon)이었다. 다리우스 황제는 멤논을 페르시아인 가신 이상으로 대우해주었다.

[로도스의 멤논 출처 위키피디아]

로도스섬 출신인 이 그리스인에게 페르시아 왕가의 여자를 아내로 주어 왕가의 일원과 비슷한 대우를 해주었다. 멤논도 돈으로 고용된 용병 대장 이상의 충성심을 다리우스에게 바쳤다. 그리스인 장군 멤논은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와의 첫 전투에 맞닥뜨린 참된 의미에서의 적이었다. 즉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땅에서 벌어진 첫 전투에서 동포인 멤논과 그가 거느린 그리스인 용병들과 싸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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